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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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 宣祖

[image]
선조 추정 어진
선조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
계통광헌응도융조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
啓統光憲凝道隆祚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1]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선종(宣宗) → 선조#s-3(宣祖)
존호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2]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3]
계통광헌응도융조(啓統光憲凝道隆祚)[4]
경명신력홍공융업(景命神曆弘功隆業)[5]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소경(昭敬)
출생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조선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6]
즉위
1567년 8월 7일 (음력 7월 3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7]
사망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미시
(55년 3개월 20일 / 2만 199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전
(현 덕수궁 석어당)[8]
능묘
목릉(穆陵)
재위
조선 국왕
1567년 8월 7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1567년 7월 3일 ~ 1608년 2월 1일)
(40년 7개월 9일 / 1만 4,83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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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균(鈞) → 연(昖)[55] [56]
군호
하성군(河城君)
전호
영모전(永慕殿)
부모
생부 덕흥대원군, 생모 하동부대부인 정씨
양부 명종[57], 양모 인순왕후
왕비
의인왕후, 인목왕후

선조의 한글 어필[9]
1. 개요
2. 대중인식과 현실의 차이
3. 생애
3.1. 잠저(하성군) 시절
3.2. 재위 기간
3.2.1. 즉위와 목릉성세(穆陵盛世)
3.2.2. 권력 강화와 기축옥사
3.2.4. 후계 문제
3.2.5. 여진 정책(여진 정벌)
5. 기타
5.1. 창작물에서의 묘사
5.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5.4. 선조 어필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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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선조#s-3(宣祖), 시호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휘는 연(昖)이다.
중종창빈 안씨의 차남인 덕흥군 이초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삼남으로 태어나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조선 왕조 최초로 대군#s-2 출신이 아닌 방계 출신 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종친 가운데 후사를 정하도록 하였고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양자로 들여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수렴청정을 했지만 정치력이 뛰어나 무난히 조정을 휘어잡았다. 이후로도 국가 경영에 관하여서 만큼은 매우 숙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조선의 병폐와 한계에 대하여 여러가지 통찰력을 보이며 여러 방면에서 개선점을 만들었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후손들이 된다. 아울러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를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10]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유학계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라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 때문에 전란기와 평상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왕인데, 사회 경제 통치 면에서 보면 선조 대에 주목할 만한 정책들이 매우 많다. 조선은 초기 이후로 여러가지 국가 체제의 모순이 쌓여서 다양한 병폐가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는 이러한 병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개혁안과 국가 경영을 개선하기 위한 수많은 방향책을 남겼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드러난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2. 대중인식과 현실의 차이


선조는 왕으로서의 능력만 따지자면, 유교 도덕 따위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태어났더라도 크게 성공했을 거라는 말도 나오는 등등 능력 자체는 꽤 괜찮은 임금이다.[11] 하지만,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보인 찌질하고 이기적인 행보로 인해 대중의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암군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순히 말하자면, 전쟁 끝나기 전까지 외부로 튀었다가 돌아와서 왕 노릇을 하려고 했던 이기적인 대기업 회장님 같은 면모를 보여줬던 인물이다. 그 덕분에 통치 시절의 유능한 비전과 선견지명에도 불구하고, 이완용이니 휠체어 타는 대기업 회장 같은 사람이라고 자주 까이는 왕이 바로 선조이다.
하지만, 선조의 정책 비전과 인재 발탁과 같은 경영 능력은 뛰어났다. 이순신을 비롯한 명신들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도록 발탁한 임금이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멸시받던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허준 같은 인물까지도 열심히 지원했고, 권율처럼 40대에 들어서 관직에 나선 인물도 재능만 보고 몹시 이뻐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등 내로라하는 인재들을 누구보다 챙겨준 임금도 선조였다. 선조의 관련 항목에는 선조가 성리학적 임금이고 본인의 잇속을 챙기며 일부 신하들만 챙겼다는 매우 치졸한 역사반달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선조는 오히려 조선의 병폐를 꿰뚫어보고 유교와 성리학 같은 사회의 허울에도 냉소적인 실리주의자에 가까웠다. 심지어, 적어도 통치 분야에 있어서만은 치졸한 모습을 보인 사례가 적으며 그나마 임진왜란과 권력유지와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견제한 몇 년 정도에 몰려 있다. 그 밖에는 많은 분야에서 폭넓은 선견지명을 보였다.[12]
유능한 인물들의 대거 발탁, 대공수미법[13] 등 긍정적이고 유능한 면모가 있었다. 특히, 조선이 초기 이후로 모순이 쌓인 사회 산업 경제 전반의 병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선조는 다방면에서 조선의 모순과 한계점을 개선할 신하들을 모았고, 흔한 착각과는 달리 군사와 첩보에서도 상당히 많은 인재들을 긁어모아서 무려 광해군, 인조시대까지도 그나마 쓸만한 군인들과 실무자들이 선조가 발탁한 케이스가 많을 정도로 인재의 등용과 배치에 있어서 유능한 왕이었다. 즉, 임진왜란 딱 하나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 장기적인 비전이 넘치고 남들에게 잘 휘둘리지 않으며 수많은 족적을 남긴 왕이었던 것.
선조가 어떤 군주였는지는 한 줄로 정리가 가능하다. 능력과 두뇌는 특출나지만, 도덕성과 책임감은 부족한, 한마디로, 국가 지도자보다는 CEO가 훨씬 어울리는, 인성은 말아먹은 이득 우선주의자였다.[14] 문제는, 도덕심이 낮은데 지나치게 똑똑했기 때문에 자기 밥그릇이 위험하면 나라도 버릴 수 있는 철저한 사업가형 지도자였기에 위험인물이었다. 즉, 선조는 원균 같은 간신을 발탁하여 이순신이라는 실무자를 갈아치워 국가를 위험에 빠트리는 계략도 밥먹듯이 시도할 수 있는, 국가의 안전보다도 철저한 손실 계산이 중요한 경영자였다는 뜻이다.[15]
하지만, 객관적인 업적으로는 결코 유치한 선악구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계산은 무섭도록 뛰어나서 명나라와 일본마저도 당혹시킨 선조의 능수능란한 지능 플레이 자체는 쓰임새에 따라서 뛰어났다고 볼 여지가 있다. 선조는 무려 40년 중에서 임진왜란 7년을 제외하고도 전쟁 앞뒤의 33년 동안 유능한 통치자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가를 재건하려 노력했으며, 재위 후반기에도 죽는 순간까지 온갖 군사 정책과 첩보망 형성, 농경과 국가부흥 등의 비전을 남겨놓는다. 다만 이런 비도덕적이고 개인적인 지도자들이 대게 그렇듯이, 교육적으로는 자식들에게 능력을 가르치지 못했다.

3. 생애




3.1. 잠저(하성군) 시절


1552년 11월 11일 한성부 인달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서촌지역)에서 덕흥군하동군부인[16]3남으로 태어났다. 덕흥군은 중종창빈 안씨의 아들로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다. 선조의 원래 이름은 이균(李鈞)으로, 즉위 전 받은 군호는 하성군[17]이다.
그가 태어난 사직동 집은 덕흥군이 어릴 때 아버지 중종으로부터 받은 저택으로, 터가 어떻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거의 다 될 때쯤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바꿔 달라 했다고 한다. 중종은 '멀쩡히 우물이 나오는구만, 별 말을 다한다'며 계속 집을 짓게 했다. 터가 나쁜 줄 알았더니 떠억하니 왕(선조)이 태어난 셈이다.
덕흥군은 선조가 8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하성군은 명종의 명으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양자가 되었다.###
하성군의 숙부였던 명종은 죽은 이복형을 대신해 조카들에게 잔정을 주었는데, 이는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곧잘 궁으로 불렀는데 특히 막내 하성군을 이뻐했다고.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18], 하성군 이균을 궁으로 불렀다. 명종은 대뜸 익선관(왕관)을 벗어 한 번씩 써보라고 시켰다. 두 형은 시키는 대로 했는데 하성군만 사양했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했다. 감동한 명종이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다라 했다'고 쓰여있다. 비록 신빙성에 의심이 가나 소경 대왕 행장을 근거로 광해군일기에 기재된 엄연한 실록이다.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신하들은 후계자 지정을 서둘렀다. 명종은 9월 15일 인사불성인데도 신하들이 명종 곁에 모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말을 꺼냈다. 명종은 인사불성이라 대답이 없었는데, 이틀 뒤인 9월 17일에도 깨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계자 문제를 물었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평소 이뻐했던 하성군에게 병 간호를 시킨다. 조선에서 왕의 간병은 왕세자의 업무였기에 이 병 간호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명종이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때문에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정하는 문제는 다시 들어갔다. 다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는지, 군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를 논한 신하들을 트집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내세우다가 죽을 뻔 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논하는 것은 택군이라고해서 역모처럼 취급되는 중범죄였다. 영의정 이준경의 건의도 별 책망없이 넘어간 점(《명종실록》 1566년 윤 10월 15일)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명종실록》 1565년 11월 16일) 등을 볼 때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묵시적 동의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게 명종 또한 내심 하성군을 후계자로 완전히 인정했고 단지 미처 공개적으로 확정하지 못한 것일 뿐인지, 아니면 하성군 계승도 인정하긴 했으나 '내 나이도 많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려서 중전으로부터 세자를 새로 얻으면 그게 최선이고 정 안되면 하성군에게 계승하자'는, 일종의 차선책 정도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 이 해에 병환이 깊어진 명종이 직접 하성군을 지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 심씨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선조실록》의 총서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하성군으로 한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을축년의 일'이란 앞서 말한 하성군의 병 간호를 말한다. 즉 인순왕후 역시 당시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준경 외의 신하들도 이를 순순히 수용하였던 것을 보면 이미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마침 하성군의 친부인 덕흥군은 일찍 사망했고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하성군이 공식 즉위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게다가 정씨의 친정, 즉 하성군의 외가 역시 권세가 큰 편이 아니었으며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따라서 척신들이 딱히 발호할 여지도 적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듯이 선조는 복성군양자였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명종의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의 (양)아들인 그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았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나? 할 수 있지만 복성군의 부인 역시 저 때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없었다.
어쨌든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한다. 혹시나 요행을 바라고 하성군 즉위에 공이 있음을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영의정 이준경이 '이미 전하께서 직접 정하신 일인데 공은 무슨 공?'하면서 모두 모아 불태웠다고 한다.
야사에는 영의정 이준경이 숨을 거둔 명종에게 귀를 대고 "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사온데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오리까?" 라고 속삭이고는 좀 뜸을 들인 후 '양위를 허락하셨다'고 외쳤다고. 이때 "덕흥군의 제삼자"라고 조서를 쓰는데 한림 윤탁연이 '三(3)'을 어음 등 중요 문서에서 변조를 막기위해 쓰는 參(3) 자로 적어 이준경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19]
선조는 조선의 첫번째 서출 방계 임금으로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적장자까지는 아니라도 모두 왕비세자빈이 낳은 적자들이 왕위를 이었다. 성종은 삼촌 예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에 올랐지만, 원래부터 의경세자(덕종 추존)와 세자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조의 적손이었다. 당시 예종의 친아들 제안대군도 엄연히 있었다. 3살이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적통 문제를 따져들어가면 성종에게 위협이 될 소지는 있었다. 그래서 의경세자를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예종 비 안순왕후보다 높이는 약간의 억지를 쓰긴 했다. 반정으로 즉위한 세조, 중종 역시 '대군'들이었다.[20] 참고로 적장자 왕은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뿐이고 그 중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기간이 모두 10년 미만이다.
조선 역사상 마지막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21]

3.2. 재위 기간



3.2.1. 즉위와 목릉성세(穆陵盛世)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에는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없었다. 성종의 경우 전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응당 되었어야 할 자리를 뒤늦게 돌려받은 것뿐이다.[22]
익선관 건은 명종이 잘하던 놀이였고 으레 체면치레하는 걸 선조가 왕이 된 이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위의 기록도 애초에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행장이다. 물론 선조는 명종 승하 2년 전에 명종이 크게 앓았을 때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른 왕족 중 하나였지만 물망에 올랐던 왕족 중에는 선조보다 항렬이 높은 왕족들이 있대도 왕의 아랫항렬에서 양자를 뽑기 때문에 원칙상 제외 되며 명종은 한 항렬 아래의 조카들에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했다. 명종이 말년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이준경이 만일의 경우 후사를 묻자 명종이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한 일이 실록에 실려있다. 덕흥대원군 항목을 참조하면 덕흥군 부부는 일찍 사망한데다 덕흥군의 외가도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20년간 시달린 조선 신료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선택된 임금 재목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왕실에선 사대부들과 달리 그렇게 심한 차별이 있진 않았다. 적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계할 수 없지만 적자가 없거나 양자로 들이는 건 허용되었기 때문.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다잡는 한편 명종 치세 때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종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23]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절을 할 수도 없었다.[24]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추숭 떡밥이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세자로서 제대로 된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즉위 직후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25]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붕당이 대두되면서 파당 갈등 문제도 새롭게 부각되었다.
즉위 초반에 어쩐 일인지 중종 임금 시절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 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다섯째 아들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3.2.2. 권력 강화와 기축옥사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임금으로써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해 먹었다.
이러한 선조의 특출난 정치적 수완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여러 인사들을 줄줄이 엮어 천여 명 이상이나 처형하거나 쫓아내고 하면서도 이 일의 실질적 배후인 선조는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방관하거나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는 등의 제스처로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놀라운 면모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큰 규모이다.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꽤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고를 뒤집어 쓴 경우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 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 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2.3. 임진왜란


많은 유림들이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더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와중에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26]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주리라 기대하고 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로 참패.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분조를 넘겨줬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선조의 파천이 욕을 먹는 이유는 전쟁 수행 목적으로 파천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양을 떠난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튈 계획을 세웠는데(이른바 요동 귀부),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요동으로 튀니마니하는 소리(선조실록 1592년 5월 4일)가 나왔고, 평양에서 나온 후 영변에서는 선조 본인이 대놓고 요동으로 튀겠다고 징징대기 시작하고 명나라에 망명하겠고 공식 요청을 하는 모습까지 보인다(선조실록 1592년 6월 13일). 명나라는 조선군을 통제해야 할 임금이 딴 나라로 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때문에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겹쳐서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27]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표했고 결국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무산되었다. 특히 왕실과 종묘 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광해군에게 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 사직과 왕실을 지키기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 왕이자 아버지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거기에 파천 이후 분노한 백성들이 한성에 쳐들어가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손실되었다.[28] 그 외에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 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각지에서 온갖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들어다 바쳤을 정도.[29]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얼마나 실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조 본인도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우려했고[30] 임란 말기에 우려한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한창 전쟁중인데도 이런 숙청을 벌였다는 점과[31] 그 대용으로 뽑은 원균의 부대해체능력을 온전히 파악 못했다는 것. 이순신의 대체자로 지정한 원균이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초전박살나고 하삼도 백성들이 몽땅 왜구한테 고기육포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자신도 양심상 찔렸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자기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고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말할 정도.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 대패의 원흉 자체가 선조였다. 안 나가려고 필사적으로 각 잡는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32]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 있다능!"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3.2.4. 후계 문제


임진왜란-발발 후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광패한 악한이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다만, 너무 잦은 양위 소동으로 실록을 편집하던 사관조차 빡쳤는지 실록에서 디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33]

사신은 논한다. 상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하여 반드시 승락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중략)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3년 9월 7일

한 마디로 양위 파동 일으켰을 때 말리지 말고 양위하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고 적어놨다. 더 나아가 선조의 결단을 칭찬하는 듯한 단어를 써서 무척이나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 중에서도 유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 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되었다.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다.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의 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넸으나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3.2.5. 여진 정책(여진 정벌)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굴을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이 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병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34],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젹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35]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4. 후대의 평가




5. 기타


  • 원래는 선종이었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됐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오기된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사대주의 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조선의 숙원이었다. 실록은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 및 명나라 사람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도와 명을 친다는 무고를 바로잡은 것, 왜란을 극복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선조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인 광해군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밀어붙인 사안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칭송과 권위를 덧붙이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권력자를 위해서다. 참고로 이 묘호는 북송의 건국자 송 태조 조광윤의 아버지 조홍은이 황제로 추존되며 받은 묘호이기도 하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 부윤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 바 금지한 것. .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팅을 권하기도 했다!

>상이 류성룡에게 전교하였다.
>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전[36]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
>【사관 :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1593년 11월 12일) 원문
기록이 저것이 전부라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부사수가 돌려가며 장전한다는 언급으로는 리볼버개틀링의 원리로 작동하는 공용화기로 추측된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류성룡도 세트로 깠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 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이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만한 자를 가렸다.[37]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 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나 그의 아들인 광해군 대에 잉글랜드사략선단조선의 해안을 침공했다가 조선 해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으므로[38] 실제로는 광해군 시기의 일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봉유설에서는 이 사건이 선조 때의 일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사략선단은 프랜시스 드레이크[39]의 함대라고 추정된다.
  • 서양과 관련된 선조 대의 또다른 기록이 있는데, 포르투갈인 선원인 마링예이루[40]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인해 조난당하여 조선의 해안에 표류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이 사람은 현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인데,[41], 조선 조정에 의해 명나라를 거쳐 본국인 포르투갈로 송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에 포르투갈인 선교사들이 만력제에게 바친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들이 조선으로 파견되어오자[42] 이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 등, 생각 외로 서양과의 인연이 꽤 되는 왕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좌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기사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5.1. 창작물에서의 묘사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선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
  • 김성한의 임진왜란 소설 7년전쟁에 당연히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임란도 임란이지만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하는 데다가 재위 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엄청나게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사극에도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사극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상대적으로 악역을 많이 맡는다. 단, 드라마 허준에서는 박찬환이 분했는데,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뭇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43] 그러나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사극(불멸의 이순신, 징비록 등)이나 영화에서는 무능하거나 허둥대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왕권 강화나 전란 중 왕권 유지에 혈안이 된 소심해 보이면서도 정치판에서는 상당히 음험한 군주의 모습이 더 부각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커진 편이다. 2000년대 이전 사극과 이후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들을 비교해 보면 묘사가 사뭇 다른 걸 볼 수 있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 온리 콤판의 만화 YI SOON SHIN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심하게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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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렇게. 물론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 [44]
  • 간혹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인물이며 시대도 임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오성X한음에는 당연히 등장. 나름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한양을 내주고 함흥으로 퇴각한다. 이 때 정원군(인조의 친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끌어들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되려 여진족에게 살해당한다.
  • 이순신의 나라와 동일한 작가가 쓴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왕이 되지 않았고[45], 하성군으로 남았다. 주색잡기를 비롯한 비행으로 악명은 자자하나, 주인공의 명으로 볼모로 가게 된 일본에서는 스파이활동을 충실히 수행하여 나라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허나 경인왜란이 벌어지자 그의 가솔들 중 상당수가 순왜가 되고, 아들인 임해군이 노부나가에게 포섭당해 왕을 참칭하는 바람에 의금부에 투옥되는 고생까지 하게 된다.[46] 그래도 스파이활동의 공이 커서 죽음은 면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연해주로 전가사변 된 뒤, 아들들과 첩들까지 모두 잃게 되고 남은 유일한 아들 광해군은 유럽으로 떠나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 임진록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 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한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광해의 연인에서는 궁녀를 건드린 아들 정원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늦둥이 아들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광해군을 폐세자시키고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주라는 유지를 남겼다. 신판에서는 방계 출신이라는 열등감 때문인지 후궁인 공빈 김씨를 괴롭히는 걸 즐긴 사이코패스로 나온다.

5.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 현석 - 1985년 《조선왕조 5백년 - 임진왜란, 회천문》
  • 김성옥 - 1995년 《서궁
  • 박찬환[47] - 2000년 《허준MBC
  • 이호재 - 2000년 《천둥소리KBS
  • 임동진 - 2003년 《왕의 여자SBS
  • 곽정욱(아역), 조민기/최철호[48](성인) - 2004년 ~ 2005년 《불멸의 이순신KBS
  • 김창완[49] - 2010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정보석 - 2013년 《불의 여신 정이MBC
  • 전노민 - 2013년 《구암 허준MBC
  • 이성재 - 2014년 《왕의 얼굴KBS
  • 김태우 - 2015년 《징비록KBS. 문서 참조.
  • 박영규 - 2015년 《화정MBC
  • 번외 : 김원해 - 2015년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조선왕조실톡 7화 MBC
  • 번외 : 이문수 - 2016년 <웹툰히어로 툰드라쇼2> - 조선왕조실톡 5화 MBC
  • 이지훈 - 2016년 《마녀보감JTBC
  • 김광영 - 2016년 《임진왜란 1592KBS
  • 박호산 - 2017년 《대립군
  • 번외: 장혁[50] - 2019년 《왕이 된 남자tvN

5.3.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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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상술했다시피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곳으로 이장(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다. 이 능은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인데,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 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훨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참고로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51]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마냥 어지러웠던건 아니고 선조 대는 세조가 씨뿌리고 연산군과 중종이 키워놓은 조선 중기의 사회 모순[52]에 대한 보완과 개선 노력이 시작되는 굉장히 의미있는 시기이다.

5.4. 선조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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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한글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이곳 #을 참조하자.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53]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54]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6. 관련 문서


[1] 사망 당시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2] 선조 23년[3] 선조 37년[4] 광해군 8년[5] 고종 29년[6]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7] 애석하게도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리면서 선조는 조선왕조 역사 중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여담으로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다음 왕인 순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가졌고, 그를 끝으로 왕조가 멸망했다.[8] 이 이름은 선조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9] (네가 쓴) 편지 보았다. (정안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 (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음하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거든 내 친히 (돋은 것을)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염려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 계묘 (1603년) 복월(11월) 19일(9일) 사시(오전9~11시)[10]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나빴기에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넘겨버렸었다.[11] 선조는 왕위 계승은 생각도 못했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즉위하였는데, 심지어 서자 출신이어서 상당히 불안정한 초반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곧 신료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무려 40년 중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던 임진왜란 7년을 뺀 33년 동안 목릉성세라고 칭송받은 선조의 모습은, 그가 통치자의 자질만은 타고난 인물임을 방증하는 부분이다.[12] 선조가 다방면에서 신하들을 뽑은 것 자체가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증거였고, 실제로도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과 그들이 함께 만든 비전들이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조선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정책과 개혁안으로 이어진다.[13] 선조의 치세에 신하들이 건의했으며, 선조는 이것이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라고 관심을 가졌으나 진행 과정에서 현실성을 따진 결과 당대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등, 후대의 신하들과 현대 학자들과 비슷한 선견지명을 보였다. 진짜로 능력있던 왕은 맞는 셈. 선조는 당대의 현실성을 생각하여 이러한 정책에 수정을 거치고 담당하는 신하들과 함께 후대에 시행하도록 기록을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대동법으로 이어진다.[14] 역사적으로 이런 류의 국가원수는 의외로 많다. 국가원수로서는 위급시에 국가를 버리는 초위험인물이지만, 기업 운영자였다면 대성할 케이스였던 것. 현대사회의 기업가 출신의 지도자들 중에도 이렇게 인간성이 글러먹어서 뛰어난 정치력과 국가멸망급 위기를 모두 가져오는 인물은 동서양 모든 역사에 한 번씩 등장한다.[15] 선조가 벌인 뻘짓은 이순신에 대한 푸대접 이외에도, 명나라와 조선 조정에 정치적 시위 형태의 퍼포먼스를 여러 번 벌임으로써 그들을 견제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이 있다.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왕권을 활용하여 명나라와 신하들을 협박하는 도박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의 안위와 왕권에 매우 집착하여, 임진왜란 초기에는 아예 조선에서 탈출하려고 하여 조정과 명나라를 당혹시키는 쉴드 불가능한 모습도 보였다.[16] 하동 정씨라는 뜻. 집현전 학사,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의 증손녀이다.[17] 군호는 경남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18] 중종의 아들이자 서숙부인 금원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9] 이런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제 수단에 쓰인다. 석 삼(三. 3)을 쓰면 다섯 오(五, 5)나 심지어 만(萬, 10000), 억(億 : 초기에는 10만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1,000,000,000!)으로 바꿔버리기 쉬우니까. 이것은 한 일(一, 1 → 壹)과 두 이(二, 2 → 貳)에도 적용된다.[20] 다만 정현왕후는 처음에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폐비 윤씨가 쫓겨나자 왕비가 되었고 뒤이어 아들을 낳았다.[21] 선조 재위 중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불타 사라졌고, 270년 간 복구되지 못했다. 고종 때 복구했지만 고종 다음 임금인 순종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하였고, 그를 끝으로 왕조가 멸망했다.[22]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23]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한일합방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의 경계를 사 사사되기도 했다.[24]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25] 심의겸과 인순왕후작은 아버지[26] 이순신의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 좌수사 박홍이 이천 병력으로 동래 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 하다.[27]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28]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왜군의 한양 입성 후 경복궁을 묘사한듯한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때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29]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싹 죽임당했다.[30]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31]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할때는 숙청을 하지 않았고, 한신, 주코프 등 마음에 안들어도 유능한 인재들은 중용했다[32] 하지만 이건 원균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원균이 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선조의 총애도 있었지만 원균 스스로가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올렸기때문이다.[33]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양위 파동을 일으킨 왕이다, 그것도 전란 도중에 이런 쇼를 계속 벌이니 사관이 화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34]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35]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종군했다.[36] 실록 웹버전에는 '장진'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성 시 용어를 헷갈린 듯. [37] 윤흥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다대포 전투에서 목숨걸고 싸워 전사했다.[38] 광해군 시기의 침공도 잉글랜드 해적들의 소행이었다.[39] 칼레 해전의 주역인 그 프랜시스 드레이크다. 실제로 선조의 치세 기간에 드레이크의 사략함대가 태평양아메리카에서부터 서쪽으로 횡단하여 세계일주 항해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중간에 일본이나 조선 앞바다를 지나갔을 가능성도 없지않다.[40]선조실록》에서는 '마리이'라고 기록되어있다.[41]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은 있으나, 이를 입증할만한 사료나 유물 등이 전무하다.[42] 다만, 《선조실록》에는 이들 흑인들의 출신국이 프랑스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43]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 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허준에서 선조 역을 맡은 박찬환 씨는 후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을 맡았는데, 수시로 상관에게 왕은 절대 믿을 것이 못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44] 세종은 실제로 고기를 즐기는 식습관과 운동부족 등으로 인해서 비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5] 이는 진성대군 대신 세자 이황(인종)이 왕이 되었고, 그때문에 덕흥군은 왕자가 아닌 왕족에다, 인성과 행실이 개차반이라 왕위 계승에서 배재하였다.[46] 실은 그가 일본에 갈 볼모가 된 원인도 임해군이었다.[47] 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고, 왜란때는 분조를 이끄던 광해군을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다만 광해군과의 사이고 돈독하게 나온것은 아니고, 광해군과의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역사나 이후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에 비하면 그래도 부자지간이 나쁘지 않게 나온다. 워낙 인기있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그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중에선 다른 사극에서 흔히 보이던 인물 이름을 알리는 자막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선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참고로 극중에서 허준이 존재했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1부에 등장한 '선조 1년'이란 자막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뿐이다.[48] 당초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을 빚고 심지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를 내자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꽤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49] 재미있게도(?) SBS의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했다. 전란으로 욕 먹는 조선의 두 임금을 모두 연기한 셈.[50] 실존 인물이 아닌 그 모티브만을 따온 창작 캐릭터이다.[51]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52] 지배층의 모랄 해저드,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53] 한석봉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데다가 선조 자신부터가 한석봉 팬이라 한석봉에게 가평군수에 앉혀준적도 있었다.[54] 인조와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