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 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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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野富子 (1440년 ~ 1496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부인이자 일본 희대의 악녀. '''일본에서는 부정축재와 사채의 대명사.'''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 대대로 혼인관계가 있는 히노 가문[1] 의 딸로 아들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 투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쇼군 후계자 문제는 오닌의 난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11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다. 1473년 요시히사가 9대 쇼군으로 취임하고 나서는 막부 정치에도 개입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전란의 와중에도 돈벌이에 몰두하여 비난을 샀다.
히노 도미코는 1440년 히노 시게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도미코의 오빠는 가쓰미쓰이고 후일 도미코와 함께 막부에서 권세를 휘둘렀다. 도미코는 1455년에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이 되어 인생에서 최초의 라이벌과 만나게 된다. 도미코가 시집갔을 때 요시마사는 이미 몇 명의 측실을 거느리고 이들로부터 태어난 딸도 있었는데, 가장 총애를 받고 있던 측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당연히 정실 도미코의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원래 요시마사의 유모였다. 1443년 요시마사가 8살에 쇼군이 되자 이미마이리노쓰보네는 요시마사의 신임을 배경으로 막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권세는 요시마사의 생모인 히노 시게코를 능가하였으며, 막부의 인사 문제에까지 관여하여 원성을 살 정도였다.
정실이 된 지 4년 뒤인 1459년 도미코와 요시마사 사이에 첫 아이를 출산했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아이의 죽음이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되면서, 도미코는 이를 빌미로 시게코와 아이의 죽음을 이마마이리쓰보네의 탓으로 요시마사에게 호소하였다. 그 결과 무녀 2명이 잡혀와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요청을 받았다고 자백했기 때문에 요시마사도 이를 믿고 이마마이리노쓰보네를 비와코 오키시마에 유배시켰다. 유배지로 호송 중에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절에 들어가 자살하였다. 이로써 도미코는 인생 최초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도미코와 요시마사 사이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태어났지만 쇼군을 이을 남자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1464년 요시마사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있던 이복동생 요시미를 환속시킨 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 도미코는 요시미의 환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자신의 여동생을 요시미의 정실로 들이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이듬해 도미코에게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났다. 요시마사의 후계자 자리를 약속받고 환속했던 요시미와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도미코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요시마사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요시미는 막부의 유력 간레이(쇼군의 정무를 보좌하던 막부 내의 최고 직책) 가문 출신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도미코는 막부의 실권을 놓고 가쓰모토와 대립하는 야마나 소젠(모치토요)에게 요시히사의 후견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해 막부는 요시미 파와 요시히사 파로 분열되었다.
막부 쇼군 가문이 요시미와 요시히사를 둘러싼 후계자 문제로 나뉘어 있을 때, 간레이 가문인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에서도 같은 시기 가독 계승 문제가 일어났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모치쿠니에게 가독을 물려받은 요시나리에 반대하는 가신들이 모여서 일족의 마사나가를 옹립하였다. 한편 시바 가문에서도 가독 요시타케가 후사없이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토시와 규슈 단다이(규슈 지방의 장관) 시부카와 가문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카도가 가독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쇼군 후계자 문제로 대립하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모치토요)이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도 개입하면서 양자의 대립은 결국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여 1467년 5월에 전면적인 전투 상태로 들어갔다. 약 11년간에 걸친 ‘오닌의 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무사 사회에서는 단독 상속이 정착되었고, 적자가 서자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독 자리를 놓고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슈고 다이묘(슈고의 직책을 토대로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는 영주) 가문의 가독 계승이 부친의 의사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쇼군의 의향이나 가신단의 지지도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상속을 둘러싼 분쟁은 더욱 복잡했다.
오닌의 난이 시작되자 슈고 다이묘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졌다. 호소카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 등 24개국 16만 명이 가담하였고, 야마나 가문이 이끄는 서군에는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시바 요시카도 등 20개국 11만 명이 가담하였다. 도미코는 남편 요시마사와 아들 요시히사와 함께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전투 초반은 쇼군 가문을 점거하고 요시마사, 요시히사, 요시미를 확보한 동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8월에 오우치 마사히로가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대군을 이끌고 서군에 합류하자 전세가 일변하였다. 1468년 원래 동군 측에 가담하고 있던 요시미가 서군에 합세한 후, 서군에서는 요시미를 쇼군으로 세워서 막부로서의 진용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막부가 동쪽과 서쪽, 두 군데에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전황은 고착상태로 빠지고 주요한 전장이었던 교토는 전란으로 황폐해지고 전투는 지방으로까지 번졌다.
요시미가 서군으로 나간 후 1473년 요시히사는 8살의 나이에 제9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도미코는 정치에 소홀한 남편 요시마사를 대신하여 어린 요시히사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양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모치토요)과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연이어 사망하자 양군 사이에서는 화해의 기운이 높아졌다.
1475년 도미코와 사이가 나빠진 요시마사가 쇼군 저택을 뛰쳐나가자 막부의 정치는 도미코와 도미코의 오빠인 히노 가쓰미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가쓰모토와 소젠(모치토요)이 이미 죽고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 사이에는 화해가 성립되어 있었지만,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난의 종결에 반발하여 교토에 계속 진을 치고 있었다. 1477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드디어 자신의 영유 국으로 물러나자 양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하고 11년간 이어진 난은 종식되었다.
오닌의 난 종식에는 히노 도미코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를 위하여 안정된 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오닌의 난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켜야 했다. 당시 완강하게 화해를 반대하고 있던 양군의 주요 세력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였다. 도미코는 이들에게 각각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그들의 영유 국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다.
오닌의 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도미코는 동군, 서군 구별 없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뿐 아니라 서군의 장수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난을 끝내기 위하여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일천 관문이라는 거금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교토에서 철수시켰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재력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정을 움직여서 종사위하, 좌경대부의 관위를 내리게 하고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슈고 직을 맡겨서 귀국시켰다
아들 요시히사를 쇼군에 취임시키고 오닌의 난을 종결시켰지만 요시마사는 도미코와 소원해져 히가시야마 산장에 은거하였고, 도미코와 아들 요시히사의 모자관계 역시 벌어졌다. 1489년 요시히사는 오미 국의 롯카쿠 다카요리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하던 중 병으로 쓰러졌다.
도미코는 오미 국의 막부군 진영에 달려가서 몸소 간병했지만 요시히사는 죽고 말았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요시히사에게는 자식이 없고 요시마사에게도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도미코는 오닌의 난후 미노에 은둔하고 있던 요시미와 자신의 여동생 묘온인의 아들인 요시키를 다음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요시키를 옹립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도미코는 요시마사와 함께 요시키의 쇼군 취임을 강하게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그러나 요시키가 쇼군이 된 후 요시미가 쇼군의 부친으로 권세를 누리게 되자 도미코와 대립하였다. 1490년 요시마사의 사망 후 도미코와 요시미 · 요시키 부자와의 대립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듬해 요시미가 타계하고 요시키가 정치를 직접 행하게 되자, 도미코와 요시키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1493년 도미코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결탁하여 요시키가 가와치에서 거병한 하타케야마 요시토요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한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도미코와 마사모토는 요시마사의 동생인 호리고에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아들 요시즈미를 다음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도미코의 쿠데타를 크게 비난하고 요시즈미의 쇼군 임명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도미코 측은 과거에 궁궐의 보수공사에 거액을 지원한 사실 등을 들어 천황을 설득하였으며, 결국 이듬해 요시즈미는 정식으로 쇼군에 취임했다. 도미코는 요시즈미의 후견인으로서 과거 요시히사의 양육을 담당했던 이세 사다무네와 그 아들 사다미치를 임명하고 만년에도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였다. 이후 1496년 57세에 숨을 거두었다. [출처]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미코는 돈에 집착한 마녀처럼 묘사되어 있고, 후세에도 ‘악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는 도미코가 무로마치 막부 쇼군 후계자 문제와 관계하여 막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오닌의 난의 단서를 제공한 사실과 전란으로 피폐한 상황에 개인의 돈벌이에 열을 올린 사실에 기인한다. 원래 도미코가 막부 정치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아들 요시히사의 쇼군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요시히사의 후견인으로 도미코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요시마사도 승인하였는데, 도미코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은 도미코를 대신하여 정치적 문제를 처리하던 오빠 히노 가쓰미쓰가 죽은 후였다.
도미코는 개인의 돈벌이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교토의 출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세금을 징수하였고, 쌀 투기, 고리대금 등에 자금을 활용하여 거액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당시의 기록서인 다이조인사사잡사기에는 천하의 화폐가 모두 도미코에게 몰려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남편 요시마사는 정치에 무기력할 뿐 아니라 낭비벽이 심했다. 때문에 파산한 막부와 조정을 금전적으로 지탱한 것이 도미코였다. 특히 천황 가문에 대해서는 재정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히노 도미코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인이 되었다.
日野富子 (1440년 ~ 1496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부인이자 일본 희대의 악녀. '''일본에서는 부정축재와 사채의 대명사.'''
1. 개요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 대대로 혼인관계가 있는 히노 가문[1] 의 딸로 아들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 투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쇼군 후계자 문제는 오닌의 난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11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다. 1473년 요시히사가 9대 쇼군으로 취임하고 나서는 막부 정치에도 개입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전란의 와중에도 돈벌이에 몰두하여 비난을 샀다.
2. 생애
히노 도미코는 1440년 히노 시게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도미코의 오빠는 가쓰미쓰이고 후일 도미코와 함께 막부에서 권세를 휘둘렀다. 도미코는 1455년에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이 되어 인생에서 최초의 라이벌과 만나게 된다. 도미코가 시집갔을 때 요시마사는 이미 몇 명의 측실을 거느리고 이들로부터 태어난 딸도 있었는데, 가장 총애를 받고 있던 측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당연히 정실 도미코의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원래 요시마사의 유모였다. 1443년 요시마사가 8살에 쇼군이 되자 이미마이리노쓰보네는 요시마사의 신임을 배경으로 막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권세는 요시마사의 생모인 히노 시게코를 능가하였으며, 막부의 인사 문제에까지 관여하여 원성을 살 정도였다.
정실이 된 지 4년 뒤인 1459년 도미코와 요시마사 사이에 첫 아이를 출산했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아이의 죽음이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되면서, 도미코는 이를 빌미로 시게코와 아이의 죽음을 이마마이리쓰보네의 탓으로 요시마사에게 호소하였다. 그 결과 무녀 2명이 잡혀와 이마마이리노쓰보네의 요청을 받았다고 자백했기 때문에 요시마사도 이를 믿고 이마마이리노쓰보네를 비와코 오키시마에 유배시켰다. 유배지로 호송 중에 이마마이리노쓰보네는 절에 들어가 자살하였다. 이로써 도미코는 인생 최초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도미코와 요시마사 사이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태어났지만 쇼군을 이을 남자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1464년 요시마사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있던 이복동생 요시미를 환속시킨 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 도미코는 요시미의 환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자신의 여동생을 요시미의 정실로 들이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이듬해 도미코에게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났다. 요시마사의 후계자 자리를 약속받고 환속했던 요시미와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도미코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요시마사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요시미는 막부의 유력 간레이(쇼군의 정무를 보좌하던 막부 내의 최고 직책) 가문 출신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도미코는 막부의 실권을 놓고 가쓰모토와 대립하는 야마나 소젠(모치토요)에게 요시히사의 후견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해 막부는 요시미 파와 요시히사 파로 분열되었다.
막부 쇼군 가문이 요시미와 요시히사를 둘러싼 후계자 문제로 나뉘어 있을 때, 간레이 가문인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에서도 같은 시기 가독 계승 문제가 일어났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모치쿠니에게 가독을 물려받은 요시나리에 반대하는 가신들이 모여서 일족의 마사나가를 옹립하였다. 한편 시바 가문에서도 가독 요시타케가 후사없이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토시와 규슈 단다이(규슈 지방의 장관) 시부카와 가문 일족에서 영입한 요시카도가 가독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쇼군 후계자 문제로 대립하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모치토요)이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도 개입하면서 양자의 대립은 결국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여 1467년 5월에 전면적인 전투 상태로 들어갔다. 약 11년간에 걸친 ‘오닌의 난’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무사 사회에서는 단독 상속이 정착되었고, 적자가 서자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독 자리를 놓고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슈고 다이묘(슈고의 직책을 토대로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는 영주) 가문의 가독 계승이 부친의 의사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쇼군의 의향이나 가신단의 지지도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상속을 둘러싼 분쟁은 더욱 복잡했다.
오닌의 난이 시작되자 슈고 다이묘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졌다. 호소카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 등 24개국 16만 명이 가담하였고, 야마나 가문이 이끄는 서군에는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시바 요시카도 등 20개국 11만 명이 가담하였다. 도미코는 남편 요시마사와 아들 요시히사와 함께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전투 초반은 쇼군 가문을 점거하고 요시마사, 요시히사, 요시미를 확보한 동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8월에 오우치 마사히로가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대군을 이끌고 서군에 합류하자 전세가 일변하였다. 1468년 원래 동군 측에 가담하고 있던 요시미가 서군에 합세한 후, 서군에서는 요시미를 쇼군으로 세워서 막부로서의 진용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막부가 동쪽과 서쪽, 두 군데에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전황은 고착상태로 빠지고 주요한 전장이었던 교토는 전란으로 황폐해지고 전투는 지방으로까지 번졌다.
요시미가 서군으로 나간 후 1473년 요시히사는 8살의 나이에 제9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도미코는 정치에 소홀한 남편 요시마사를 대신하여 어린 요시히사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양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모치토요)과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연이어 사망하자 양군 사이에서는 화해의 기운이 높아졌다.
1475년 도미코와 사이가 나빠진 요시마사가 쇼군 저택을 뛰쳐나가자 막부의 정치는 도미코와 도미코의 오빠인 히노 가쓰미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가쓰모토와 소젠(모치토요)이 이미 죽고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 사이에는 화해가 성립되어 있었지만,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난의 종결에 반발하여 교토에 계속 진을 치고 있었다. 1477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가 드디어 자신의 영유 국으로 물러나자 양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하고 11년간 이어진 난은 종식되었다.
오닌의 난 종식에는 히노 도미코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를 위하여 안정된 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오닌의 난을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켜야 했다. 당시 완강하게 화해를 반대하고 있던 양군의 주요 세력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였다. 도미코는 이들에게 각각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그들의 영유 국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다.
오닌의 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도미코는 동군, 서군 구별 없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뿐 아니라 서군의 장수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난을 끝내기 위하여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일천 관문이라는 거금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교토에서 철수시켰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재력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정을 움직여서 종사위하, 좌경대부의 관위를 내리게 하고 스오 · 나가토 · 부젠 · 지쿠젠 4개국의 슈고 직을 맡겨서 귀국시켰다
아들 요시히사를 쇼군에 취임시키고 오닌의 난을 종결시켰지만 요시마사는 도미코와 소원해져 히가시야마 산장에 은거하였고, 도미코와 아들 요시히사의 모자관계 역시 벌어졌다. 1489년 요시히사는 오미 국의 롯카쿠 다카요리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하던 중 병으로 쓰러졌다.
도미코는 오미 국의 막부군 진영에 달려가서 몸소 간병했지만 요시히사는 죽고 말았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요시히사에게는 자식이 없고 요시마사에게도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도미코는 오닌의 난후 미노에 은둔하고 있던 요시미와 자신의 여동생 묘온인의 아들인 요시키를 다음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요시키를 옹립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도미코는 요시마사와 함께 요시키의 쇼군 취임을 강하게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그러나 요시키가 쇼군이 된 후 요시미가 쇼군의 부친으로 권세를 누리게 되자 도미코와 대립하였다. 1490년 요시마사의 사망 후 도미코와 요시미 · 요시키 부자와의 대립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듬해 요시미가 타계하고 요시키가 정치를 직접 행하게 되자, 도미코와 요시키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1493년 도미코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결탁하여 요시키가 가와치에서 거병한 하타케야마 요시토요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한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도미코와 마사모토는 요시마사의 동생인 호리고에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아들 요시즈미를 다음 쇼군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도미코의 쿠데타를 크게 비난하고 요시즈미의 쇼군 임명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도미코 측은 과거에 궁궐의 보수공사에 거액을 지원한 사실 등을 들어 천황을 설득하였으며, 결국 이듬해 요시즈미는 정식으로 쇼군에 취임했다. 도미코는 요시즈미의 후견인으로서 과거 요시히사의 양육을 담당했던 이세 사다무네와 그 아들 사다미치를 임명하고 만년에도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였다. 이후 1496년 57세에 숨을 거두었다. [출처]
3. 평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미코는 돈에 집착한 마녀처럼 묘사되어 있고, 후세에도 ‘악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는 도미코가 무로마치 막부 쇼군 후계자 문제와 관계하여 막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오닌의 난의 단서를 제공한 사실과 전란으로 피폐한 상황에 개인의 돈벌이에 열을 올린 사실에 기인한다. 원래 도미코가 막부 정치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아들 요시히사의 쇼군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요시히사의 후견인으로 도미코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요시마사도 승인하였는데, 도미코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은 도미코를 대신하여 정치적 문제를 처리하던 오빠 히노 가쓰미쓰가 죽은 후였다.
도미코는 개인의 돈벌이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교토의 출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세금을 징수하였고, 쌀 투기, 고리대금 등에 자금을 활용하여 거액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당시의 기록서인 다이조인사사잡사기에는 천하의 화폐가 모두 도미코에게 몰려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남편 요시마사는 정치에 무기력할 뿐 아니라 낭비벽이 심했다. 때문에 파산한 막부와 조정을 금전적으로 지탱한 것이 도미코였다. 특히 천황 가문에 대해서는 재정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히노 도미코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