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레 27대)

 


'''후여조 27대 황제
顯宗 永皇帝 | 현종 영황제
'''
'''묘호'''
'''현종(顯宗)'''
'''시호'''
영황제(永皇帝)
'''성씨'''
레(Lê / 黎 / 여)
''''''
주이 디에우(Duy Diêu, 維祧/유조)
'''부황'''
순종(純宗)
'''모후'''
유순태후(柔順太后)
'''생몰년도'''
1717년 5월 20일 ~ 1786년 8월 20일
'''재위 기간'''
1740년 6월 14일 ~ 1786년 8월 20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연도별 기록
5. 가계도
6. 외부 링크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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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여조 제27대 황제.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영황제(永皇帝). 생전 재위중 존호는 연의흠공자인덕수황제(淵懿欽恭仁慈德壽皇帝).
휘는 유조 또는 유단(維𥚻). 전임인 의종의 조카로 순종의 아들이다.

2. 생애


1735년 아버지 순종이 사망하자 장자의 신분이였으니 뒤를 이어 즉위해야 했지만 정왕태비 무씨(武氏)의 압력에 의해 정주의 왕 정장이 여유조의 즉위를 취소하고, 순종의 동생이자 여유조에겐 숙부인 여유신(의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5년 후에야 숙부 의종이 양위하여 황제로 즉위한다.
즉위 이후 정왕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기에 별 다른 행적은 없지만 재위 말기에 베트남 역사상 최대 농민 규모인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 광남국찐씨 정권이 축출당한다. 찐씨가 축출당하자 외형상 현종은 친정을 시도했지만 며칠 후 사망한다.
재위기간은 가장 길었으나 오랫동안 실권을 잡지 못했으며 그의 치세동안 정영, 정삼, 정종이 실권을 잡고 대신 통치했다.

2.1. 서산 농민 봉기



경흥(景興)[1] 46년 명목상 제후국인 광남국에서 완악이 농민봉기를 일으킨다. 자세한 것은 떠이선 농민 운동광중제 항목 참조,
애초 실권이 없어 중립을 유지했고 떠이선 세력의 완혜(광중제)가 정씨를 축출하자 그를 정왕처럼 대우했으며 공주와 혼인시킨다. 명목상으론 정씨가 없어지니 레 왕조가 서서히 힘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사망


찐씨가 축출되고 완혜를 대면한 후, 명목상 실권을 잡은지 며칠만에 사망한다. 대월사기전서엔 현종의 사인을 단순 병사라고 하나 청사고 월남전엔 현종이 농민봉기로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게 된 것이라고 적혀있다.
시신은 반석릉(磐石陵)에 매장되었다.

3. 기타


  • 여조의 황제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46년)했다. 하지만 실권을 갖지 못하였기에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난 후 찐씨가 축출되어 명목상 친정을 시행하지만 그마저도 2일 하고 사망한다. 찐씨가 축출된 이후 레 왕조는 실권을 회복하여 민제 대에는 정식으로 친정을 시행한다.
  • 승려 원소(元紹)[2]에게 행단(行端)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 그의 손자 민제는 완복영서산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왕조를 건국하자 가경제의 배려로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어 반석릉 아래에 매장되었다.

4. 연도별 기록


  • 영우[3] 6년 (1740년 6월 14일) 즉위하고 연호를 경흥(景興)으로 개원하다.
  • 경흥 46년 (1785년) 신하들이 존호 '연의흠공인자덕수황제'를 올리다
  • 경흥 46년 (1785년 9월) 광남국에서 봉기가 일어나다.
  • 경흥 47년 (1786년 7월) 완혜를 원수부정익운위국공(元帥扶正翊運威國公)으로 책봉하다.
  • 경흥 47년 (1786년 8월 10일) 황제가 만수전(萬壽殿)에서 죽다.

5. 가계도


  • 부: 순종(純宗) 여유상
  • 모: 도씨(陶氏)
    • 현종(顯宗) 여유조

6. 외부 링크



7. 둘러보기



'''후여조의 역대 황제'''
26대 의종 여유신

'''27대 현종 여유조'''

28대 소통제 여유기
[1] 현종의 연호.[2] 월남불교 원소선파의 시조.[3] 永佑. 의종의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