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청사고
淸史稿
'''
'''저자'''
자오얼쉰
'''시기'''
20세기 중화민국
'''언어'''
근고한어
'''권 수'''
536권
'''분량'''
1583년 ~ 1911년 (329년)
명신종 11년 ~ 선통제 4년
1. 개요
2. 편찬과정
3. 청사(淸史)
3.1. 중화민국 편찬 청사
3.2. 중화인민공화국 편찬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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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淸史稿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편찬된 기전체 역사서. 자오얼쉰(趙爾巽)이 주동이 되어 학자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사서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稿)라는 표현이 붙었다. 현재 청사고를 바탕으로 중화민국에서 완성한 청사가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청사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청사고는 정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24사 참조. 중국의 역대 정사인 24사에는 들지 못하지만, 《청사고》를 포함하여 25사라고 부르거나 《신원사(新元史)》까지 포함하여 26사라고 부르기는 한다.
중국어 위키문고에서도 동관한기, 신원사와 함께 관련문헌(相關)으로 두었다. 《청사고》의 '고(稿)'란 표현은 이 책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초고라는 뜻이다. 대체로 이런 사서의 초고에는 이렇게 고가 붙고, 이는 전 왕조의 사서였던 《명사(明史)》도 마찬가지였다.

2. 편찬과정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공화제였기 때문에 후임왕조가 전임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중국의 전통을 이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1914년 총통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참칭하였고, 사서편찬의 전통을 잇기 위해 '청사관'을 설립해 이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유신인 자오얼쉰(趙爾巽, 조이손)을 청사관장에 임명하여 《청사(淸史)》를 집필하게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은 곧 혼란에 접어들었고, 1920년대 초에 청사의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편찬이 중단되었다. 1926년 다시 편찬이 시작되었고, 1928년에 군벌 장쭤린의 재정지원으로 출판하려고 했으나, 출판 직전에 자오얼쉰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이후 청사관에는 내분이 일어났고, 이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는데, 청사고에 국민당이 역적(賊)으로 표기되어 있고, 신해혁명 후의 연호도 중화민국 연호가 아니라 청나라 연호인 선통을 그대로 쓴 것을 알고 출판을 금지하고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국민당의 검열을 받아 수정된 판본을 '관내본'이라고 하고, 이후 국민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출판된 원본을 '관외본'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초고라는 뜻의 '고(稿)'가 붙어서 청사고라고 한다.
본래의 《청사고》는 전권 536권이고, 기전체의 전통을 따라 본기 25권, 지142권, 표 53권, 열전 316권으로 되어 있다. 이후 어느 정도 마이너한 체인지가 있었다.[1]

3. 청사(淸史)


어쨌거나 이 청사고를 바탕으로 현대 중화권에선 두가지 판본의 청사가 나왔다.

3.1. 중화민국 편찬 청사


국공내전 패배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난 이후 중화민국은 1961년에 《청사》를 편찬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로 역사왜곡이 일어났다는것이 대표적인 비판 이유, 한 마디로 중화민국을 정통으로 삼았다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륙 중국에선 이 중화민국판 청사 대신 청사고의 관내본을 정사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중화민국 판본은 신해혁명이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부정적인 부분을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여기에 대만에서 명의 부흥을 꾀한 정씨 왕국의 '정성공재기(鄭成功載記)'나 청에 저항한 명의 유신들을 다룬 ‘명유신열전(明遺臣列傳), 남명(南明) 정권을 다룬 '남명기(南明紀)' 등을 포함했고 태평천국을 다룬 홍수전재기(洪秀全載記)와 청나라에 맞선 혁명가들을 다룬 혁명당열전(革命黨列傳) 등을 포함하였다. 정성공이나 남명 정권을 다루는 것에서 대만으로 국부천대한 이후 국민당 정권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본기(本紀) 25권, 지(志) 136권, 표(表) 53권, 열전(列傳) 315권, 보편(補編) 21권 등 모두 550권으로 구성되었다.

3.2. 중화인민공화국 편찬 청사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사의 정통을 자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 판 청사를 인정하지 않고 청사 대신 청사고의 관내본을 정사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 또 마르크스 역사관을 도입하여 2002년부터 청사공정(淸史工程)을 진행하고 있다. 후임 왕조가 전임 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이므로, 청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2012년 ~ 2013년에 완성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좀 미루어졌는데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 2016년 1월 1일 해외판 보도에 따르면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하고 2016년에 중화인민공화국 판 청사가 완성되었다. 후세엔 중화민국판과 중화인민공화국판 두가지 청사가 전해질 듯하다.
청사가 완성되리라 여겼던 2012년~13년 무렵에 한국에서 관련 보도들이 좀 나왔는데, 일부 무지한 기자들이 동북공정의 예처럼 조선이 청의 속국이었다면서 역사왜곡을 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역사서가 희박한 고대면 모를까 뻔히 명을 사이에 둔 외교문제로 전쟁까지 벌인 조선-청 관계를 왜곡해봤자 다른 현안도 쌓여 있는 한중관계에 마찰만 일으키고 국제적 비웃음만 사기 때문이다. 또한 동북공정의 대상은 만주가 중국의 영역 밖이었던 고대에 한정된 것이며, 이미 만주를 기반으로 한 만주족이 통채로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 시기가 아니다. 청사고나 동북공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가 지레 추측기사를 쓴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목적은 청사고를 통해 청나라가 자기영토와 주변 지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는 것을 알리며, 중국사의 정통을 자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청의 영향력이 미친 남중국해, 티베트, 대만, 신강(위구르 자치구) 등에 대한 영유권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역사편찬을 통한 현정권의 정통성 합리화는 중화인민공화국청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편찬되어 온 중국의 관찬 사서에서 항상 나타나는 부분이다. 원사를 쓴 명나라도, 명사를 쓴 청나라도 마찬가지였으며, 위의 중화민국판 청사도 대만을 무대로한 정성공이나 남명정권을 강조해 다루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청사고의 관외본은 일부 권의 첨삭으로 인해 529권으로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