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야 방화 사건

 

1. 개요
2. 상세
3. 후폭풍

궐기 집회 모습
사건 당시 전소한 시설

1. 개요


일본어: '''日比谷焼打事件'''
러일전쟁 종전 이후인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방화를 위시로 일어난 폭동.

2. 상세


이는 러일전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러일전쟁 자체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나[1]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러시아는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전쟁 당시 일본 측도 상당한 손해를 봤던 터라[2], 일본 안에서는 배상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에서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집회가 열렸다.[3] 뭐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집회 도중 흥분한 민중들이 폭도로 돌변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이었던 고쿠민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다.[4] 러시아와 관계가 깊었던 일본 정교회가 소유했던 니콜라이 성당도 군중들의 방화 표적이 되었으나 근위병 등이 호위하여 화를 피했다.
정부의 반응은 신속했다.[5] 다음 날인 9월 6일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른 행정 계엄 형태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소동을 진압한 후, 11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 명 이상이 검거되고 검거자 중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편 도쿄대학 '7인의 교수회' 같은 국수주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30억 엔을 배상하고 연해주 및 캄차카 반도까지 모두 일본에 내놓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러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일본 국민들을 선동하였다.[6] 하지만 이는 당시 일본의 전황을 안다면 터무니없는 소리였는데, 우선 러시아 쪽에서 일본 정부의 대표단에게 "우리는 국내 사정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 결코 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본한테는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줄 수 없다!"라고 고압적으로 나왔고, 앞서 설명한 대로 일본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은 데다가 더는 전쟁을 할 국력이 못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한테 배상금을 달라고 강력히 요구를 할 수가 없었다.[7]
아울러 미국이 개입한 포츠머스 회담으로 인해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여긴 일본인들은 미국 대사관과 미국 교회들을 습격하여 돌을 던지거나 불을 지르며 미국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테러를 저질렀다. 마침 일본을 방문했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는 일본인들의 폭동에 놀라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폭동은 실시간으로 미국 언론에 의해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졌는데, 당연히 부정적인 시각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교회를 불태우는 일본인들의 행동은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이 항상 내세우던 문명과 인도주의는 거짓이었으며, 그들은 야만인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회담의 중재로 평화를 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폭력으로 응답했다. 앞으로 수년 동안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빠질 것이다.

미국 언론들이 전하는 일본인들의 폭동 소식을 들은 미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과 일본인들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 증거로 1906년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국 서해안에서는 미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확산되어,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 이주민들은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인 모욕과 폭언을 겪어야 했다. 이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이 인종차별을 일삼는 오만하고 잔인한 자들이라고 여겨 분개했다.[8]
이 와중에 일본 국민신문의 주필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러일전쟁으로 우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잠재력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라고 글을 발표하자, 분노한 일본인들은 국민신문사를 습격했고, 도쿠토미 소호는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부상을 입었다.[9] 다만 그렇다고 도쿠토미 소호가 무슨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일본의 국수주의와 침략적 제국주의를 열렬히 찬양했던 극우 논객이었다. 극우 지식인조차 폭력에 휘둘렸을 만큼, 러일전쟁 무렵의 일본 사회가 얼마나 제국주의에 미쳐 날뛰며 제정신이 아니었는지가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3. 후폭풍


일본 민심은 상당히 격양되었다. 9월 7일에는 고베에서, 9월 12일에는 요코하마에서 비슷한 이유로 폭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폭동 수습 후에도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이 그치지 않았고, 결국 1906년 1월 가쓰라 타로 내각은 총사퇴를 하기에 이른다. 후임으로는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그 뒤를 이었다.[10]
히비야 방화 사건 이후, 일본 사회에는 '정치인들은 무능하여 파벌 싸움이나 벌이고, 재벌들은 부패했으니, 깨끗하고 유능한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군국주의를 선망하는 여론이 점차 커졌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엽으로 접어들자, 일본에서는 쿠데타가 2번 발생했고, 모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을 동정하는 국민 여론이 커지면서 군부가 정부를 지배하고 멋대로 폭주하는 군국주의 사회가 시작되었다.

[1] 러시아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및 조차지 요동 반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을 확인하는 등.[2] 사상자는 일본 쪽이 러시아보다 더 많았으며, 특히 봉천 전투가 끝나자 일본 육군 수뇌부는 일본 정부에 물자가 모자라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전문을 보냈고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국채를 더는 사주지 않자 일본 정부도 전쟁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서 러시아와 강화 회담을 서둘러 할 만큼, 일본의 국내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3] 러일전쟁 이전, 일본이 청나라와 싸운 청일전쟁에서 얻어낸 배상금은 2억 냥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5년 치 수입액이었다. 이때의 달콤한 기억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러일전쟁에서 배상금 한 푼도 받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4] 특히 목조건물로 만들어진 곳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불 타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 시궁창 구덩이에 던져지는 수난을 당했다.[5] 히비야공원은 '''고쿄 바로 옆'''이며, 히비야공원에서 긴자까지도 도보로 10분도 안 걸린다.[6] 출처: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이창위 저/ 궁리출판.[7] 그러나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일본 측의 막대한 사상자나 물자 부족 및 전비 고갈 같은 어려운 속사정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고,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연전연승을 거둔 것처럼 과장해서 보도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우리 군인들이 피를 흘려 얻은 성과를 무능한 정치인들이 제대로 협상을 못해서 몽땅 망쳤다!"라고 생각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8] 출처: 일본제국 흥망사/ 이창위 저/ 궁리출판.[9] 출처: 일본제국 흥망사/ 이창위 저/ 궁리출판[10] 이후 7년 동안 사이온지와 가쓰라가 총리 자리를 바꿔가며 국민들을 지겹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