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

 


'''조선 세종 이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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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 | 世宗'''

[image]
세종대왕 표준영정 (1976년, 김기창)[1]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세종(世宗)'''
'''시호'''
'''조선'''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장헌(莊憲)
'''출생'''
1397년 5월 15일[2]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3]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즉위'''
1418년 9월 9일 (음력 8월 10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52년 10개월 15일 / 19,311일)
한성부 영응대군저 동별궁
'''능묘'''
영릉(英陵)
'''재위'''
'''조선 왕세자'''
1418년 7월 6일 ~ 9월 9일
(음력 1418년 6월 3일 ~ 8월 10일)
'''조선 국왕'''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31년 6개월 21일 / 11,525일)

'''섭정'''
태상왕 이방원 (1418 ~ 1422)
세자 이향 (1442 ~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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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도(祹)
''''''
원정(元正)
'''아명'''
막동(莫同)
'''군호'''
충녕대군(忠寧大君)
'''전호'''
휘덕전(輝德殿)
'''부모'''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
'''12남 17녀 중 3남'''
큰형 양녕대군, 작은형 효령대군
이복형 경녕군
동복동생 성녕대군
'''왕비'''
소헌왕후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43]

'''세종의 친필 글씨 (열성어필)'''[4]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재위초기
2.3. 본격적인 재위기간
2.4. 생애 후반
8. 어진
9. 사건/사고
11. 여담
11.1. 논란
11.2. 세종에 대한 어록
12. 관련 단체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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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5]
고려시대 왕씨 왕조의 군인으로 지내다가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뒤엎고 왕위에 올랐던 할아버지, 아버지와 다르게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기도 하다. 세종 이도는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났다.[6]
31년의 재위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긴 세종은 당대 조선의 백성 사이에서도 성군으로 불렸음은 물론이며, 한국 역사상으로도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이자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임금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지역의 국경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세종의 치세는 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7]
집권 말기, 강도높은 업무로 인하여 건강이 크게 악화된 세종은 치세 말년인 1442년 7월. 아들이자 세자인 이향(훗날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 된다. 말년의 세종은 악화된 건강의 회복을 위해 온천여행을 다니면서 온천욕을 즐겼으며,[8] 불교의 힘을 빌려 병세를 이겨내고자 사원을 자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병세는 더욱 깊어져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아들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에서 5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2. 생애



2.1. 즉위 전


조선왕조실록에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환산시 5월 15일)에 당시 정안군[9]이었던 이방원과 군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었으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해 사실상 이방원 부부의 3남으로 자랐다.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 번 잡은 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원래 왕자는 종친일 뿐 과거 시험을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 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부르주아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폐세자 양녕대군)가 평소의 망나니와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셋째 왕자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10]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 이방원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태종 이방원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게 실록에 의한 사실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이 외척, 친척, 공신 가리지 않고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싹 다 조져놨으니 그 카리스마에 나댈 수가 있나. 개기는 놈이 없으니 좋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호자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11]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 하는데 충녕대군은 마신다"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못 마셨다. 소주도 겨우 한두 잔 마실까말까 할 정도.[12]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왕자 시절 사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왕자들 간 암암리에 경쟁 의식이 은근히 있었다. 이는 아래와 같은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첫째로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의 남편)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신의왕후 한씨)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13] 또 한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대군의 말이 맞는다며 모두 세자를 욕하는 등 세자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댔다. 한 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론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14] 이때 남재와 충녕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충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케이스라면 "지금 무슨 해괴한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별해야 하는 법입니다!!" 하고 꾸짖어야 했지만, 충녕은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 하고 껄껄 웃을 뿐이었다.[15] 만일 충녕이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사형감, 그렇지 않더라도 의금부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멀리 귀양살이를 할 정도의 일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선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큰형이 망나니스러운 행동으로 점차 신망을 잃어가자 본인도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에 아버지 태종부터가 왕위를 쟁취해낸 사람이니…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점점 세자보다 충녕대군을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16]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또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다섯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이방우, 이후 이방우가 병사한 뒤엔 이방과)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 게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개국 과정에서 마땅한 공이 없으며 나이도 어린 막내아들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17] 이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18]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19], 그래서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길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 입장에서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부왕 태종에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 게 문제. 여기서 세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왕세자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은 '삐뚤어지는 왕세자와 총명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적장자와 꼬투리잡고 음해하는 왕자'로 바뀌어서 오히려 충녕대군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런 와중에 셋째 충녕은 부왕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대왕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세종)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수록되어 있다.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때 활쏘기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요즘 말로 직역하면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
사실 세자(후의 양녕)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했다. 그런데 바로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여기에 어이가 없어진 민무회가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 라고 확 내질러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긴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죄다 윗전(=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세자는 현명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생각이 짧았던 것일까?[20]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17일 병신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와 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21]


2.2. 재위초기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한다. 1418년 8월 10일,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다. 폐세자 직후에는 양녕의 장남,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이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을 세자로 지명한다. 사실 별 다른 이유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였을 가능성도 있다.[22]
태종은 세자 책봉 두 달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곤 했는데,[23]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양위 시에도 신하들은 '이번엔 또 얼마나 선위파동이 오래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의 즉위복 차림을 입히고'''는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물론 군주의 복장은 오직 군주만이 입을 수 있고, 한번 충녕대군이 군주의 복장을 한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선위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바로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어찌보면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이다. 태종은 선위 직후 상왕으로 심온을 영의정 +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1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24], 이조판서 심정,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버려 잽싸게 죽였다.[25] 그리고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한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26]
야사에는 "앞으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은데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심온을 경계했고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 사실 이건 명나라에게도 불경할 수 있는 짓이었다. 명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 온 사람을 처형해 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이렇게 되면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할 가능성[27]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28]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1차,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29]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가족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왕후 본인은 임산부(4남인 임영대군을 임신 중)였다.[30]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은 즉위한지 4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대로 된 왕이 되었다...는 건 아직 이른 말이었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엔 태종의 사람들뿐. 세종 4년 당시, 영의정 유정현[31], 좌의정 이원[32], 우의정 정탁[33],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엔 태종의 사람들만이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질 아니하고 자신들의 맘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리기 시작한다. 이때 상소의 내용 중 하나는 "양녕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 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론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 즉, 양녕의 일은 신하들이 태종한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 할지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야, 이거 내용이 전에 올린 글이랑 똑같잖아. 니들은 상소문을 목판에 찍어서 올리냐? 이건 거꾸로 접었구만."며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을 내보내게 된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 12월 27일 병자.

이러한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진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한 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다. 사정은 이렇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청탁을 하여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이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그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1000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 이때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한 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34]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므로 이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 당시 병조판서였던 조말생으로,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이 뇌물 스캔들의 가장 중심적 인물로 떠오른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세종 4년(1422)으로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다. 이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백 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정도인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하였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35] 자세한 것은 조말생 문서 참고. 또한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세종 9년(1427) 1월에 황희좌의정으로, 맹사성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의 본격적인 성군으로서의 행보가 시작되게 된다.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고려의 정치체계에서 조선의 정치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평한다.

2.3. 본격적인 재위기간


1427년 세종 9년 5월 박연이 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것이다.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을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429년 세종 11년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하였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척희 금지하였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1430년 세종 12년 2월 농사직설을 반포하였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하였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하였다.

2.4. 생애 후반


세종은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어, 1420년 경자자, 1434년 갑인자, 1436년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한 단계 더 발달 시켰다. 1437년에는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부, 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1443년부터는 그 위대한 업적인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는데 힘을 쏟았다. 자세한 내용은 업적 문서 참조.

3. 업적




4. 실책




5. 특이한 기록들




6. 가족


'''총 18남 7녀''' (3명 조졸)
'''소헌왕후'''
영빈 강씨
혜빈 양씨
장녀 정소공주
장남 문종
차녀 정의공주
차남 세조(수양대군)
3남 안평대군
4남 임영대군
5남 광평대군
7남 금성대군
9남 평원대군
15남 영응대군
6남 화의군
11남 한남군
13남 수춘군
16남 영풍군
신빈 김씨
8남 계양군
왕녀(조졸)
10남 의창군
왕녀(조졸)
12남 밀성군
14남 익현군
17남 영해군
18남 담양군
상침 송씨
3녀 정현옹주
사기 차씨
왕녀(조졸)
숙원 이씨
4녀 정안옹주


7. 영릉




8. 어진


[image]
표준영정을 그린 화가 김기창의 얼굴과 세종 어진
1973년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의 어진은 정부 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이며 여러 동상이나 만원권 지폐 같은 다른 곳에서도 대부분 표준영정을 참고해 세종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어진이 소실되었으므로 이 그림은 세종의 진짜 얼굴과는 전혀 관련없는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다. 또한 실제 세종의 인척들 중 초상화가 남아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얼굴이 닮지 않게 그렸고 화가 김기창 본인의 얼굴과 비슷하게 그렸다는 지적과 의혹이 있어 왔다. #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실제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세종의 어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전란을 겪으면서 화를 면한 어진은 이곳저곳에 있었던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의 어진, 그리고 이이첨이 구해낸 세조의 어진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이방원이 상왕이 된 이후 세종이 뚱뚱하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고 한 대목이나 고기를 좋아하는 식습관을 감안하면 비만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 친족들의 인물을 통해 세종의 외모를 상상해본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 큰아버지 익안대군, 고모 경신공주,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조해 보자.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면 수염이 적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효령대군 초상화는 생각보다 숱이 짙은 수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조는 수염이 성글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실전된 장년기의 어진 사진을 보면 역시 제법 짙은 수염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 중 세조는 수염이 매우 적지만, 반대로 문종은 수염이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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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진은 안태성 교수가 그린 세종대왕 어진이다. 과거에 현재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효령대군의 초상화로 복원한 심히 충공깽스러운 어진을 그린 것. 이후 다시 태조 어진과 왕족들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안태성 교수가 다시 복원한 세종대왕 어진을 복원을 하였다. 복원 과정 링크. 다만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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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 김영원 교수는 "표준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는데...
2014년 9월 4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황제손자이석은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녕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하였다. # 다만, 황손 이석 씨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과장과 허황이 있으니 가려 살펴야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문서 참조.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 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터라 묘하게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을 호위하는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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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가 그린 상상 어진
2013년 2월에는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이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으나, # 결국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 자세한 내용은 익선관 #s-3.2 문서 참고.

9. 사건/사고



9.1. 한양 대화재


세종 8년 2월(1426년)에 한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긴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해 중 한성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36]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 문종은 군사 훈련인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맡았는데, 그것도 금성대군[37]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38] 또한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불에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성에 돌아와서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한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39]

10. 현대 매체에서




11. 여담


  • KBS 교양에서 다룬 세종 관련 방송.

  • 태종이 쫓아보낸 양녕대군을 세종이 차마 내칠 수 없어서 궁에 들여보내 줬을 때, 이를 말리는 상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세종이 말하길, "신료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큰 형님과 관련된 상소문은 받지 말도록 하거라. 며칠 전부터 상소문이 계속 올라오는데 어찌 그 내용들이 죄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을 수가 있느냐? 무슨 목판을 만들어서 찍어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어허, 거참. 이 상소문은 거꾸로 접어서 보냈구나."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밖에 없구나. 전날에 올린 것과 다른 게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
>『세종실록』 세종 15년 12월 27일 병자
  • 세종의 뛰어난 업적 때문인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종 재위 시기인 1446년에는 대성산에서 도적떼가 나타나자 이를 진압했다.
  • 한국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 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 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 중이다.
[image]
DDG-991 세종대왕함
  • 세종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상기한 것처럼 세종대왕급 구축함 이외에, 세종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등등… 이름 자체가 갖는 이미지가 엄청나기도 하고 라틴문자로 표기하기에도 적절해서 그런 듯하다.
  • 상당한 고기덕후였다. 수라상에 고기반찬 없으면 안 먹을 정도였다. 또한 태종 이방원이 처음에는 세종이 고기를 많이 먹는걸 막으려고 했지만 세종의 고기사랑을 막을 수 없어서 두손두발 다 든것인지 세종에게 "고기많이 먹어라."라고 할 정도였다. 다만 시대적으로 본래 왕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까지도 육식을 굉장히 중요시했기 때문에 세종만이 특출나게 육식을 편애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업무량이 과했던 세종이기에 식단에 더욱 예민했을 수 있다.
  • 태종이 세종에게 자신이 죽어 상을 치를때 육식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단순히 세종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본래 유교의 장례문화는 매우 가혹하다. 부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르면 무명옷을 입으며 삼시세끼 고기 없는 소식을 하는 것과 더불어 곡을 해야 한다. 이러면 당연히 몸이 축날수 밖에 없다. 때문에 대부분은 수일 정도로 간략화한다. 그러나 효심이 깊은 세종은 정석대로 할 것임을 태종이 직감한 것이다. [40] 때문에 고기를 먹으라며 유언에 가까운 말을 남긴 것은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것 보다 건강하게 국사를 돌보는 것을 중요시하라는 뜻이다. 이는 태종의 예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세종과 똑닮은 손자인 문종이 상을 치르다 요절한 것을 보면...
  • 세종 시대의 학술의 중추에 있던 집현전과 달리 아들 세조 시대의 집현전은 성과가 미진하고 심지어 여러 폐단까지 나오며 운영에 대해 논란이 오가다 결국 폐지된다.
  •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에 대한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세종시대에 백성에 대한 봉건적 착취는 더 심해졌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이런 시각은 일본 혐한들이나 뉴라이트, 이영훈 등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유사하다. ##[41] 이에 대한 반론은 항목 참조

11.1. 논란


  • 세종대왕이 조선족? 도넘는 중국의 한국 빼앗기 위키피디아 중문판에서 일부 혐한 중국 네티즌들이 악의적으로 세종대왕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 국적의 소수민족을 의미하는 조선족이라고 적어두었으나,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않아 한국인들과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친한파 외국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극단적 친중파와 조선족들은 조선왕조 인물들과 한국인들은 원래 조선족이라며 세뇌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을 포함한 5천만 조선인이나 현대 한국인들은 8천여만명의 한민족 혹은 조선민족 일원으로 불려야 하며 조선족은 200만명에 불과하고 조선왕조 인물이나 한국인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게 사실이다. 세종대왕 사진을 대표사진으로 악의적 사용중인 위키피디아 중문판 조선족(朝鲜族)페이지 [42]

11.2. 세종에 대한 어록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12. 관련 단체



13. 관련 문서



[1]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을 만든 김기창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자신의 얼굴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논란이 됐다.[2]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것으로, 이 5월 15일은 스승의 날로 지정되었다.[3] 역대 조선 임금들 중 최초로 한양에서 태어난 임금이다.[4] 가전충효 세수인경, 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지켜라. 본 글씨는 전의 이씨 이정간 공에게 하사한 것이며, 전의 이씨의 대표적 가훈.[5] 동생들인 정선공주성녕대군이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오랜 기간 막내였다.[6] 세종의 즉위년인 1418년은 위화도 회군(1388년)으로부터 꼬박 30년이 지난 시기이기도 하다.[7]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에서 세종대왕은 2위. 충무공 이순신은 1위를 차지하였다. 한국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전근대 한국의 위인인 세종과 이순신은 비슷한 지목도로 존경하는 인물 1, 2위를 차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전근대 인물 이외 근현대사 인물에 있어서는 시대상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백범 김구대한민국박정희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대중의 지목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8] 온양온천을 비롯하여, 청원군 지역의 노천탕을 방문해 60일 간 머물기도 하는 등. 휴양을 위해 온천이 위치한 여러지역을 유람하였다.[9] 정비 소생을 대군, 빈 소생을 군으로 봉하는 제도는 태종 대에 완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왕자의 난 이전엔 군으로, 이후엔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태어났다.[10] 참고로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 가지 망나니 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11]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다.[12] 물론 현대의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소주는 아니고 전통 증류식 소주를 말한다. 전통 소주는 도수가 높은 편이다.[13] 태종 실록 31권, 태종 16년 3월 20일 임자 4번째 기사.[14] 한마디로 너네 아빠처럼 형제제끼고 왕위에 오르는 게 어떻겠냐고 부추긴 것.[15] 출처: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30일 계사 3번째 기사.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태종이 여기서 웃었다는 것은 태종도 내심 셋째를 세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16] 조선에서 적장자로써 왕위에 오른 사례는 세종 본인 까지는 해당이 안되다가, 적장자 이향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적장자 왕이 나오게 된다. 그 이향이 바로 조선 제5대 왕 문종이다. 그후로는 적장손 이홍위 까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조선 제6대 왕 단종.[17] 나이, 경력, 학업성취, 기타 등등 이방과, 방원보다 나은 것 하나 없는 이방석을 올리는 것 부터가 무리수인데, 고려가 망하기 전에는 중앙 정권에 진출하기 위해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권문세족들과 혼인시켜 이용해놓고 조선이 들어서자 하는 말이 "신의왕후 소생들은 하나같이 고려 왕가 혹은 권문세족이랑 엮여 있으니 부적합하다" 이니 그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방석이 청나라 강희제 급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남다르다든지, 신의왕후 소생들이 대통을 잇기에는 능력이 모자란다든지 그런 이유라면 또 모를까... 즉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중앙 정부 진출과 조선 건국을 위한 발판으로 써먹고 왕위는 어리고 능력도 뒷배도 공로도 부족한 신덕왕후의 소생에게 넘겨주는 셈이니 신의왕후의 아들들이나 조정 대신들이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주 이씨 집안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과 손에 피까지 묻힌 신의왕후의 아들들도 무시하고, 조선 건국 이전 죽었지만 엄연헌 정실 부인이었던 죽은 신의왕후도 무시하는 처사다. '''그런데 사실 무시하고 있기는 했다.''' 신의왕후 한씨는 건국 직전 사망해서인지 절비라는 시호만 받고, 왕후로 추존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신덕왕후는 중전에 올라서 왕비릉에 묻혔다.[18]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 뿐,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가 아닌 세자 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19] 참고로 이 점은 세종과도 비슷해서, 세종도 아들인 문종을 좋은 임금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엄청 기울였다. 태종과 다른 점이라면 태종은 실패했고 세종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손자둘째 아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다.[20]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면 외삼촌들을 외면하는 쪽이 맞긴 했다. 태종의 스타일상 뒤치기 안 해도 알아서 족쳐버릴 것이고, 민무회가 한 말은 '''신하가 세자를 핍박한 것'''이라 밝혀도 아쉬울 게 없다(아니, 괜히 가만히 있다가 그 발언이 심문 중에 나오면 '뭐가 켕기길래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는 말을 숨겼냐'는 의심만 또 살 수 있었다). 사태가 잠잠해진 뒤 행동을 잘 했다면 태종이 "어라? 쟤 외삼촌들 때려잡은 게 옳았던 건가?" 라는 판단을 이끌어 세자 자리를 보전할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그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쳤다는 게 함정이지만…나중에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후 정조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그대로 영조의 뒤를 잇는 데 성공했는데, 정조는 형제가 있었으나 자신만이 적자였고, 양녕대군은 유일한 적자는 아니었다는 게 좀 다르다). 양녕대군 입장에선 여기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했다. 태종이 칭병하며 양위 연극을 할 때, 민무구·민무질이 '왕에겐 세자 외에 다른 아들은 필요 없다'고 한 게 '''효령과 충녕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원경왕후마저 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세자라고 답이 있었을까…….[21] 1418년(태종 18년) 6월 17일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너그럽고, 그릇이 크고, 품위가 있으며, 진중하다는 뜻이다.[22]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인 유학적인 장자계승에 따르면 순성군이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 옳았기에 말한 것이며, 이어서 점복으로 하는 것은 과거 한성으로 돌아올 때 명분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天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유학, 특히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하는 조선에서 세자 책봉을 점복으로 한다면 큰 오점이기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녕을 폐세자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태종이 다음 후계를 정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세자 책봉 이후 양위까지 한 것을 보면 충녕대군을 세우고자 하였을 것이다.[23] 선위 파동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신하들은 충성심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4] 단 이 인간은 이미 강상인 사건으로 경상도로 유배 가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병조판서이었기 때문.[25] 심정과 의논한 것이 왜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심정은 심온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세종 즉위년에 심정은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무관이였고, 이관은 이조참판이였다.[26] 나중에 창작된 건지는 몰라도 이전에 세종대왕이 왕자 시절에 튀는 행동을 자주 하자 박은이 "사위 단속 좀 하십시오" 했는데 심온이 무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보면 '''외척에 극도로 민감한''' 태종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27] 현대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의 사이가 매우 밀접한 우방국인 국가의 외교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과의 중요한 외교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귀국한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해당 국가의 권력자가 갑자기 그 외교관에게 심각한 국기 문란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씌워서 본인은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는 중대 사건이 벌어진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대체 무슨 일이냐며 의아하게 여길 것은 당연하다.[28] 홍무제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 참조.[29] 결국 심온은 문종이 사면시켰다. 태종이 죽을 때에 아내인 원경왕후 사망시에 고기 못 먹어 고생하던 아들 세종을 위해서 喪中이라도 '꼭' 고기를 먹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태종의 아들 사랑은 이만큼 각별하다.(양녕에게는 이보다 더한 사랑을 주었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을 '본인'이 뒤집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온갖 병에서 시달리던 세종대왕은 아들 문종에게 양위하려고 하였을 때, 장인의 사면도 생각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30] 게다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문종이 심온을 사면시킨 것도 이 같은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보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31] 태종의 뜻에 따라 충녕을 세자에 책봉토록 건의했던 인물[32]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좌명 4등)[33] 제1차 왕자의 난 공신(정사 2등)[34] 노비 한 명당 말 한 필과 가치가 비슷했다고 본다.[35] 조금 더 말하자면 유배에서도 금방 풀려나지만 사실상의 '''종신근무형'''을 받고 십수차례의 사직서도 전부 불허되면서 일하다가 늙어죽었다.[36]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37] 금성대군은 같은 해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38] 즉위식도 만삭인 채로 치뤘다. 소헌왕후가 애를 많이 낳긴 했다. 실제로 조선 때에도 세종은 제일 명군으로 보았는데, 최고의 왕비 역시 소헌왕후로 보았다.[39] 금화도감(요즘으로 치면 소방서)이 생긴 것도 이 같은 대응의 일환이다.[40] 걸출한 무인이었던 작은형인 정종이 몸이 야위어질 정도인데, 뼈속 깊이 문인인 세종이 3년 상을 치른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41] 이영훈 계열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에 대해 객관적, 학술적인 연구를 추구했으나 가면 갈수록 조선이나 한국인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고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받고 있다.[42] 중국 당국과 중국 네티즌들은 조선족은 조선민족 모두를 이르는 단어라고 우기지만, 이 단어는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이 민족분류를 위해 비교적 최근에 만든 조어이며 명청시기 중국인들이 한민족을 부르거나 한민족이 스스로를 부를 때에는 조선족이 아닌 조선인으로 불렀으니 주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