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한국설화

 

1. 삼국유사의 호랑이 설화
2. 기타 호랑이 설화
3. 조선왕조실록 속 호랑이 기록
3.1. 호랑이를 통한 기우제에 관한 기록
3.2. 호환에 관한 기록


1. 삼국유사의 호랑이 설화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註 253 항상 신(神) 환웅(雄)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기(忌)한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삼국유사-제1 기이 中』

드디어 함께 그 집에 찾아갔는데 사람은 없었다. 아내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서 하루가 다하도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의 호피(虎皮) 한 장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 있는 것을 몰랐다.”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호랑이가 되었고 으르렁거리며 할퀴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고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삼국유사』

김현감호와 비슷하나 아내인 호랑이가 남편을 등지고 다시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린다는 설화이다.

아아 슬프도다. 신도징과 김현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는데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같다. 그러나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어 그런 뒤에 으르렁거리고 할퀴고 달아난 것은 김현의 호랑이와 다르다. 김현의 범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상하게 했으나 좋은 방책을 가르쳐 줘서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 것이 있는데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것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 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자 자신으로 그를 대신했으며, 신이한 방책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니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한 것이다.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진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어서 김현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

아니나 다를까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또한 위의 두 설화를 비교하며 신도징을 동정하고 김현과 맺어졌던 호랑이 처녀에 대해 찬향문을써 논평 했다.

2. 기타 호랑이 설화


'''호축삼재(虎逐三災)·용수오복(龍輸五福)'''

호랑이는 3개의 재앙을 쫒아내고 가져오고 용은 다섯개의 복을 불러온다는 뜻으로 조선후기 대문에 걸거나 붙이는, 이른바 문배(門排: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그린 그림의 의미이다.

호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성골장군이라 자칭하며 백두산 각처를 유랑하다가 개성 부소산 왼쪽 골짜기에 정착하고 이 곳 여인과 혼인하여 가정을 마련하였다. 어느날 9명의 동네사람과 평나산에 사냥을 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속에서 자려 할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온자 물리치려고 굴 밖으로 나갔으나. 이미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별안간 굴이 무너저 굴에 있던 9명은 모두 압사하였다.

집에 돌아가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자,산신이 나타나 "나는 이 산을 지키는 과부인데 그대와 혼인하여 그대를 대왕으로 삼아 신정을 베불겠다"고 말한 뒤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주민들을 그를 대왕으로 모시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호경은 밤마다 꿈에 보이는 사람처럼 본처에게 나타나 동침하니 이어 아들을 낳았다. 이가 강충이며 강충은 서강 영안촌 부자의 딸 구치의와 호인하여 보육을 나았다고 전한다.

『고려사』 첫머리 『편년통록』

구룡산(九龍山) 【현의 남쪽에 있는데, 고려 국조(高麗國祖) 성골 장군 호경 대왕(聖骨將軍虎景大王)의 사당이 있으므로 성거산(聖居山)이라 한다. 혹은 이르기를, "신라 때 도(道)를 깨달은 중 의상(義相)이 살고 있었으므로 산 이름을 ‘성거’라 하였다." 하고, 또 호경(虎景)이 사냥꾼 9사람으로 더불어 이 산에 들어가 짐승을 잡다가, 마침 해가 저물어 바윗굴에 들어가 자는데, 별안간 호랑이가 굴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지르니, 9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 먹으려 하니,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제 운에 맞는 자가 있으리니, 각기 갓을 호랑이 앞에 던져, 호랑이가 무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다." 하고, 모두 〈갓을〉 호랑이 앞에 던졌는데, 호랑이가 마침내 호경의 갓을 물었다. 호경이 곧 나가 호랑이와 싸우려 하는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서, 9사람이 모두 치어죽고, 호경만 혼자 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구룡’이라 하였다."

여기서 호경이란 사람은 왕건의 선조인데,왕건은 자칭 호랑이의 후대로 일컬으며 고려 초기의 왕권을 굳건히 했다. 호랑이가 산신으로 모셔진 흔적또한 알 수 있다.

안효부는 충주의 문벌가의 여인으로 17세에 단장최시에게 시집을 갔다,얼마 후 남편이 죽으니 안씨가 몸소 살림을 하며 눈먼 시아버지를 지극히 공양하였다. 안씨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청병하고 안씨를 불러 개가시키려 하니 거짓 승락하고는 밤에 도주하였다.

안씨가 발이 부르터 못갈 지경에 호랑이가 나타나 안씨를 태우고 집에까지 왔다 며칠 후 동제의 함정에 호랑이가 빠졌다 하기에 안씨가 가보니 바로 그 호랑이이므로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풀어주었다.

시아버지가 죽어 장례를 치르려 하자 호랑이가 와서 묘자리를 점지해 주고 갔다.

그후 양자를 얻었는데 자손이 번성하고 현달하니 단자으이 최씨가 창대하였다.

『동야휘집』

문화에 류모라는 장수가 있었다. 루모는 안악과 신천 사이의 험한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류모가 호랑이 입 속에 쇠비녀가 박힌 것을 알고 뽑아주니 호랑이가 무척 고마워했다.

어느날 류모의 아버지가 죽어 장사를 지내려 하였다,호랑이가 묘자리를 지켜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인도했다,이일이 복이 되어 류모는 후일 승상이 돠었다.

『어우야담』


3. 조선왕조실록 속 호랑이 기록



3.1. 호랑이를 통한 기우제에 관한 기록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지금도 중국에서는 기우할 때에 호랑이 머리를 용이 사는 못에 담그곤 하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옛 글에도 있으니 담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안숭선이 대답하기를, "반드시 예조에 내려 논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52권

호랑이 머리를 한강(漢江)의 양진(楊津)에 넣었다.

세종실록 68권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에서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고, 한강(漢江)에서 침호두(沈虎頭)하면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침호두(沈虎頭)란 호랑이 모양을 만들어 물에 담그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

영조실록 31권

호랑이와 기우제의 관련성을 부여하는 조선왕조의 기록 세종때는 유독 가뭄으로 인해 호랑이 머리를 한강에 던져 기우재를 지냈던 기록이 이밖에도 자주있다.

3.2. 호환에 관한 기록


이때 8도(八道)에 모두 호환(虎患)이 있었는데, 영동 지방이 가장 심하여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자가 40여 인에 이르렀다.

영조실록 40권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의 백성 우창(禹昌)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그의 아들이 호랑이의 두 눈을 찔러 죽였으므로, 우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급복(給復)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31권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을 넘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

인조실록 36권

이 밖에도 호환에 대한 기록은 셀수 없이 많다 호랑이로 인해 해를 입은 백성이 100명을 넘는 다는 등.

호남 태인현(泰仁縣) 사람 이규(李逵)가 갑자기 미친 병을 앓아 스스로 호랑이 귀신(虎鬼)이라고 하며 제 아들을 물어 죽였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호귀,즉 창귀에 관한 조선 왕조 실록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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