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어스베르다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9월 25일 작센의 호이어스베르다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는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이후 절망에 빠졌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이 전투 이후 베를린으로의 진군 계획을 취소한다.

2. 배경


1759년 9월 8일, 작센 북부 지역으로 진군하던 오스트리아군은 지나 전투에서 아군의 1/3 정도에 불과한 적에게 패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일단 추가 공세를 중지시킨 후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할 만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9월 22일 고를리츠로 향해 둔덕에 올라 적진을 살펴본 후 고를리츠 북동쪽인 루사티아에 위치한 프로이센 공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의 군대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다음날인 9월 23일 아침 적을 공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인리히 왕자는 진작부터 적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9월 22일 저녁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떠났다. 그는 적이 눈치채지 않도록 진영의 불을 일부러 켜놓고 동전을 달아둔 허수아비들을 세워뒀다. 그후 그는 50시간 동안 진군한 끝에 호이어스베르다에 도착했다. 한편 다운 백작은 9월 23일 아침에 예정된 공세를 개시했으나 적의 진영이 텅 비어있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정찰병들이 적의 물자가 북동쪽의 글로가우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오자, 그는 프로이센군이 함정을 파놓은 게 아닐지를 의심하여 바우젠으로 퇴각했다. 이후 그는 하인리히 왕자를 추적하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왕자는 적이 허둥지둥하는 틈을 타 호이어스베르다에 주둔한 베홀라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뵈홀라 장군
  • 병력: 보병 2,500명, 후사르 960명.

4. 전투 경과


9월 25일 아침, 렌툴루스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전위대가 호이어스베르다 숲에서 출격했다. 갑자기 쏟아져 오는 적을 본 뵈홀라 장군은 급히 포병대를 편성해 반격하려 했지만 사전에 설치된 적 포병대가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순식간에 적을 에워싸 맹공격을 가했고, 결국 뵈홀라 장군의 3천 분견대는 순식간에 궤멸되었다. 그 후 하인리히 왕자는 전장을 수습하고 정보를 수집한 뒤 9월 28일 서쪽으로 진군하여 루흐랜드로 갔다.

5.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600명이 전사하고 뵈홀라 장군을 비롯한 28명의 장교와 병사 178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도 극히 적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이후 절망에 빠져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친동생이 이렇듯 기막힌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듣자 용기를 얻고 작센으로 진군했다. 반면 다운 백작은 호이어스베르다 전투 이후 더이상 작전을 진행하는 건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겨울 월경지로 철수했다. 이로서 프로이센은 쿠네르스도르프에서의 참패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협공당해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