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황후 상관씨

 





孝昭皇后 上官氏
전한 소제(昭帝)의 황후로 무제 치세의 중후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곽광의 외손녀이자 상관걸의 친손녀이다. 아버지는 상관안.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곽씨 일족과 상관씨 일족 모두 무제 때부터 중요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무제 붕어 직전에 유조를 통해 보정대신이 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두 집안은 결혼을 통한 결연으로 친분이 공고하여, 곽광이 휴목일로 등청하지 않을 때면 상관걸이 부재중인 곽광 대신 정무를 처리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관안이 자신의 딸을 소제의 정궁으로 세우고자 하니, 그 장인인 곽광은 상관안의 저의를 의심하여 소제의 나이가 아직 어림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상관안은 당시 어린 소제를 직접 양육한 황제의 이복 누나 악읍공주[1]와 그녀와 사통하고 있던 정외인(丁外人) 등과 결탁하여 결국 자신의 딸을 소제의 배필로 맞게 하였다.
이후 상관걸과 상관안은 국구임을 내세워 사돈인 곽광조차 묵과하기 힘든 방약무인한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소제의 형임에도 곽광의 반대로 인해 제위에 오르지 못했던 연왕(燕王) 유단(劉旦) 등과 결탁하여 곽광을 모함하기까지 하였다. 다만 소제의 영민함에 의해 이러한 모함이 무고였음이 밝혀지자, 상관걸 부자는 곽광을 죽이고 연왕까지 유인하여 살해한 뒤에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려는 모반을 꾀하였다가 곽광에 의해 모두 자살, 멸족되었다.
비록 친가인 상관씨가 모반에 연루되어 멸족되었으나 효소황후가 아직 연소하고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했기때문에 계속하여 황후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소제가 붕어하니 효소황후의 나이는 14살이었고, 황태후가 되어 창읍왕 유하(劉賀)를 즉위시켰다가 곽광의 뜻에 따라 조서를 내려 폐위시키고 다시 선제(宣帝)를 즉위시키니 태황태후가 되었다.[2] 효소황후는 6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47년 동안 재위하다가 건소(建昭) 2년에 54세의 나이로 붕하였고, 평릉(平陵)에 합장되었다. 그야말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친가가 멸족되고,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황태후가 되었으며, 이후 30년 동안 전한 황실의 최장자(最長者)로서 자기의 손으로 1명의 황제를 폐위하고 2명의 황제를 세웠으며, 외가까지 멸족하는 상황을 보아야 했던 기구했던 생을 보냈던 황후였다.

[1] 악읍개장공주(鄂邑蓋長公主), 개장공주로도 불린다.[2] 창읍왕은 폐위되었으니 태황태후를 칭하는 것이 예에 맞지 않지만, 소제가 선제의 작은 할아버지인 것 등의 이유로 이렇게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