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묵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사묵은 1924년 8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현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인 1930년 3월 한문서당에 들어가 약 6개월간 천자문을 배웠고, 1932년 4월 팔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이후 경성공립직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해 1940년 3월에 졸업하고, 그해 4월 15일 경성부청 공영부 영선과(營繕課) 고원(雇員)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이등공조난기(伊藤公遭難記)>를 읽고 안중근의 하얼빈에서의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글 소설을 탐독하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또한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정책에 심한 반감을 갖고 1943년 3월부터 7월까지 서울에서 동료들에게 일본인과의 차별, 한국어 폐지, 한국인에 대한 징병제도 실시 등을 성토하였다.
또한 자신의 일기장에 “일본놈들은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에게는 그 의견조차 말하지 않는데, 놈들의 본성이다.”(1943년 3월 29일), “어제 조선신궁에서 우리들 조선인 동포들에 대한 압박정치의 폭로인 징병제도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마음 속 깊이 쌓인 조국 애착심을 여하히 버리고 그들의 부하로 타락해가야 하나”(1943년 5월 20일) 등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총독정치 및 대동아전쟁에 대해 일본의 패전을 기대하는 불온언동을 하고 군사에 관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2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육·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법 위반, 보안령 위반, 안녕질서에 대한 건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53년 9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홍사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토홍계 26세 '''사(思)''' 수(秀)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