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clearfix]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니 동북쪽이라,
한(漢)의 장군들 집을 떠나 적을 쳐부수구나.
남아란 본래 거리낌 없는 행동을 귀히 여기는 법,
천자는 특별히 기쁜 표정 보이시네.
징을 치고 북을 치며 유관(楡關)으로 내려가니
군대의 깃발[旌旆], 구불구불 갈석산(碣石間)에 가득하구나.
교위(校尉)의 급한 서신, 사막으로 날아들고,
전쟁을 알리는 선우의 사냥 불, 낭산을 밝히네.
변방의 끝, 쓸쓸하고,
오랑캐 사나운 말은 언덕에 의지하여 비바람과 섞였구나.
최전방의 전사들 반이나 죽었건만,
미인은 휘장 안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네.
고적(高適 707-765) ─ 연가행(燕歌行)[5]
1. 개요
전한은 고제[6]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 건국한 제국으로서 진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제국이다. 무제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말기에는 외척들의 힘이 강해지다가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여 소멸했다. 이후 광무제가 후한으로 한 제국을 재건할 때까지 15년간 맥이 끊어졌다.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 시대를 광무제 이후의 후한과 구분하여 전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본토와 우리나라 중문학계, 철학계 등에서는 서한(西漢)이라고 부르는 데 '''(후한의 수도인 낙양의) 서쪽에 위치한 장안이 도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에 장안보다 동쪽에 있는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후한은 동한(東漢)이라고도 부른다.[7]
3. 역사
3.1. 초한 쟁패기
전한의 시작은 패국의 시골 하급 관리이자 건달이었던 유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방은 집에서는 일도 안 하고 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기에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지만, 시골 관리인 정장(亭長)이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에 진나라의 공사에 참가해야 될 인부들을 이송하는 도중에 도망간 인부들이 너무 많자, 후에 돌아올 책임에 따른 책망이 두려워 아예 산적으로 돌아서버렸다가 패국의 관리/장정들과 합세하여 반란군을 형성했다.
그러던 중 유방은 한참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항량의 군과 합류하였고, 항량이 장한에게 죽은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으로 진격하였다. 항우가 진나라 주력군을 거록에서 깨부수고 장함과 맞붙다가 그의 항복을 받아내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함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곧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향해서 달려왔고, 도저히 대적할 전력이 아닌 유방은 홍문연에서 장량과 번쾌, 무엇보다 항백의 도움으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변경인 촉 땅으로 유배나 다름없는 먼길을 떠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신이라는 명장을 얻게 되었고, 항우가 제나라에 온 신경을 쏟아부은 사이에 촉 땅을 나와 여러 제후들을 물리치거나 병합시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였다.
항우는 여러 차례 유방을 물리쳤지만,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하여 결정타를 주지 못했고, 그 사이에 유방이 북으로 파견한 한신은 조나라와 제나라를 물리쳐 세력의 역전의 기회를 가져왔고, 항우의 우방이었던 영포도 유방의 치밀한 계획 끝에 편을 바꿔 유방의 세력으로 합류, 항우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없으면서 전쟁에선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자결함으로써 초한대전은 사실상 끝을 고하였다.
싸움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유방의 운과 그의 밑의 재사들을 드는 경우가 많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대인 항우와 달리 유방은 실수한게 거의 없다. 촉 땅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곧바로 팽월에게 장군의 인을 주어 아군으로 끌어들였으며- 팽월의 유격전으로 인한 항우의 보급 곤란은 항우 최대의 패배 원인 중 하나였다. 대패를 당한 후에도 재빠르게 군사를 수습하는 데 성공했고, 한신에게 별동대를 주어 한쪽 방면의 전투를 맡긴 일도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이는 장량의 조언이었다. 한신이 중국 동북부를 쓸어버리는 동안 유방 자신도 빈집 털리는 상황에 광폭적으로 변한 희대의 명장 항우와 그의 대군을 상대로 1년여 동안 쏟아지는 집중공격을 묵묵히 이겨내며 탱커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때 생사의 기로에 서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항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던 아버지가 눈 앞에서 솥에 내걸리거나 항우의 화살에 맞은 후 군의 사기를 위해 아픔을 참고 허세로 일관하는 등 수많은 고생을 했으므로 세간의 말처럼 결코 거저 먹진 않았다. 영포를 포섭한 것도 주효했다.
또한 민심과 치세의 관리에 대해서 역시 실수한 점이 없다. 유방은 관중을 얻었지만 함양의 귀중한 보석과 궁전과 창고를 모두 봉하여 피해를 입지 않게 하고 조용히 성을 나와 성 밖에 진을 치게 하여 약탈과 방화, 살인을 두려워하던 진의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자 파상까지 퇴각한 후 각 현의 노인들을 불러모아 말한다. "그대들은 진나라의 잔학한 법률에 지금까지 고통받아왔다. 나는 오늘부로 모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한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히거나 도둑질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것이다. 오직 세 가지 법으로만 처리할 것이다." 이에 모든 진의 관리가 집을 나와 전처럼 일했으며 사람들의 입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패공이 진의 왕이 되지 못하면 어찌하는가 하며 걱정하였다. 항우가 함양을 싸그리 불태우고 모든 지역의 약탈을 허용하며 진왕 자영을 잔살한 후에 사방에서 떠도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곧 패공이 관동으로 돌아오면 우리 백성들이 눈물을 씻고 호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반해 항우는 쓸데없는 대학살로써 민중의 저항만 거세지게 하여 민심을 잃었고, 범증 등 부하들을 쓸데없을 정도로 의심했으며, 자신의 삼군 중 우군은 전혀 관리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항우의 패배를 두고 본인이 모자라서 싸움에서 진 것을 어찌 하늘 탓을 하느냐고 평하였다.
초한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군현제의 확립에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항우는 이미 자신이 봉건제를 선호하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증명한 적이 있으며, 본래 항우 본인도 초나라의 귀족 계급이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는 유명한 사기의 말과 같이 평민 출신으로서 새로운 정치인이었고, 봉건제 대신 군국제를 선택하여 향후 중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3.2. 군국제 확립
항우(項羽)는 장한을 격파하고 황제 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나라와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별장(別將)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등 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항우에 의해 한중왕이 된 유방은 항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항우와 격돌하다 팽성대전에서 패배해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장량과 역이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때 역이기는 멸망한 6국의 후예에게 봉토를 내려 공격하자며 봉건제를 주장하여 유방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량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봉건제도를 쓰는것을 포기하였다.
마침내 항우를 패배시킨 유방은 이제 한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하여야 했다. 봉건제를 쓸 마음이 없었던 유방이지만 자신을 따라 싸운 공신들을 푸대접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일단은 7명을 왕으로 봉하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삼아 1개 현(縣)을 단위로 한 봉읍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와 후국(侯國)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본받아 다스렸다. 이리하여 봉건제와 군현제가 섞인 통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국제였다.
3.2.1. 유방의 공신 숙청
토사구팽(...).
여러 공신들이 상을 받은 한나라 초기에는 군국(郡國)이 103곳이나 존재했다. 이들은 한나라 땅의 3분의 2나 되는 막대한 영토를 조정으로부터 공의 댓가로 받았다. 이로 인하여 조정이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땅은 고작 15개 군에 지나지 않았다[8] . 황실에 당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유씨가 아닌 왕들이었다. 유방과 혈연 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고, 한때 초나라의 왕이었던 한신은 반란을 꾸미기도 했다. 유방은 슬슬 기반이 잡혔다고 판단이 되자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신은 전부터 탄압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죽은 것은 진희와 손 잡고 반란을 꾸몄기 때문이며 역이기를 죽였을 때부터 이미 찍혀있었고, 경포와 장도 역시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망했다. 노관은 장도 대신에 연왕 자리까지 주었지만 역시 반란을 꾸미다 도망쳤다. 심지어 장오는 부하 관고 등이 유방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지만, 관고 등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인을 배신하자 않자 감동한 유방이 장오를 선평후로 강등시키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은 팽월 뿐.
토사구팽은 아니지만, 항우의 편을 들던 임강왕 공환이 유방의 회유를 거부하고 기어이 덤비다가 노관, 유가, 근흡의 공격에 풍비박산났다. 대패한 후에야 항복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라서 그대로 압송된 후 사형당했다.
기원전 201년, 연왕 장도가 간이 부었는지 천하통일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했다. 기원전 196년 유방은 양나라 왕인 팽월을 죽여 젓갈로 만들었다. 같은 해에 유방이 진희의 반란으로 출정한 사이 왕 자리에서 끌어내려진 채 지내고 있던 한신이 반란죄라는 명목으로 여후와 소하에 의해 살해된다. 겁을 먹은 영포는 이듬해에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죽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유방 역시 영포의 군대에게 부상을 당해 죽었지만, 장사문왕 오예(吳芮)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을 모조리 유씨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오예는 봉지가 먼 변방이었고 본인도 처신을 잘 했던 데다가, 아들 오신 또한 매부인 영포가 반란했다가 도주해오자 오히려 직접 잡아다 바치는 등 다른 생각이 없음을 잘 어필하여 살아남았다.
또한 각 봉국의 재상과 고급 관료를 제후가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여 파견함으로써 제후들의 손발을 잘랐다. 실로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유방은 기꺼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생각된다면 모조리 찾아내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아직도 봉건제의 이상에 취해있거나 한에 겉으로만 따르던 불순한 제후와 재상 그리고 신하들은 더 이상 이러한 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밀 수 있는 역량 자체를 상실해버렸고 이러한 잔혹한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중국은 마침내 진정한 첫 통일을 이루었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유방은 중국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였고 진나라 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군사만 있으면 스스로 장군이니 왕이니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숙청은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제후왕을 축출하는 것에는 의외로 제장들도 제법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들 또한 기왕이면 천하에 한나라만 남겨지길 원했을 것이다.[9] 물론 별 생각 없었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지만. 이 별 생각 없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3.3. 여후의 시대
3.3.1. 여씨들의 천하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유방은 제후왕들을 유씨로 바꾸었으나 유방 사후 정권을 차지한 여후가 조정의 모든 정권을 여씨의 손아귀에 주어버린 것이다.
생전의 유방은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방이 경계한 여후와는 별개로 태자인 유영-혜제 본인에겐 딱히 결격사유가 없었다. 전란에 지친 나라 입장에서도, 그리고 숙청 걱정을 덜고싶은 공신들 입장에서도 다정한 성격의 혜제는 오히려 이상적이면 이상적이었지 끌어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유방이나 혜제가 건재하다면 여후라도 어쩌겠느냐는 생각도 했을 법 하다. 두 사람이 연달아 요절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당연히 곧바로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이 당시엔 집에서 요양중이던 장량 또한 여후의 손을 들어주어 여후는 당대의 은둔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와 유방 앞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불러도 [10]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희와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도 꽤 심한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해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여후는 유방 사후 잠시나마 조고가 한 것처럼 유방의 죽음을 숨긴 뒤 황명을 사칭해 공신들을 싹 제거하는 것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취해볼까 하는 속셈을 품기도 했지만, 조고보다는 현명했기 때문에 우연히 이 상황을 눈치챈 역상이 그러다가 내전이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 있느냐고 말한 것을 받아들여서 정상적으로 유방의 장례를 치르고 공신들은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내내 거슬렸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 궁녀를 가두는 감옥)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세 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계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혜제(2대 황제,위에 나온 유약한 태자 유영)의 혼신을 다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귓속에 유황을 부어넣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에 던져 똥을 먹여 죽이고 말았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 꼬라지를 자기 아들인 황제 혜제에게도 보여줬다. 아들이 척부인과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쎄빠지게 노력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1] 이 광경을 보고 만 혜제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드러누웠다.
1년 후 몸을 추스린 혜제는 그래도 어머니이니 애써 이해하려고 했으나, 혜제가 여후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여후가 다름아닌 짐주로 또 서형 유비를 독살하려 하자 독주를 대신 마시려 하는 자살소동을 벌인 후 완전히 정사에서 손을 놓아버린다. 장안에 간간히 성을 쌓거나, 여후의 측근인 심이기를 죽이려고 하는 등의[12] 활동 외에 완전히 칩거에 들어간 혜제는 이후 이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이지만 이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中'''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었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대부분 여록과 여산과 같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맡겼다. 이 탓에 유공이 성장하면 보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 유공을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3.3.2. 유씨와 공신들의 반격
그러나 여후는 장안 바깥에서 군사를 움켜쥐고 진짜로 힘을 가지고 있는 지방 제후왕들에 대해선 실질적인 제제를 가하지 못한 채로 어중간한 내정간섭만을 하고 있었다. 유방 시절부터 이어진 초한전쟁의 후유증으로 이 당시 장안 조정은 매우 허약했는데[13] 여후가 유방처럼 없는 군사로라도 제후들을 찍어누를 군사적 소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문제처럼 획기적으로 국력을 증진시킨 것도 아니니 권좌를 장악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제후들 모두와 원수가 진 상태로 피폐해진 지역에 고립된 상황에 불과하기도 했던 것이다. 고후기 5년부터 시작된 남월왕 조타와의 분쟁에서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면서 이런 실체가 만천하에 밝혀졌고 고후기 8년에 이르러서는 유장이 연회자리에서 대놓고 여씨를 멸족시키겠다는 노래를 부른 뒤 화가 난 여씨 일족중 하나가 일어나서 따지자 '''여후의 눈앞에서 베어죽이고''' 보란듯이 여후에게 죄인을 처형했다 보고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여후는 감히 유장에게 따지지도 못했다.[14]
그 후 여후는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개에 물리는 환상을 본 후에 병을 앓다가 죽었다. 죽으며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나 기타 추종세력이 달려들 테니 조심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뒤를 이어야 하는 이들이 모두 무능력했다. 이 기회에 제위를 취하고자 한 제나라의 유양과 유장이 봉기했고, 주발, 진평 등 유방 직속 공신들이 모두 여기에 동참하면서 여씨들은 남김없이 멸족당했다.
여록의 사위였으나 여후의 말년부터 이미 반항의 조짐을 보였던 주허후 유장은 자신의 형을 움직여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를 진압하라고 파견된 관영은 오히려 몰래 다른 제후들까지 끌여들여서 연합군을 조직해 여씨들을 일거에 제거하기로 한다. 또한 궁궐의 주발과 진평은 역상을 인질로 잡고 여록과 친했던 역상의 아들 역기를 협박하여 친구를 속이고 군권을 빼앗게 했고,[15] 앞서 언급된 유장은 한술 더떠서 그냥 '''곧바로 여산을 기습하여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때려죽였다.''' 이렇게 군사를 잃고 무력화된 여씨를 눈치볼 것 없어진 공신들이 남김없이 살해했는데, 이때 같은 개국공신 번쾌의 아내인 여동생 여수도 죽고 말았다. 같이 사로잡힌 여록을 포함해 다른 여씨들은 참수당하는 와중에 여수는 몽둥이로 구타당해서 죽었다거나, 혹은 대나무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매질을 당했다는 등 언급이 유독 따로 빠져 있는데 진평이 여수의 억하심정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서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때 주발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16]
다만 새 황제를 추대하는 과정에서 일이 복잡해졌는데, 공이 제일 큰 것은 제나라 왕 유양이였지만 유양이 거병 과정에서 유택을 속여서 군사를 빼앗은 일 때문에 원한이 생긴 유택이 황제 선발 과정에서 유양은 외가가 포악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반대하고 나선 것. 과정상 외가는 겉치레이고 유양의 성격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 다음은 회남왕 유장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이쪽도 더 심하면 심했던지라 제외되면서 유방의 넷째 아들, 혜제의 이복동생인 대나라 왕 유항이 군주로 추대되었는데, 이 인물이 한문제였다. 유항 본인조차 예상못한 일이었다보니 당초엔 무슨 함정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그 토사구팽 숙청 속에서도 유방이 손도 안대었던 최후의 공신들은, 결국 유방이 죽은 후까지도 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3.4. 내부 정비 시간
3.4.1. 문경지치
이제 한나라는 긴 안정기로 들어가게 된다. 춘추전국시대와 진의 통일, 초한 대쟁패를 겪은 중국은 분명 대격변을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긴 했으나, 너무나 오랜 시간 이어진 전란으로 매우 피폐해졌다. 그래서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국시로 삼았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17]
한나라의 번영은 문제 없이 설명되기 힘들 정도로 문제의 공은 크다. 철저할 정도로 검소하게 지내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였으며,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힘을 키웠다. 흉노를 대할 때는 약간 저자세로 나가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했다. 문제와 경제는 개국공신이었던 진평과 주발 이후 이른바 문경지치라 불리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통일된 중국의 생산력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그동안은 정상적으로 나라가 조용하게 굴러간 적이 없기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문제 시기를 기점으로 전한은 절정기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한 예로 한나라 정부는 조조의 건의를 반영하여 말 사육을 위해 총 36개에 달하는 대형 말목장을 제국 북부와 서부 경계 일대에 건설했다. 태복(太僕)은 목사(牧師) 6명을 임명했고, 각 관리인에겐 3명씩 승(丞)이 따라붙어 해당 목장들을 관리하였다. 랑(郞)이 원령(苑令, 총책임자)으로 임명되어 각 관리인들을 총괄했다. 총 3만에 달하는 남여 공노비들이 목장들로 파견되어 말 보육을 책임졌다. 목장의 말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 30만 마리까지 증가했고, 이 수십 만필 중 가장 우수한 말들이 군사훈련을 위해 선발되었다. 각지의 지방정부와 번국들에도 말 사육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면, 군마의 총 숫자는 45만 마리를 넘어섰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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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오초7국의 난과 중앙 집권의 확립
3.5. 한무성세: 무제의 치세
한무제 참조. 과거에는 한무성세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했던 편이지만, 현재는 한무성세의 어둠이 많이 조명돼서 요즘은 '치세'라고만 부르는 편이다. 무제시기엔 상업적 그리고 산업적 발전에 힘입어, 한 제국은 급격히 성장했다. 인구가 많은 도시로는 특히 기원전 192년부터 기원전 189년까지 혜제 시절에 지은 제도 장안, 산둥성의 임치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업(오늘날 허난성 안양), 성도(쓰촨성 청두), 한단(허베이성 한단), 낙양(허난성 뤼양), 노(허난성 남쪽 취푸)가 있었다.
이 일곱 도시들이 한의 주요 상공업 중심지였고, 제국 서부, 중앙, 북동, 동부, 남서의 핵심 경제지역들에 위치했다. 해당 지역들은 철, 금, 구리, 직물, 칠기, 농산품 같은 지역 특산품을 분배하는 배송지로서 역할도 담당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한 제국의 경제-사업적 세계의 중추신경과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군현들은 정치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장기 전쟁의 보조를 위한 군대동원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 제국이 막 창건되었을 무렵, 중국의 인구는 과거 진 왕조 시절의 고작 20-30%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급격한 인구성장과 규모 확대는, 한무제의 시대가 오기 60여 년 전부터 한제국의 인구가 놀랄 만큼 불어났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기간에 걸쳐, 한 초기 군주들이 인구성장을 늘리기 위해 특단적이면서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음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200년 반포한 조칙을 통해, 한 가정에 신생아 하나가 탄생할 경우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혜제 시절 정부는 더욱 극단적인 정책까지 펼쳤는데, 만약 여성이 중국식 나이로 30살(29세)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을 경우, 여성 쪽 가족 전체에게 무려 5배나 높은 세금을 매겼다.
경제적 호황과 공격적 인구 정책이 맞물리면서, 한 제국의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히 증가하였다. 여러 원사료들 및 후대의 언급을 종합하면, 한 제국의 인구는 기원전 150년 이전에 4-5천만 범위에 이르렀다. 무제의 치세 초기에는 5천만대 범위까지 인구가 증가했는데, 한나라 초기와 비교하면 거의 다섯 배 가깝게 늘어난 셈이다.[19]
4. 역대 황제
-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한나라 황제의 호칭은 시호에서 '효(孝)'와 '황(皇)'을 빼면 된다. 예컨대 효무황제 = 무제, 효경황제 = 경제
5. 계보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6. 추존 황제
-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皇)'으로 시호가 끝난다.
[1] 군국103개, 현1578개, 1223만 3062호. 혹은 57,671,400명. 특히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전한 멸망 직전인 서기 2년에 조사된 전한의 전체 인구를 계산해보면 실제 인구가 5900만이 아닌 5700만으로 나타난다.#, #[2] 5700만 혹은 5900만이라는 수치는 한나라 조정이 인구조사를 통해 파악한 수치로 후대의 추산과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시 한나라의 행정력이 엄청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3] 기원전 202년부터 칭제.[4] 한무제 때 최초로 유교를 관학으로 지정하였다.[5] 당나라의 변새시(邊塞詩)는 주로 한나라를 모델로 자주 삼았다.[6] 한 고조(高祖), 정식 묘호는 한태조.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이고, 사마천이 처음 유방을 고조라고 표현하자 모두들 사마천을 따라 유방을 고조라고 부르게 되었다.[7] 서구권에선 서한, 동한에 더욱 익숙하다.[8] 다만 직할령 15군은 어떤 제후국보다도 많은 것이라서, 다른 제후국의 반란을 1:1로 찍어누를 수 있는 힘은 갖추었다.[9] 조타가 남월왕으로 정식으로 인정될 때 사자로 파견된 육가는 '다른 사람들은 다 당신네를 멸족시키자고 하는데 황제만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신과 영포가 반란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도 공신들은 빨리 파묻어 죽이자면서 호전적으로 주장했다.[10] 진짜로 이게 이유였다고 한다. 유방은 입만 열면 욕을 하고 선비를 막 대해서 섬겨봤자 고생할 것 같아서 도망다녔고 태자는 효자에 성격이 착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왔다고.(...)[11]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혜제는 이복동생인 여의를 살리기 위해 그가 조나라에서 소환에 응할 때도 성문 밖으로 직접 마중을 나와서 데리고 오고 항상 곁에 있으며 숙식을 함께 했다. 그러다 혜제가 어느날 아침 사냥을 가게 되자 '잠깐 동안은 괜찮겠지' 하고 나간 동안 여후는 여의에게 독주를 마시게 해서 죽였다.[12] 유별나게 총애를 받은 심이기가 여후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13] 혜제 시절 장안의 인구가 제나라 수도인 임치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14] 기록에서는 유장의 행동이 법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그럴리가 없고, 유장의 뒤에 있는 제나라 왕 유양이 두려워서 이랬을 것이다.[15] 여록이 바로 속지 않자 황명 사칭도 저질렀다.[16] 좌단(左袒)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17] 시무 등의 장수가 여후때부터 엇나간 남월에 대한 정복을 주장하긴 했다. 지방 제후들이 스스로 무기와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이유로 문제가 반대했기 때문에 무산되었지만.[18] 창춘수(2007), 『중국 제국의 발흥 권2: 한 제국 내의 국경, 이주 그리고 제국, 130 B.C. – A.D. 157.』 University of Michigan Press-[19] 창춘수(2007), 『중국 제국의 발흥 권2: 한 제국 내의 국경, 이주 그리고 제국, 130 B.C. – A.D. 157.』 University of Michigan Press-에서 가져옴.[20] 사기나 한서에는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다.[21] 사실 선제가 올린 시호는 도황고(悼皇考)다. 그런데 황고란 말은 황제의 죽은 아버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전한과 후한의 추존 황제들의 시호가 '황(皇)'으로 끝난다는 걸 생각해보면 추존 황제로서는 '도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