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제

 



'''
仁宗 嘉慶帝
인종 가경제
'''
'''묘호'''
'''인종(仁宗)'''
'''시호'''
'''만주어'''
숭옌 후왕디
ᠰᡠᠩᡤᡳᠶᡝᠨ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한호'''
사이충아 펑션 한
ᠰᠠᡳᠴᡠᠩᡤᠠ ᡶᡝᠩᡧᡝᠨ ᡥᠠᠨ᠌
'''칸호'''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ᠰᠠᠶᠢᠰᠢᠶᠠᠯᠲᠤ ᠢᠷᠦᠭᠡᠯᠲᠦ ᠬᠠᠭᠠᠨ
'''연호'''
'''만주어'''
사이충아 펑션
ᠰᠠᡳᠴᡠᠩᡤᠠ ᡶᡝᠩᡧᡝᠨ
'''한자'''
가경(嘉慶)
'''몽골어'''
사이시얄투 이루켈투
ᠰᠠᠶᠢᠰᠢᠶᠠᠯᠲᠤ ᠢᠷᠦᠭᠡᠯᠲᠦ
Сайшаалт ерөөлт
''''''
'''만주어'''
아이신교로 용얀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ᠶᠣᠩ ᠶᠠᠨ
'''중국어'''
아이신줴뤄 융옌(愛新覺羅 顒琰)[1]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옹염
'''신장'''
165cm[2]
'''생몰'''
음력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 (61세)
'''재위기간'''
음력 1796년 2월 10일 ~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후
3.1. 강건성세의 끝
3.2. 죽음
4. 각종 매체에서
5. 가정 관계
5.1. 아내
5.2. 첩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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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5년 선제인 건륭제의 퇴위로 즉위하여 1820년까지 약 25년간 재위한 청나라의 7대 황제이며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이고, 건륭제가 늦은 나이에 얻게 된 아들이라 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대단히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하는 군주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으며 신하들의 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다. 예컨대 당시 관료로 종사하던 홍량길이 가경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간언하자 우선 그를 내쫓은 후 다시 들여와 크게 중용하곤 하였다. 가경제는 인(仁)의 군주를 자처하였으며 이후 전개되는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 역시 최선을 다해 막으려 힘썼다. 다만 옹정제와 같은 무시무시한 워커 홀릭도 아니었으며 건륭제와 같이 시대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노력은 중국 전 지역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가경제의 전 시대인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도광 이후의 비중없는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라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의 재위기 청나라는 건륭제 시기부터 싹튼 멸망의 조짐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백련교도의 난이 터지며 청나라의 오랜 평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전국에서 반란들이 연이어 터지며 청나라의 통치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다. 한편 지나치게 지속된 평화로 인해 군대는 날로 기강이 해이해져갔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국고는 말라갔으며 국력은 갈수록 약해져만갔다. 게다가 서양 열강들이 일부러 중국 내부에 강력한 마약인 아편을 유통시키며 사회는 썩어들어갔고, 은의 유출이 심화되며 경제는 무너져갔다. 다만 그의 시기까지만해도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으며, 이후의 황제들의 시기처럼 국가가 막장으로까지는 치닫지 않았다.

2. 즉위 전


건륭제의 열다섯번째 아들로서, 생모는 영의황귀비 위가[3][4]이다.
그가 건륭제의 후계자로 낙점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륭제가 처음으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적장자) 단혜태자 영련(永璉)이었다. 영련은 효현순황후와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태자밀건법에 의해 후계자로 정해졌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이에 건륭제는 슬퍼하면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후계자 밀지를 공개한 후에 태자로 추봉하였다. 건륭제가 두번째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7남 영종(永琮)이었다. 영종 역시 효현순황후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건륭제는 영종을 후계자로 낙점했었음을 공표한 후에 철친왕(哲親王)으로 추봉하였다. 이후에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기 전까지 후계자를 누구로 했느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영종이 사망한 시점이 1747년이고, 후일의 가경제가 되는 영염이 태어난 시점이 1760년이다. 영염이 태어나자마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할지라도 13년의 후계자 공백이 남는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했을 때, 장년으로 접어든 건륭제가 이 기간 동안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인다.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1748년 효현순황후가 사망했을 때, 건륭제는 서장자였던 영황(永璜)과 3남 영장(永璋)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물론 영황과 영장 역시 건륭제보다 일찍 죽었다.) 4남인 영성(永珹)과 6남 영용(永瑢)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어져서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알 수 있다. 1748년 당시 7남 이하는 어리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5남 영기(永琪)가 이 기간 동안 잠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건륭제의 아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의 작위를 얻은 점과 영기의 생존기간 동안은 그가 건륭제의 아들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시 옹정제 재위기간에는 형제 중에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고, 도광제 역시 가경제 재위시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다. 대체적으로 후계자에 근접해 있는 아들들이 친왕의 작위를 얻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료에서 보이는 건륭제의 영기에 대한 총애와 영기의 능력(특히 만주어 구사 능력과 무예 등) 등은 가경제가 후계자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영기가 건륭제의 후계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5남 영친왕 영기(榮親王 永琪) 또한 1766년 사망했고, 이 해에 계황후 휘발나랍씨도 모종의 이유로 건륭제에게 미움을 받아 유폐되었다. 계황후의 아들이었던 12남 영기(永璂)는 황후 출신의 적자로서 후계자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친의 유폐로 입지가 불안하게 되었으며 건륭제보다 먼저 1776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계황후 대신 새황후를 두지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인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후궁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볼 때 건륭제는 영귀비를 황후에 올리고 싶었으나 한족출신(한군팔기)인게 문제여서 황귀비에 봉하고, 이때부터 영귀비 위가씨 소생을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95년 당시의 건륭제의 살아있는 아들들은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5남 영염(永琰/가경제), 17남 영린(永璘) 등 4명 뿐이었다. 이 중 친왕에 책봉된 아들은 11남 영성(성친왕)과 15남 영염(가친왕)이었다.(1789년에 동시에 화석친왕에 책봉). 건륭제는 영성과 영염을 정무에 참여시켰고, 영선은 일처리를 못하고, 영린은 여자를 밝히고, 영성이 무예를 싫어하고 문약하고 결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륭제와 대신들의 신망은 영염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마침내 1795년 9월, 건륭제는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듬해 제위를 물려주었다.
사실 건륭제는 89세까지 살며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장수했고, 더 오랫동안 재위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전황 강희제의 61년 재위 기록을 깨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60년째 되는 해에 양위한 것이다. 다만 건륭제는 양위한 이후에도 죽기전 약 3년 동안은 상황으로 군림하며 가경제를 제치고 막후의 실권자로 남아있었다.

3. 즉위 후



3.1. 강건성세의 끝


가경제는 건륭제가 승하한 뒤, 즉 즉위하고 3년이 지나고서야 친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경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건륭제 치세 후기부터 드리운 재정 파탄과 권신의 부정 축재로 인한 부패와 관료 사회의 타락이라는 재앙을 그대로 물려받아 골머리를 썩기 시작한다. 그 좋은 예로 1799년 상황 건륭제가 사망하자 상황이 총애한 만악의 근원 니오후루 허션(鈕祜祿 和珅, 뉴호록 화신)을 체포하여 자결하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당시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청나라의 20년치 세금'''과 맞먹었다고 한다. 건륭제 항목에서도 다루었지만 허션의 이러한 부정 축재는 만주 - 몽골 귀족, 중앙과 지방 관료, 향신층의 축재와 사치를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 청나라의 멸망의 전주곡이 되었다.[5] 그런데 가경제 본인은 그 몰수한 허션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6]에 넣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화신이 죽으니 가경이 배불리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그래서 허션 하나 잡았다고 달라진건 크게 없었다. 오히려 엄청난 부패가 허션뿐만 아니라 청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만연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는 농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강압적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고[7], 이 때문에 관중에서는 백만이 넘는 농민들이 수탈을 피해 도망쳤다. 하북성(河北省)에서도 대량의 농민들이 고향을 이탈해 내몽골이나, 한족에게는 금지(禁地)였던 만주로 도망쳐 정착했다.[8]
엄청난 세금에 들볶인[9] 농민들은 참다못해 농민 봉기로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1796년 폭발한 백련교(白蓮敎)의 난[10]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 1805년까지 약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농민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청나라 정부의 군사적 무능과[11]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戰費)는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문성, 임청 등이 이른바 '천리교(天理敎)'라는 이름을 걸고 다시 폭발했는데, 직예, 하남성, 산동성 등 북방 지역의 64개 현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일시에 위세를 떨친 천리교는 이문성을 천왕으로 임청을 문무성인으로 추대하고 세력확장을 꾀했다. 북경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들은 가경제는 너무 놀라 직예총독 온승혜, 하남순무 고기 등에게 진압을 명했다. 그런데 이 반란 때 천리교도들은 관군이 북경 수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관군으로 위장한 '''고작 70여 명으로 미리 포섭한 환관의 인도를 받으며 자금성을 습격하는''' 흠좀무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미숙한 전략 으로 마침 가경제는 승덕의 피서산장에 있었으므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황궁의 남서방에 있었던 가경제의 둘째아들 민녕과 친왕들이 황급히 금위군을 소집하여 가까스로 반란군을 제압했다.[12] 가경제는 심각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변란을 당하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우변죄기조를 반포했다.
한편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의 치세에는 소수 민족들의 반란도 빈번하였다. 가경 2년 정월 포의족의 왕낭선(1777~1797)이 귀주성 남롱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왕낭선은 19세에 불과한 처녀였으나 무술에 능하고 신통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선녀라는 소문을 퍼뜨려 귀주성에 거주하는 포의족, 묘족, 이족 등 남방 소수민족들의 여신이 되었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불과 몇개월만에 보평, 흥인, 자운, 장순, 직금 등을 점령하고 귀주성의 수도 귀양까지 진격할 정도로 청나라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가경제는 운귀총독 늑보(1739~1819)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결국 청나라 관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한 왕낭선은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으며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을 당했다. 청나라는 왕낭선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청나라가 가진 서남지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미 1726년 ~ 1729년, 1746년 ~ 1749년, 1758년 ~ 1759년, 1781년 ~ 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사천(四川) 일대의 소수 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년 ~ 1797년의 묘족 반란과 1833년의 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의 봉기가 터지기도 했다. 이는 변경 지대에서도 청나라의 통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가경제 시기의 청나라는 점차 기독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이자 황제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는 점에서 청 조정의 입맛에 맞지 않았으며, 교황청이 수천년 동안 이어온 전통인 제사를 우상숭배 취급하며 금지할 것을 요구하며 더더욱 반감이 강해졌다. 청 조정은 대청률례[13]의 '금지사무사술'(禁止師巫邪術)[14] 조항을 기독교에 적용시켰으며, 이후 도광제 시기와 동치제 시기에는 더더욱 탄압이 가중되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한족과 만주족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처형되기도 했으며, 개종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서부의 이슬람 도시들로 보내져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탄압은 서양이 청나라를 건드릴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해주었으며, 특히 서구인들이 청나라를 '야만적'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빌미를 주기도 했다.

3.2. 죽음


가경제는 1820년 9월 2일에 청더의 피서산장에서 승하했다. 청사에는 정확한 가경제의 사인을 적혀놓고 있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황제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비만으로 인한 심장마비가 주된 요인이었다고 여기고 있다.[15] 가경제는 이후 베이징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진 청서릉의 창릉에 묻혔다.
이처럼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 - 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 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 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와 귀족층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가경제가 죽은 후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 등으로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

4. 각종 매체에서


테메레르 시리즈에선 전 세계에 용이 존재하고 특히 중국이 용들의 지위가 가장 좋은 덕에 워낙 청이 킹왕짱한 동네가 되어 국가도 안정된 상태고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중. 물론 백련교도의 반란이나 영국의 아편 무역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긴 하지만, 세계관 상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간 오히려 좆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16] 역사보다 훨씬 행복한 팔자를 타고났다고 할 법하다.
테메레르윌리엄 로렌스를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바람에 로렌스를 형식상 양자로 입양했다. 등장은 2권 밖에 없지만 이후로도 편지로 연락하며 용싱 황자 사후 호주에 상인을 보내고 원주민들과 교류를 맺으면서초반이고 작지만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는등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시간이 지나 영국이 감기 전염병을 이용 영국 외 전세계 용을 전염병으로 학살 하려고 한 일들이 청나라에도 알려지면서 미엔닝 황자를 도아주는 동시에 원한을 품은 리엔이 나폴레옹 편에 붙어서 프랑스를 도아주고 이후 러시아가 프랑스에게 공격당하면 또는 함락당하면 청나라 또한 순망치한 당하는것이 시간 문제 라는것을 알고있던 상황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자 로렌스와 테메레르의 도움도 될겸 러시아를 지원하고자 용 300마리를 러시아로 보내는 등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자 포지션겸 원래 역사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요리왕 비룡 애니판의 황제가 가경제라는 말이 있으나, 연대로 따진다면 광서제가 맞다.

5. 가정 관계



5.1. 아내


효숙예황후 희탑랍씨(孝淑睿皇后 喜塔臘氏)
1760년 출생 ~ 1797년 사망
* 황2자 선종 도광제 면녕(綿寧)
* 황2녀 조졸 1780년~1783년
* 황4녀 고륜장정공주 1784년~1811년
효화예황후 니오후루씨(孝和睿皇后 鈕祜祿氏)
1776년 출생 ~ 1850년 사망
* 황3자 돈각친왕 면개(綿愷) 1795년~1838년
* 황4자 서회친왕 면흔(綿忻) 1805년~1828년
* 황7녀 1793년~1795년
공주 책봉 전 조졸

5.2. 첩


화유황귀비 유가씨(和裕皇貴妃 劉佳氏)
1761년 출생 ~ 1834년 사망
* 황장자 다라목군왕 1779년~1880년
* 황3녀 화석장경공주 1781년~1811년
공순황귀비 니오후루씨(恭順皇貴妃 鈕祜祿氏)
1787년 출생 ~ 1860년 사망
* 황5자 화석혜단친왕 면유(綿愉) 1814년~1865년
* 황8녀 조졸 1805년~1805년
* 황9녀 고륜혜민공주 1811년~1815년
서비 왕기얀씨(恕妃 完顔氏)
? ~ 1795년 사망
화비 후가씨(華妃 侯佳氏)
? ~ 1804년 사망
* 황6녀 조졸 1789년~1790년
장비 왕가씨(莊妃 王佳氏)
? ~ 1811년 사망
신비 유가씨(信妃 劉佳氏)
? ~ 1822년 사망
손빈 심가씨(遜嬪 沈佳氏)
? ~ 1786 사망
* 황5녀 화석혜안공주 1786년~1795년
간빈 관가씨(簡嬪 關佳氏)
? ~ 1780년 사망
* 황장녀 조졸 1780년~1783년
순빈 동가씨(淳嬪 董佳氏)
? ~ 1819년 사망
영빈 양가씨(榮嬪 梁佳氏)
? ~ 1826년 사망
은빈 오아씨(恩嬪 烏雅氏)
? ~ 1846년 사망
안빈 소완과이가씨(安嬪 蘇完瓜爾佳氏)
1785년 출생 ~ 1837년 사망

6. 기타


  • 가경제의 통치기(1795년 ~ 1820년)는 조선의 정조(正祖, 1776년 ~ 1800년), 순조(純祖, 1800년 ~ 1834년)의 재위기와 겹친다.
  • 명나라 가정제와 헷갈리지 말자.
  • 청의 모든 황제 중에서 가장 비중이 낮다. 강건성세로 대표되는 청 초기의 치세와 서세동점으로 대표되는 청 후기의 난세에 아주 절묘하게 끼어있다보니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농가 경제, 서민 가경제 등의 뜬금없는 결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에 나오는 중국 황제가 바로 가경제이다.
  • 크게 부각되진 않는데, 청나라의 악명 높은 문자의 옥을 종식시킨 게 가경제다.

[1] 건륭제 아들들의 돌림자인 영(永)자를 이어받아 초명을 영염(永琰)이라 했고 즉위하지 못한 형제들은 피휘를 위해 돌림자를 동음이자로 개명할 예정이었으나, 형제들의 돌림자를 가차없이 싹 바꿨던 옹정제와 달리 永이 상용 한자인 관계로 가경제는 그냥 본인이 永을 顒으로 고쳤다.[2]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3] 한군팔기 소속의 한족이지만 개국에 협조해서 만주인 대접을 받는다. '~가'가 한군팔기라는 증거.[4] 후에 효의순황후로 추존.[5] 그런데 일부는 건륭제가 하사한 것들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건륭제가 완전히 모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건륭제가 돈이 필요할 때 허션이 때때로 상납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허션이 개인적으로 축재한 재물이었다.[6] 국고와 분리된 황제의 개인 계좌.[7] 특히 건륭제 때 북경의 황제와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지방 관리들에 대한 통제가 소홀해지자 수탈이 더 심해졌다.[8] 사실 허션의 부정부패는 청나라 통치제도에서 발생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청나라의 관직제도는 명나라에서 거의 이어받았는데, 명 태조 주원장은 관료들에 대하여서 굉장히 부정적인 편으로 봉급을 굉장히 짜게 주었다. 이러한 적은 봉급은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적 지출에서 적게 나가게 하는 긍정적인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황제가 제대로 감시하지 않는다면 관리들이 정해진 세금을 넘어서 사적인 이득을 챙길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 특히 급여가 매우 적다보니 관리들로선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사적인 이득을 챙길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에 강희제는 청렴한 관료들을 포상하고 우대함으로 바꾸고자 하였고, 옹정제는 관료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여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러한 업무를 태만시 하면서 문제가 커졌고, 이러한 부패가 모이고 모여서 허션이라는 대표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허션이라는 꽃이 사라졌어도, 그밑에 연결되어 있었던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였기에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였다. [9] 관리들이 착취한것도 있지만 건륭제와 북경의 귀족들이 사치로 강희제, 옹정제 때 쌓아둔 청나라의 부가 전부 탕진된터라 가경제는 이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인상할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세금을 높이고도 바닥이 난 국고는 해결되지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의 재정난이 심각했다. 특히 가경제 때 발생한 몇 차례의 기근은 수백만의 사망자를 냈고 재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10] 이전에는 제림이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진압되었다. 1796년에 폭발한 난의 주동자는 죽은 제림의 '''아내'''인 왕총아.[11] 특히 청나라 군대의 주력인 팔기군이 막장이 된 증거가 이때부터 드러났다.[12] 이 때 태자였던 도광제가 권총을 쏘면서 직접 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13] 청나라의 중앙 법전[14]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당과 술사를 금한다.[15] 어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경제는 상당한 비만이었다.[16] 당장 영국 함대 해군력은 테메레르 세계관에서도 청나라를 압도하지만, '''셀레스티얼이 다 출동하면 몽땅 다 남중국해에 수장해 버릴 수 있다!''' 애초에 6천 마리 이상 되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본토에 보유하고 있는만큼 영국이 시비를 걸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