해생

 

解生 (jiě shēng, 지에싱)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의 무관.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장수 중 한 사람으로서 자는 문영(文英), 호는 순천(順泉)이다.
선부(宣府) 전위(前衞) 출신으로, 한족이 아닌 몽고 계열의 사람이다. [1][2] 1597년 흠차비왜좌익부총병(欽差備倭左翼副摠兵)서도독첨사(署都督僉事)직을 제수받고 정유재란을 맞이한 조선으로 파병되었다.
직산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직접 왜군의 수급 2개를 베기까지 하였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군의 본대 병력이 많은 것을 보고 명나라 군대가 공격하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리자 해생이 부하 장졸들에게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직산 전투로 인해 왜군의 북상이 좌절되었다고는 하나, 이들은 아직도 남원, 임실 등지에 머무른 채, 약탈과 살육을 일삼으며 전라도를 횡행하고 있었기에 제독 마귀는 해생과 양등산, 파귀, 파새 등으로 하여금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원에 주둔하도록 명하였다.
이후에는 잠시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12월에 다시 남하하여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인근의 왜군이 지원하여 조명연합군을 공격하는 등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어 조선의 접반사 송순과도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탈환은 실패하였으나 해생의 전공과 용맹함은 인정되어 감찰어사 진효로부터 상을 받고 다시금 군공을 세우도록 독려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2월, 왜군이 대구광역시에서 약탈을 자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독 마귀는 해생으로 하여금 1천 정예병으로 방어토록 하였다.
4월에는 합천에서 약탈하며 조선인 포로를 납치해가던 2백명의 왜군과 전투하여 72명을 죽이고 150명의 조선인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거창에서도 전투하여 왜군의 수급 1개를 베었다.
9월 11일에는 4천 병력을 이끌고 도산성에 접근하여 1천 왜군을 격파하였고 도산성 주변에 있는 학산성(鶴城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1599년 2월 즈음부터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의 주둔과 철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선조는 해생이 조선에 남기를 바라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해생은 7월 귀국이 결정되었고 8월에 철수하게 된다.
이토록 조선에서 왜군과 전투하며 많은 전공을 세운 해생이었지만 그는 겸손하였다. 선조또한 해생을 수차례 접견하였는데 당시 명군 장교들 중에서는 낮은 직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이 많았는데, 해생은 선조가 접대할 때마다 예를 갖추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는 인물이었다.[3] 때문에 신흠(申欽)은 그에 대해 ‘전투에 앞장서고 부하들을 엄히 단속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1] 당시 명나라 군대의 북방기병들은 요동의 한인 뿐 아니라 몽고, 여진 등 다양한 출신의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2] 해생 뿐 아니라 해생의 지휘를 받으며 함께 직산전투에 참전한 참장 양등산(楊登山) 유격 파귀(頗貴), 파새(擺賽) 등도 모두 몽고 계열의 장수들이었다. 이 네 장수는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맹을 떨쳤기에 통틀어 사장(四將)이라 일컬어졌다.[3]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선조나 조선 관료들이 해생을 접견하는 모습과 예의와 겸손함을 갖춘 해생의 모습을 수차례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