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color=#000>러일전쟁
명칭
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
날짜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장소
대한제국, 청나라 만주 남부, 동해, 사할린 섬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포츠머스 조약 체결
<color=#000>교전국
[image] 러시아 제국
[image] 몬테네그로 공국[1]
[image] 일본 제국
<color=#000>지휘관
[image] 니콜라이 2세
[image]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팟킨
[image] 스테판 마카로프
[image]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image] 메이지 덴노
[image] 오야마 이와오
[image] 도고 헤이하치로
[image] 노기 마레스케
<color=#000>병력
약 50만 명
약 30만 명
<color=#000>피해 규모
전사, 부상치사: 34,000 ~ 52,623명
질병사: 9,300 ~ 18,830
부상자: 146,032
포로: 74,369
사중 손실: 50,688
전사: 47,152 ~ 47,400
부상치사: 11,424 ~ 11,500
질병치사: 21,800 ~ 27,200
<color=#000>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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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풍자화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제물포 해전
3.2. 압록강 전투
3.3. 진저우-남산 싸움
3.4. 히타치마루 사건
3.5. 모티엔 전투
3.6. 텔리수 전투
3.7. 대석교 전투
3.8. 시무청 전투
3.10. 203고지 전투
3.11. 황해 해전
3.12. 울산 해전
3.13. 코르사코프 해전
3.14. 랴오양 회전
3.15. 사하 전투
3.16. 산데푸 전투
4. 전쟁의 여파
4.2. 러시아
4.3. 일본
4.4. 한국
4.4.1. 한국인의 교전 참여
4.5.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
4.6. 러시아가 이겼다면?
5. 여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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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2]

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

도고 헤이하치로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만주, 대한제국과 인근 해역 각지에서 벌인 전쟁. 일본에서는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일노전쟁; 니치로 센소)라고 부른다.
전쟁 이전까지는 서구 열강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가 대활약한 이후로, 러시아는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열강 중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미국과 함께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로 국제사회에서 손꼽히고 있었고 이런 열강이 아시아 비백인 국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인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 러시아가 보급과 이동에 문제를 겪었던 점, 일본도 생각보다 더욱 제대로 국력을 키웠던 점, 그리고 러시아 국내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등 악재가 계속되어 모두의 기대를 제대로 저버리고 러시아가 패배하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쟁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10년 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이자, 10년 전 청나라와의 전쟁 이후 연속으로 승전을 거두게 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식민지배의 기반을 마련하고 사할린을 획득하는 등 큰 이익을 보았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근대 유럽 강대국에 대한 비유럽 국가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미도 있다. 1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이탈리아 왕국에 승리한 전례는 있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반적인 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3] 그리고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열강 중 약체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비록 영국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러시아 내부의 사정도 큰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비유럽 국가 자신의 군대에 의한 주류 유럽 강대국에 대한 첫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일본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잠깐이나마 동조하는 착각을 한 경우도 많았다.

2. 배경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했어야 했는데 그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하였다.[4] 러시아가 애타게 원하던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독일 제국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한반도만주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이익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애시당초 러시아에게 일본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약소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해서 만한교환론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1937년의 중일전쟁으로 나타난다.
특히 1896년 2월 고종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한 러시아는 일본을 꾸준히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5]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6],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7]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심지어 아관파천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몰렸다. 심지어 이때 일본은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여기서 고종은 줄타기하면서 적당히 러시아 세력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문제는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다롄을 조차 받아 이곳을 포트 아르투르로 칭하며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한다.[8] 이후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발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9]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경계로 북만주를 빼앗으려 하고 더 나아가 만주 전체를 노리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10]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없기 때문에[11]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러시아 제국은 15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시켰으며, 일본 및 다른 열강들은 철수를 요구하면서,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조선에서 사태 진전이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12]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13],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제국군은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당장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 한반도까지 병력을 진출시킬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먼저 일본이 공격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 했다는 거지만.

3. 경과


[image]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만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14]을 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지원이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 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대한제국에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고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15]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훗날 미국은...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그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점령하였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로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갔고 결국 최후의 보루인 발트함대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트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16]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3.1.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9일에 대한제국 제물포와 주변해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러일전쟁의 최초의 전투이며 인천 해전, 또는 인천전투라고도 한다. 여순항 해전과 함께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첫 전투이며 모두 기습적인 공격으로 가해진것이 특징.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제물포, 여순항에 이르기까지 제 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킴으로써 군사적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인 우류 소토키치는 여순항을 공격하려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명령을 받아 6척의 순양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기로 한다. 특히 일본의 방호순양함 지요다는 10개월 동안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어 같이 주둔한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바략과 포함 코리에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투직전인 1904년 2월 7일에 일본 연합함대의 대규모 무력 군단을 본 러시아의 포함인 코리에츠는 여순항에 지원 요청을 보냈고, 2월 8일 이른 아침 코리에츠함이 일본의 순양함 지요다구를 발견하고 포를 쐈으나 지요다구는 어뢰로 대응해 양측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결국 코리에츠는 항구에서 퇴각했고 지요다구는 우류 제독의 소대와 접선했고 영국의 HMS 탈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의 군함 빅스버그 등 정박한 중립 국가 항구에서는 일본군에게 항의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아 피신했다.
우류 제독은 경순양함 지요다, 다카치호, 아사마, 나니와, 니이타카, 아카시와 어뢰정 4척을 이끌고 3000명의 군사들을 제물포에 상륙시켰으며 일본 군대는 제물포로부터 이동하여 서울을, 그리고 대한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바략함에 올라타 사관생도인 알렉세이 니로드를 포함한 승조원들을 학살하였으며 남은 함대는 대포와 어뢰정으로 두 전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바략함과 코리에츠함의 승조원들은 나포당할 것을 우려해 두 전함을 자침시켰다. [17]
그리고 같은날 2월 9일에 일본 함대는 제물포 항구에 5만명의 병력을 상륙시켰고 선제 공격을 하여 군사적으로 승리한 일본군은 한반도를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3일후인 2월 12일에 러시아 공사가 철수함에 따라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침몰한 러시아의 함정은 뒤에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일본군 함정으로 개조되었다.


3.2. 압록강 전투


1904년 4월 30일부터 5월 1일에 일어난 전투로 압록강, 신의주 주변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투이다. 일본 육군이 첫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쪽 으로 가는 도중에 이를 저지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던 러시아 육군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며 압록강 도하 작전이라고도 부른다.
러시아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일본군 병사보다 우수한 것으로 과신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한 러시아군의 자스리치 장군에 대해 일본 육군은 충분한 화포를 갖고 공격하여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또 러시아 육군이 전군을 이용한 결전을 피하고 조속히 퇴각했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도강을 별손해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3.3. 진저우-남산 싸움


1904년 5월 25일~5월 26일에 랴오둥 반도, 뤼순 북방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랴오둥 반도·진저우 성 남쪽 근교의 남산으로 불리는 곳에서 1904년에 열린 러시아 육군으로 부터 일본 육해군. 러시아 군은 기관총등을 장비하면서 남산은 어느 정도 요새화되어 중반 참호전, 공성전이 됐다. 일본 육군 제2군는 적에게 수배나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 병력의 10%를 넘는 병력을 잃었다.
압록강 전투 이후 두 군은 요동 반도에 군대를 진행했다. 러시아 육군은 요동 반도의 중심이 되고 있는 남산에 야포 114문으로 기관총을 장착, 참호와 철조망 지뢰를 갖춘 근대적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 육군이 이런 근대적인 진지에 공격을 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중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한 요새의 구조는 이미 파악했다.
네 번째 사단의 공격이 진저우 성에 대해서 시작됐지만 실패로 끝난다. 제1사단에서 증원 2개 대대를 가한 세 번째 공격으로 진저우 공략이 완료됐다. 그 뒤 남산에 대해서 공격이 가해졌고 진저우 만에서 해군의 함포 사격이 공격을 지원했지만 엄청난 손해를 받았다. 그러나 끈질긴 일본의 공격에 의한 포탄이 다한 러시아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두 번째 군은 남산을 점령하고 일단 승리를 거뒀다.
두 나라의 군은 그 후 탄약 보급을 받고 만주로 향했다. 철수한 러시아군은 약간의 저항을 하면서도 뤼순으로 철수하고 배수의 진으로 일본군 제3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또한 제 3군단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도 두 군에 소속했던 장남 카츠노리를 이 싸움에서 잃고 말았다.

3.4. 히타치마루 사건


1904년 6월 15일에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서쪽으로 가던 육군 징용 운송선박 3척이 러시아 제국 해군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 (이하, 블라디보스톡 함대) 소속의 3척의 장갑순양함 로시야, 류리크와 그루모보이에 의해 잇따라 공격을 당하면서 항복 거부 등의 이유로 격침되어 파괴된 사건이다.
특히 육군 징용 운송선박 히타치마루 (常陸丸)의 격침은 일본 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연합함대 특히 동해의 해상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끌던 제2함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제2함대는 사건 발발 두 달 후인 8월 14일에 일어난 울산 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사실상 괴멸직전까지 몰고갔다.
6월 15일 8시경 방호순양함 쓰시마로부터 오키노 섬 근해에서 블라디 함대를 발견했다고 보고를 받은 제2함대는 어뢰정 부대를 급파하는 동시에 왕래 선박에게 다케시키 등지로 대피를 명령했다. 블라디보스톡 함대는 일본 측의 움직임에 상관없이 쓰시마 해협에 도달하여 먼저 수송선 이즈미마루를 발견했다. 이즈미마루는 6월 13일에 요동 반도의 얀다이오를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톡 함대는 이즈미마루를 정선시켜 승선자에게 퇴거를 권고하고 퇴거를 확인한 후 포격을 가해 격침시켰다. 이즈미마루에 대해 일본은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고 4명이 사망하고 해산시켰던 승선자의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톡 함대에 수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사에서 육군 병사 2명, 해군 병사 1명의 편승자 3명을 포함한 112명 중 전사자 7명, 쿠라야 이헤 해군 상등병을 포함한 83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22명이 생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전당시 블라디보스톡 함대와 마주친 것은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로 보인다. 함대는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다가 곧 실탄 발사로 전환하였으며 히타치마루는 전속력으로 후방 도주를 하다가 포탄 한발이 히타치마루의 기관부에 명중된 것을 시작으로 근접 사격을 통해 약 100발의 사격을 받아 전사자가 속출했고 기관은 파열되고 곧이어 제3 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히타치마루 선내는 피바다가 되었고 남아있던 제1연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반격을 했지만 압도적인 공격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치열한 전투끝에 군기를 받들고 있었던 후지사키 히토 육군 이등병이 살아남아 과정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명령했지만 직후에 그도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후 할복했다. 군기는 오쿠보 다다시(大久保正) 소위가 깃대를 부러뜨리고 불을 질러 소각했다.
연대 깃발과 중요 서류 소각을 지켜보며 남아있던 장교들도 할복, 권총 자살과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며 히타치마루에서 순직했다. 히타치마루는 세번째 일제사격을 받고 15시쯤에 침몰했다. 이날 히타치마루의 전사자는 육군 958명, 해군 3명, 승무원 130명 총 1,091명에 이르렀으며 남아있던 생존자 중에서 무사히 탈출한 후지사키 히토 이등병을 포함한 37명은 어용선 토사마루 (일본우선, 5,402톤)에 구조되어 무쓰레 섬에 상륙했다. 생존자는 예비근위 보병 제1연대 본부 96명, 제10사단 취사병 32명, 해군 관계자 1명, 각종 승무원 18명 등 총 147명이었다.

3.5. 모티엔 전투


1904년 6월 27일에 만주에서 표도르 켈러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육군과 구로키 다메모토가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의 소규모 군대가 전략적 요충지인 모티엔 고개에서 벌인 충돌적인 전투로 만주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모티엔 고지에서 일어났다.
표도르 켈러 백작은 압록강 전투 이후 러시아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2만 5000명을 이끌고 단둥과 랴오둥 반도 사이의 주요 도로들이 교차하는 모티엔 고개에 주둔시켰다. 당시 러시아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과 미하일 스코벨레프의 친구였던 켈러는 텔리수 전투에서 이미 많은 병력은 손실한 탓에 쿠로팟킨으로부터 2개 연대를 지원받아 방어선을 강화했다.
한편 보급품을 보충받은 구로키 다메모토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6월 19일~6월 25일까지 랴오닝성에서 진격이 중지되었다. 이에 6월 26일 켈러는 쿠로파트킨으로부터 다른 연대 병력들을 더 빼내 당일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티엔 고개에서 3개 러시아군 보병 연대과 3개의 포병 진지를 구축하고 서쪽에서 여단 규모의 병력과 예비 보병 연대가 주둔했다.
이에 일본군은 6월 25일 ~ 6월 26일 밤에 러시아군의 우측면 뒤쪽으로 돌아갔으나 러시아의 맥심기관총과 포병들에 의해 들켜 러시아군의 좌측면에서 우왕좌왕했다. 전투는 6월 27일 5시 15분 일본군이 정면을 공격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7시까지 강력한 대포 사격으로 어느 정도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8시에는 일본군의 측면 공격에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밤 10시까지 서둘러 시무청(析木城)으로 후퇴했다.
6월 30일 일본군은 모티엔 고개를 함락시켰고 이 전투의 지휘관인 표도르 켈러는 일본군 포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어 결국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7월 13일 모티엔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으며 양측의 사상자는 비교적 적었지만 유능하다고 알려진 표토르 켈러 장군이 왜 전략적이고 방어하기 쉬운 진지를 그렇게 형편없는 저항으로 포기를 했는지를 심도있게 분석했다. 켈러 장군은 일본군 포병이 모티엔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쏜 산탄의 파편으로 인한 상처로 인해 사망을 했고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3.6. 텔리수 전투


1904년 7월 14일~7월 15일에 양일간에 걸쳐서 만주 뤼순 항 북부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명 와팡구 전투라고도 한다.
뤼순에 틀어박혀 있던 러시아 군을 엄호하기 위해 득리사(得利寺, 일본어로 도쿠리지)에 진지를 구축 중이던 시베리아 제1군단과 그들을 공격한 일본 육군 제2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써 만주 여순항 북쪽 130 km 떨어진 작은 촌락에서 벌어졌다. 오늘날 이 촌락은 드리시(중국어: 得利寺 Delisi)로 알려져 있으며 랴오닝 성 와팡뎬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 육군 제2군이 남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군 주력은 뤼순 요새의 2개 사단과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다시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스탁겔베르크 중장이 이끄는 시베리아 제1군단이 남하하여 득리사 부근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당초 제2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요격한 후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대본영에서 적의 진지 구축이 완료되기 전에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득리사의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6월 14일에 득리사 부근에 도착한 제2군은 다음날 15일에 화포로 진지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대도 응전을 했지만 일본 육군은 화포를 200문 이상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100문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한 지형을 살릴 수 없었다. 러시아 군이 득리사 역에 불을 지르고 웅악성(熊岳城)으로 철수하면서 제2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 후 추격하지 않았던 제2군에 비판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이후에도 뤼순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러시아군 사상자수는 33500명중에서 적어도 3500명(477명 전사, 2,240명 전상, 754명 실종)에 이르렀으며 일부는 1만명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공식 기록은 3,500명이었다. 일본군 사상자 수는 4만명중에서 1,163명 (217명 전사, 946 전상)이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군대에 의한 습격위협이 이 전투로 사라졌기 때문에 일본군은 여순항 진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텔리수 전투가 벌어지던 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러시아 순양함은 2척의 일본 수송선을 일본 근해에서 격침시켜 2,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내게 했고 꽉 막힌 여순항 포위에 필수적인 여러 포병대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했다.

3.7. 대석교 전투


1904년 7월 24일~7월 25일까지 만주 라오양과 뤼순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로 중국어로 타이시차오 전투라고도 한다.
잉커우와 남만주 철도 본선을 연결하는 대석교에 자리를 잡은 러시아 제국 육군의 시베리아 제1군단과 시베리아 제4군단을 일본 제국 육군 제2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싸움으로 텔리수 전투를 마친 제2군은 보급을 위해 공격을 피했지만 대본영에서 조기 공격 명령을 받아 대석교에 진을 치는 러시아 제국 육군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에 7월 24일 5시 30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저우 방면에서 3개 사단으로 진격하는 제2군에 맞서 러시아 군은 대석교 북동쪽 구릉지에 대포병 진지를 만들고 포격을 시작했다. 맹렬한 포격으로 제2군은 진군을 저지되었지만 러시아 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고 7월 25일에 제2군은 대석교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오쿠 야스카타 대장의 제2군은 약 64,000명중에서 1000명이 전사했고 러시아의 게오르기 스탁켈베르크 중장과 니콜라이 자루바에프 중장이 지휘하는 시베리아 제 1, 4군단의 약 60,000명은 1200명이 전사했다.

3.8. 시무청 전투


1904년 7월 31일에서 8월 1일까지 발발한 교전으로 일본군 제 2군에서 분리된 노즈 미치쓰라 장군이 지휘하는 제4군 휘하의 제5사단과 10사단은 랴오양 시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 진군은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제국 제 2시베리아 군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러시아군은 파벨 미시첸코 중장이 이끄는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고산에 상륙한 제4군은 독립 제10사단을 모아 랴오양 시로 진격했다. 그 도상에 있는 요충지였던 하이청 시 근교에는 시베리아 제2군단이 포진해 있었다.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7월 30일에 진지에 도착하여 다음날 공격을 시작했다. 제4군은 포위를 하며 접근하는 제2군 소속의 제3사단과 공동으로 전투를 수행하지만 전황은 유리하지 못했다. 이에 미하일 자술리치 중장이 북쪽으로 퇴각을 결정하고 전투는 8월 1일 새벽에 끝났다. 시베리아 제2군단은 요양에 있는 러시아 만주군 주력과 합류하고,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제2군과 함께 요양 남쪽에 진을 쳤다.
이날 일본군은 836명의 피해가 났고 러시아는 약 1,21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 육군 제4군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 위해 랴오양 시로 향하게 되었다.

3.9. 뤼순 공방전




3.10. 203고지 전투




3.11. 황해 해전


1904년 8월 10일에 황해, 산둥 반도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로 일본이 전략적인 승리를 차지한 전투이다.
1904년 8월 10일 12시 30분에 연합함대는 뤼순 서남쪽 23해리 부근에서 남하해 온 뤼순함대를 확인하고 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뤼순함대는 교전을 하지않고 시종일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에 충실하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뤼순함대와의 7km 거리에서 정자전법을 실행하기 위해 함대 행동을 시작했지만 뤼순함대의 후방을 따라잡지 못했다. 15시 20분부터 추격을 시작했지만 포격을 재개할수 있었던 것은 17시 30분에 이르러서였다.
18시 40분에 뤼순함대의 기함인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2발의 포탄이 직격했고 빌헬름 비트게프트와 조타수가 전사했으며 이바노프 함장은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끌어들여진후 엔진에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가 왼쪽으로 급선회했고 함대의 열에 돌진한 결과 전체 함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합함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남하하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뤼순 함대는 전함 페레스베트의 차석 지휘관 파벨 우크톰스키 소장이 임시로 지휘하게 되었으며, 5척의 전함 (체사레비치 제외)과 1척의 순양함, 9척의 구축함이 침몰되지 않고 간신히 뤼순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함 체사레비치와 구축함 3척은 독일령 자오저우 만에서 방호순양함 아스콜드와 구축함 1척은 상하이에서 방호순양함 다이아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 프랑스 당국에 억류되었다. 또한 구축함 1척이 좌초되고 자침한 다른 구축함 레시테리누이가 즈푸(현재의 옌타이 시)에 입항한 일본군에 노획되어 구축함 아카츠키(暁)로 편입되었다. 뤼순은 각 함의 피해를 복구할 수 없었으며 이 결과 뤼순 함대는 그 이후 대대적인 작전을 펼칠수 없게 되었다.
출격의 보고는 즈푸에 있던 러시아 영사의 손에 의해 블라디보스톡에 전달되었고 블라디보스톡 순양함대가 뤼순 함대를 엄호하기 위해 출격했다. 출격 30분 후에는 레시테리누이에서 보고 따라 출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함대는 오지 않았고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는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이 이끄는 제2함대에 울산 앞바다에서 포착되어 격파되었다
일본함대는 미카사, 아사히, 시키시마, 야쿠모가 참전했고 러시아는 체사레비치, 포베다, 페레스베트, 폴타바, 레트비잔, 세바스토폴이 참전하여 거의 7시간에 걸친 해전으로 쌍방 약 7,382발의 포탄을 주고 받았다. 이 해전 후 뤼순 함대의 주력함 중에서는 전함 세바스토폴이 지상공격을 위해 몇 차례 출격했을 뿐 그것도 어뢰를 맞은 이후는 제대로 된 출동은 할 수 없었다.
이후 연구를 통해 해전 이후의 뤼순 함대는 함대 포를 분리하여 육상 요새로 돌려놓았고 승무원을 육전 부대로 배치하여 함대로서의 전투 기능을 상실한것을 발견했다. 그 결과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괴멸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 측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뤼순 함대의 작전 능력이 아직 건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군에게 뤼순 요새 공략을 조기에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또한 정자작전이 사실상 실패(적함과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한 것이나 적함을 침몰할 수 없었던 것이 큰 과제로 남았다. 이 해전에서의 교훈을 얻어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때 활용되었다.

3.12. 울산 해전


1904년 8월 14일에 대한제국 동해안 울산 앞바다에서 일본 제국 해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 사이에 벌어진 교전. 이 해전은 황해 해전이 벌어진 4일 이후에 도주한 러시아 함정을 추격하며 일어난 교전이다.
8월 14일 오전 4시 25분 울산 남부를 남하 중이던 히코노조가 이끄는 장갑순양함 이즈모, 아즈마, 도키와, 이와테로 이루어진 제2전대는 좌현 전방에 등불을 발견하고 4시 50분에 그것이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임을 확인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도 4시 30분에 북쪽으로 일본 함대를 발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남쪽을 향해 도주를 시도했지만 적 발견 소식을 보고받고 남쪽에서 북상해 오는 있는 방호순양함인 다카치호, 나니와를 발견하고 일전이 불가피함을 알고 북북서로 배를 돌렸다. 그들의 반응에 대응하여 제 2전대도 동쪽으로 변침했다.
양 함대의 거리가 좁혀지자 5시 23분에 거리 8400m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을 주고 받으며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5시 36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오른쪽으로 변침하면서 맨 후미의 류리크는 집중 포화를 받았고 6시에 그로모보이와 로시야는 16시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 류리크와 함께 북서쪽으로 향했다. 따라서 제2전대도 북서쪽으로 약간 서쪽으로 변침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6시 30분 류리크는 피해를 만회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후 그로모보이와 로시야는 류리크를 엄호하려고 일본 제2전대와의 교전을 계속했다. 그러로시야’의 피해만 더 커졌고 류리크도 피해를 떨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7시 54분경에 북쪽으로 도주했다. 한참후에 이 두 함선은 다시 제2전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류리크가 발사한 포탄이 이와테에 명중하여 이와테에서 75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지만 에센은 류리크 구원을 포기하고 8시 22분에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이때 제4전대 나니와, 다카치호가 접근해 오고 있었지만 에센 소장은 제2전대를 나머지 두 함으로 끌어들이면 손상된 방호순양함 두척을 물리치고 귀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히코노조는 제4전대에 류리크를 맡겨두고 그로모보이과 로시야를 추격했지만 이즈모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10시 4분에 추격을 중단했다. 이때 지나친 소음으로 옆 사람과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히코노조에게 탄약 부족을 전달한 참모가 칠판에 우리에게 남은 탄환이 없음이라고 써서 전달했다. 그것을 본 히코노조는 억울함 때문인지 칠판을 참모로부터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그것을 여러번 짓밟았다. 그러나 이즈모의 탄약은 탄약고가 적어서 대부분은 탄약 통로에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제2전대의 추격이 중지되자 그로모보이과 로시야는 이틀후에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귀환했다. 보고에 의하면 두 함선의 인적 피해는 전사 140명, 부상 319명이었는데, 반면 제2전대의 피해는 전사 45명, 부상 55명이었다.
우류 소장이 이끄는 나니와와 다카치호는 8시 42분에 류리크에 포격을 시작했다. 류리크는 어뢰를 발사하고 충각 공격을 시도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지만, 10시경에는 침묵했고 지휘를 했던 콘스탄틴 이바노프 대위는 자침을 명령하고 류리크는 침몰했다. 류리크의 침몰 후 일본 측은 구조 작업을 실행하여 626명을 구출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귀환한 두 척은 선체 자체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일본군의 포격으로 갑판이 뚫려 수리는 물자와 노동력 부족으로 지지부진했다. 해를 넘긴 1905년에 수리를 마친 두 척은 1905년 4월 25일에 일본 열도 근해에 군사 임무를 띠고 출발했다. 그러나 그로모보이는 5월 11일에 어뢰를 맞고 다시 수리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대국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일본군은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 소속으로 태평양에서 별도의 행동을 취한 보조순양함인 레나는 황해 해전, 울산 해전 등의 소식을 듣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까지 도주하다가 억류되었다.

3.13. 코르사코프 해전


1904년 8월 20일에 사할린 코르사코프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일본에서는 소야 해전(宗谷沖海戦)이라고 부른다.
일본 제국 해군은 순양함 2척(지토세, 쓰시마)을 이끌고 타카기 스케이치 대좌, 타케나카 타케테루 중좌가 작전을 지휘하여 러시아 제국 해군의 막시밀리안 폰슈리츠 소령의 방호순양함 1척 (노비크)을 맞아서 싸웠다.
이등보호함 노비크는 이전에 벌어진 황해 해전에 ​​참가한 구축함 중 1척이었다. 해전에서 일본에 패한 후 일본 함대에 쫓겨 뤼순 항으로 퇴각할 수 없자 독일령 자오저우 만에서 석탄을 보급 받은후 일본 열도를 우회하여 태평양을 북상하여 블라디 보스토크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연료가 부족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석탄을 보급받기 위해 사할린의 코르사코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일본 해군의 순양함과 해전이 벌어진 직후 일본 순양함의 포탄에 맞아 노비크는 쾌속을 살리지 못하고 이내 좌초되었다. 승무원들은 군함을 버리고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 해전은 러시아 해군의 전력을 어느정도 줄이는 데 기여했으며 또한 당시 러시아 제국 해군이 벌어고 있었던 통상적 파괴 작전의 위협도 감소시켰다. 이 해전 이후 노비크는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된 후 수리되어 일본 해군에 편입시켜 통보함 스즈야(鈴谷)가 되었다.

3.14. 랴오양 회전


요동 전투라고도 하며 러일전쟁 중기인 1904년 8월 24일~9월 4일까지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부근에서 진행되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요동 반도와 선양 근처 철도에서 만주, 한반도등의 권익을 놓고 1904년 (메이지 37년)에 발발한 러일전쟁 최대의 전면전. 양군의 주력이 처음 충돌한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은 15만 8,000명의 군사를 가지고 방어망을 전개하고 일본군들은 12만 5,000명의 병력으로 28만의 군사가 충돌, 압록강 전투과 함께 일본군에게 최초로 근대 육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 전투였다.
일본군은 8월에 거의 랴오양에 집결하고 동쪽에서 제1군, 제4군, 제2군을 전개하고 제1군이 태자강을 건너고 동쪽을 우회하면서 러시아 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작전을 계획할 생각 이었다. 8월 3일에 아키야마 요시후루 소장이 이끄는 기병 제1여단(나라시노)은 적정 정찰을 하도록 명령 받고 전투 전까지 적정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 아키야마 소장이 이끄는 부대는 기병 제1여단을 중심으로 그 밖에 보병 제38연대 (후시미), 야포병 제14연대, 기포병 중대, 공병 제4대대 등, 제3중대의 복합형 집단을 구성했으며 아키야마 지대로 불렸다.
8월 26일에 제1군은 홍사령에 진공하여 이날 오후에는 제2사단이 야습를 감행하고 나서 러시아군이 구축하고 일선 진지였던 이곳을 철수한다. 제2군도 8월 25일에 진격했고 러시아군을 후퇴시킨다. 이어서 28일에는 만주군 총 사령부는 두 군에 총 면적 209 미터의 평지이기도 한 수산보 진지의 공략을 명하고 30일에는 진지에 공격을 개시하지만 전황은 막힌다. 30일 심야에는 제1군이 랴오둥 반도에서 태자 강을 건너고 랴요양을 우회하면서 우메자와 여단과 함께 러시아군 두번째 진지를 공격한다. 러시아 측은 제1군 측에게 공격을 예상했지만 정찰의 미비도 있어 일본군의 행동을 포착하지 못하고 각 군단으로부터 파병 부대에서 응전했다. 제1군은 만주산을 확보하고 주력전에서 러시아 측 병력 추출의 영향으로 9월 1일에는 수산보 진지 부근을 확보한다.
9월 4일에 쿠로파킨은 퇴로가 차단 되는것을 두려워하고 전선 기지로부터 봉천에 철수를 명령했다. 일본 측은 병력 소모나 연전의 피로가 있는 추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하얼빈을 공략할수 없게 되면서 기본 전략의 변경이 불가피했다. 랴오양 회전은 일본군은 무혈 입성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쿠로파킨 장군의 전략적 후퇴라고 주장하고 양군이 승리를 선언한다. 사상자는 일본 측이 2만 3500명이며 러시아 측이 2만 정도로, 양군 모두 4만 명 이상에 달했다. 일본군에서는 8월 31일에 랴오양 회전의 수산보 쟁탈전에서 보병 제34연대의 세키야 메이지로 연대장, 타치바나 슈타 제1대대장(소령)이 전사했다. 특히 타치바나 소령은 해군의 여순 철수 작전에서 전사했다. 그 후 히로세 타케오 소령과 함께 전후로 군신으로 알려졌다.

3.15. 사하 전투


사하, 봉천 남쪽을 중심으로 하여 1904년 10월 9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전개된 전투. 러시아 육군이 일본 육군에 대해서 반격으로 시작된 회전으로 이 싸움 이후 겨울에 돌입하면서 사허 대진으로 불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회전의 계기는 러시아가 러시아 만주군을 알렉세이 쿠로파킨 휘하에 있던 것을 그리펜 벨크 장군과 쿠로파킨 장군의 쌍두 체제로 이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쿠로파킨은 일본 육군을 공격하고 위신을 제시하려 했다.
10월 9일에 러시아 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그것을 일본 육군이 요격하는 형태로 싸움이 시작됐다. 일본 육군은 러시아군의 공격을 간파한 것으로 압도적인 병력 차이가 있으면서도 러시아군에 대해서 효율적인 방어를 함으로써 큰 손해를 끼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러시아 군에게 공격을 하면서 러시아군은 사허 북안에 퇴각했다. 일본군은 더 공격하다고 하더라도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만주군이 속한 대본영은 여순항 포위에 우선하고 탄약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과 겨울에 돌입하고 탄약이 다 떨어져 행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군은 참호에서 다음의 공세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한 이 회전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존재로는 우메자와 미치하루 소장이 이끄는 근위 후비 혼성 여단 (우메자와 여단)이 있다. 근위 후비 혼성 여단은 후비 병(예비역)의 병사들로 구성된 2급의 부대며 우메자와의 탁월한 지휘 아래 최전선에서 정예 부대에 못지않은 맹렬한 분전을 보이며 승기의 일단을 담당하는 활약을 보인 일로 현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3.16. 산데푸 전투


1905년 1월 25일~1월 29일에 러시아 만주군의 대공세로 일어났던 일본 육군과 러시아 육군의 전투. 러시아 측의 기습으로 시작되는 병력에서 열세였던 일본군은 초반에는 고전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유럽 육군에는 러시아 육군의 작전 목표가 시마키라 보 부근 강강에서 싸웠다고 해서 일명 심 아키라 보 부근의 전투라고도 한다. 여담으로 일본군이 기관총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전투이다.

3.17. 봉천 전투




3.18. 쓰시마 해전




4. 전쟁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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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포츠머스 조약


포츠머스 조약은 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했다. 이 사건 덕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겨서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내게 된다.종전 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s-3.1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여는데, 자기네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 덕분에 한반도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만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지극히 열강에 치우친 발상.
포츠머스 조약 협상에서 일본 측 대표였던 고무라 주타로 전권대사는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이를 보면 우습게 보던 상대에게 참패하고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가 억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발언의 가부를 일일히 밝혀보자면
  •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 않았다.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무려 3만 명이나 잃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중 1할 5푼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봉천전투에서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도 상당한 출혈을 강요받았다. 러시아 제정군도 많은 손실을 입었고, 시베리안 철도로 병력수송, 보급한다는 계획은 무산으로 돌아간지 오래이기에 유럽 전선의 병력을 수송하기엔 턱없이 무리였을뿐더러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전장이 격화되던 시점에선 유럽전선의 병력의 수를 아득히 넘은게 만주전역 러시아군의 병력수다.
  •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철도 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당해서 괴멸되는 관계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기본 작전술이 빠르게 후퇴한 뒤에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다.[18]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 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 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2만 명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역시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명분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하였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도 상당했던 것이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였고 쓰시마전투 이후로 독선적인 니콜라이 2세조차 전쟁에서 패하였음을 시인하고 미국 중재하의 종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는 일본의 속전속결 공세로 애써 요세화시킨 만주전역을 뺴앗겨 공든탑이 무너졋기에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며, 이전에 겪었던 몇 차례의 육전 패배와 짙어진 패색으로 일어난 민중소요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19]
  •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 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 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 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러일 전쟁이 있었던 1905년 총군사비 / GDP가 23.69%......여기서 12억 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 만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 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하여 파산 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

이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세르게이 비테[20]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국제여론에게 돈만 밝히는 신흥열강이란 이미지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한반도 영유후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바꿔 전쟁발단의 목표에는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이권을 획득했다.
  •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으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되었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으며 전략의 미흡함으로 인해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 자체도 러일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가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그 여파로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었다.[21] 얼핏 보면 일본에 내려진 천운으로 보이나,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러시아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비밀리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강간되어 임신당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 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미국 및 유럽의 유대인 부호랑 폴란드인들이 일본을 지지하여 국채를 사들인 점도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22]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배상금뿐만 아니라 연해주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는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 방화 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서 경호를 붙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 측의 황당무계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4.2. 러시아


패전한 러시아 제국은 1905년 혁명이란 대격변을 겪었으며 국민들은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마지막 기대와 신뢰를 거두었다.
세계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패배를 생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 하는 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던 영국은 1세기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다. 이는 영러 협상으로 이어져 러불 동맹, 영불 협상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삼국협상이 탄생하고 이에 대응한 삼국 동맹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또한 10년 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세계 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다. 러시아 제국은 삼국 협상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식량난을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로 붕괴 되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들어서게 된다.

4.3. 일본


일본은 이때 서양의 열강인 러시아에게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후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인정받았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 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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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또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시켜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와 같은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 장, 수천 장 출판되어서 각 도시와 마을의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다.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23]
문제는 실익인데,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금도 없고 영토를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는 큰 가치가 없는 곳이라 당연히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가까스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하였지만, 이후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급증해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24]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군국주의의 발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반자이 어택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점감요격작전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버렸다. 이렇게 일본군에게 박힌 악영향이 이후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 러일전쟁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사이에는 30년의 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유럽,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들이 1차대전의 전훈을 달달 암기만 해서 2차대전 때 이를 경직적으로 복붙한 국가는 일본 이외 어디에도 없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 특정 전쟁을 이리 신화화하고 그 전쟁 전훈을 그 권위적으로 주입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일본 특유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적 사회나 군대 분위기와, 본질적으로 강대국과 총력전을 벌일 역량이 없는 일본의 국력과 맞물려 영일동맹의 전성기에 전수받은 군사기술,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 군사학 유학도 무위로 끝나고 이후에는 오히려 정신력 제일주의로 퇴보하는 모습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고봉 사건/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육군의 대 소련전 준비는 현실을 도피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후 일본 육군의 보병조전은 대동아전쟁 종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 일본 위키백과 보병조전 문서

그러나 지대장은 이 자리에 오기 전 육군보병학교의 재료창장으로서 '보병조전'을 편찬하고 오로지 보병을 중시하는 전법을 창도한 터라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에서 저 육탄 전법을 밀고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중략)...나는 오카다의 이 말이 '과달카날전 해명'의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전통적인 전법의 잘못을 알아버린 이치키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자살한 것이 아닐까? -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되돌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계획의 복잡성과 그들의 가상적(미해군)의 배치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이 그것이다. 비록 전간기 다른 국가의 해군들도 정교한 전술 계획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본 해군의 그것은 복잡성 측면에서 타 국가들의 계획을 능가했다. 일본의 계획 입안자들은 그들의 함대가 일련의 복잡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한 정확한 시간계획과 함대 운동 조정의 희망사항들에 탐닉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참모 본부의 전술가들은 일본 함대가 자신들의 전술을 전개하는 동안 미 함대는 수동적으로 그들이 예상한 대로 움직인다는 너무나 순진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 해군의 전열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인들의 조심성은 일본 함대가 사전에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1930년대 미 해군의 작전 계획은 피켓함들을 함대 중심에서 75~100 마일까지 떨어진 동심원상에 배치하도록 상정하고 있었다.

오직 소수의 일본 장교들만이 그들의 전략 및 전술 입안과정의 자기기만적 형식주의를 비난했다. 전후 호리 테이키치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하는 도상 연습과 계획은 언제나 미 함대가 미리 결정된 가정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부 일본의 작전입안자들은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제쳐둔 채 대규모 해상 결전의 성공에 대한 확률에 대하여 거의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처럼 다시 한 번 천운(天運)이 승리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여줄 것이라고 가정했는지도 모른다. -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273~280 p, 288 p 번역: 일 해군의 야전 계획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란, 러일전쟁 종결 후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해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이쇼 전반기까지 연합함대는 전시 등에 임시로 편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이라는 전시가 종료된 것에 의해 해산되게 된 것입니다....(중략)...토고 사령장관의 말은 일본 해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군의 전함의 명중정밀도를 올려 백발백중으로 만들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정밀도는 뒤처지는 적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붙게 되었습니다. 즉 전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휴일도 없이 맹훈련을 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중략)...이런 요인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토고 턴'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나온 말은, 정신론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것이 되지는 않을까요...(중략)...토고 사령장관이 남긴 말의 배후에는, 이렇듯 제대로 된 동맹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우위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토고 사령장관의 말에는 당초 정신적 요소는 없고, 극도로 합리적인 배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와 배경에서 나온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나온 배경이 간단히 잊혀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경구로 남아있는 말도, 어쩌면 말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동맹관계의 뒷받침에 의해 합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 40년 후 이것들 대신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대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한 것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25]


4.4. 한국


러일전쟁의 내면[26]
대한제국에는 그야말로 체크메이트가 선언된 전쟁.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세력 균형마저 깨졌다. 당장 한국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27] 그러나 러일전쟁 종전 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안 가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제국은 사실상 러일전쟁의 유일한 전리품이었던 한반도를 있는대로 쥐어짜내 그간의 지출을 만회해야 했으며 그 결과 식민지배 10년도 안 되어 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보다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은 대한 제국이라 볼 수 있는데, 만약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한반도는 세계 열강이 부딪히는 경계선으로 작동하여 동시기의 태국이나 에티오피아같이 중립국 위상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국제사회는 한반도를 완전한 일본의 영향권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한반도가 본격적인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한국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이미 독립협회는 소멸되고 모두 러시아 편을 들 뿐, 소수 친일파만이 일본을 믿고 지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치게 한국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중에서

당시 한국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한중일 연합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매국노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여 을사조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배척하던 성향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주도권이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여기에 미일 간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앞으로 일본 편에 서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할거란 판단이 섰던 것인지 이때를 기점으로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앞장서고 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이 됨으로써 평생 친일 매국노가 되었다.

4.4.1. 한국인의 교전 참여


2011년 6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러시아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번역하여 출판한 책인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28]에 의하면, 이제까지 흔히 알려진 인식과는 다른 사실이 공개되었다.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러시아군과 협력하거나 혹은 아예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한국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중립만 지키고 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
한 예로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이던 김인수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로 탈출하였고,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대령에까지 올랐다. 그는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을 만큼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링크
그 밖에도 함경도 출신 한국인 포수들 1만 7천 명은 러시아군에 소속된 별도의 부대인 선견한국분견대를 만들어서 러시아군과 함께 일본군의 연해주 침입을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29] 구한말에 한국의 정규군은 무기력했으나, 민간인 포수들 특히 함경도 출신 포수들은 그 사격솜씨와 용맹함이 매우 출중하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그들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30]

4.5.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


한국에서는 물론 을사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러일전쟁은 상당히 큰 여파를 남겼다. 당시에는 동양인이 서양인에게 승리한 전쟁[31]이라는 점 자체가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4.5.1. 중국


이미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뒤이어 그 영향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쑨원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량치차오처럼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돌아선 인물이 있었다.
참고로 중국 입헌 개혁에도 촉진제가 되었다.

4.5.2. 베트남


베트남[32]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트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트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하지만 호치민이 "조선이 일본의 지배받는 모습에 행복에 보이느냐?" 하면서 다시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4.5.3. 인도와 동남아


역시 이 사건에 크게 기뻐해,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에서 그는 소년시절에 일본의 승전 소식을 듣고 수많은 아시아의 소년소녀와 어른들이 감격했다고 얘기했다. 유럽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놓였던 아시아에 일본이 유럽 군대를 이겼다는 소식은 그들이 옛날에 그랬듯 틀림없이 유럽을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줘 '아시아인의 아시아' 구호가 퍼지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인도가 당장 위험에 처한 동아시아의 입장을 고려하기 어려웠듯이, 일본의 침략에 정면으로 노출되고 서양 열강과 대치한 시간이 길지 않은 조선과는 일본을 본 시각이 달랐다. 물론 네루는 같은 저서에서 일본 역시 다른 열강과 다를 바 없으니 주의하라고 했지만, 인도는 동남아시아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과의 무력충돌이 없었으며 찬드라 보스같이 일본과 협력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람도 등장하는 등 인도는 일본을 전쟁 끝까지 긍정적으로 대했고,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인도 판사[33] 라다비노드 팔에 의해 일본 전범의 양형이 독일에 비해 크게 낮아지는 계기가 된다.

4.5.4. 오스만 제국


러일전쟁 때문에 아예 나라가 운명이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터키의 민족주의 운동가였던 무스타파 카밀 파샤는 일본의 승리를 '차리즘 독재에 대한 헌정주의의 승리'라면서 튀르크계 민족에게 동네방네 홍보했으며, 민족주의자 할리데 에디프 아드와르는 아예 아들 이름을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을 따서 토고 라고 지었을 지경이다. 이런 지경에야 당장 오스만 제국의 정치 판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안 줄 수가 없었는데, 러시아에게 패배해 불리한 협정을 맺었던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만한 일본에 대한 협조적인 언론을 통제했고, 일본의 승전 후엔 "러시아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리가 위험하다"면서 러시아의 패배가 터키의 전제정을 흔들까봐 여론을 통제했지만, 곧 '근동의 일본'을 자처한 청년 튀르크당의 급진 봉기가 일어나며 술탄을 폐위하고 입헌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출처]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 하던 청년 튀르크당 정권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4.5.5. 에티오피아 제국


러일전쟁 이후 에티오피아 제국 내에선 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일본 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인정하면서, 일본 제국을 모델로 하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Japanizer"라는 지식인 집단이 나타난다.[34] 대표적으로 1930년대 에티오피아 제국 외무장관인 "Heruy wolde selassie"가 있으며 하일레 셀라시에 역시 이런 일본 모델 개혁에 호의적이어서 Japanizer인 "Tekle Hawariat Tekle"에게 헌법 작성을 요구하고, 그는 메이지 헌법을 참고해 에티오피아 제국의 헌법을 작성한다. 나아가, 일본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통해 이탈리아의 침략 야욕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이어지나 만주 사변 후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과정에서 몇 안 되는 우호국인 이탈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에 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우호 관계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4.6. 러시아가 이겼다면?


알렉산드르 3세 시절부터 러시아는 조선 식민화에 부정적이었으나[35] 니콜라이 2세의 비선이던 베조브라조프 등 재야의 강경파들은 조선의 경제적 속국화, 한반도 북부지역 병합 등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며 한시적으로 러시아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중앙의 재무성, 외무성 및 주요 장관들과 대립하던 이들은 1903년부터 국정에서 점차 배제되며 니콜라이 2세의 신임도 잃는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으니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을 시 대한제국이 저런 러시아 내부의 강경론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대한제국은 다른 무엇보다 극동의 부동항을 간절히 원하던 러시아의 보호국 내지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과 같은 친러국가들의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당시 황제 니콜라이 2세 또한 대부분의 각료들과 마찬가지로 굳이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원하지는 않았고, 설령 식민화를 시도했다고 해도 경쟁관계인 영국 등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서구 열강들의 압박 문제도 있고 하니, 러시아로서는 외무성 일각의 주장대로 한반도를 해양 세력인 영국-미국-일본과의 완충 지대 중립국으로 놓아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 승전 이후 일본처럼 한국을 자국 영토 식민지로 합병했을 가능성도 존재할 수 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해양출구인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조선진출을 강행하던 일본과의 교섭에서 조건부 세력분할을 논의한 적도 있다.[36]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패했다면 국력이 심하게 손실되어 대한제국을 침략할 힘이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무리한 재정소모와 사회동원의 여파로 전후 경제위기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개입 없이 근대화를 진행할 시간을 벌었을 수도 있다. 당장 대한제국의 유효한 근대개혁으로 평가받는 광무개혁도 러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보호국 내지 열강들의 중립지대가 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37] 더불어 고종황제한반도가 러일간 패권 경재의 완충지대가 되면서 태국의 라마5세 쭐랄롱꼰대왕과 비슷한 환경에 직면하게 됐을 것이다.

5. 여담


  •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을 배경으로 한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역사 교양서를 보면, 발트 함대 사령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북해에서 동북아까지 오는 긴 여정 중에 함대 전투함들의 바닥에 따개비가 붙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분을 염려하는 장면이 있다. 군함에서는 따개비가 들러붙으면 기동력을 깎아먹기에 큰 문제가 생긴다.
  • 일본에서는 1899년에 태어난 쿠단이 5년 뒤에 러일전쟁이 벌어질거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 일화는 10년 뒤(1909년)에야 신문기사로 나온 이야기라 신빙성은 알 수 없다. 당시 예언을 남기고 죽은 쿠단의 시체는 박제시킨 뒤, 나가사키에 있는 야히로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의 폐관으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

6. 관련 문서



[1] 선전포고는 해 두었으나 이후 세르비아에 합병되는 바람에 2006년 독립 때까지 전쟁 중이었다.(...) 2006년 독립 후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종전 합의. 물론 말이 합의고 퍼포먼스에 가깝다.[2]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3] 또한 에티오피아는 결국 이탈리아의 반복된 침공으로 인해 점령당하고 식민지화 됐다.[4] 이에 명성황후강대국러시아의 으름장 한 번에 눈엣가시던 일본이 깨갱거리자, 각종 이권을 미끼로 러시아를 뒷배경 삼아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조선을 먹어치울 기회를 살피고 있던 일본은 이를 좋게 볼 리 없었고, 곧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5]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베베르 소촌 각서. 고종의 환궁과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 주둔 러시아와 일본군을 800명으로 제한했다.[6] 이홍장-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나라,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나라는 길림성흑룡강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이때 이홍장은 50만 루블의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7] 조선의 군경 양성을 허용하고, 양국은 균형적으로 지원한다. 비밀 조항으로 만일 양국이 출병하게 되면 같이 출병하며 양국 사이에 군사중립거점을 둔다. 일명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8] 이에 자극 받은 영국은 2개월 뒤, 견제 목적으로 뤼순 반대편에 있는 산둥 반도의 웨이하이를 조차 받는다.[9] 이 과정이 대한제국에 영향을 준 사건이 바로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다음 해 3월로 연기된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독립협회와 관련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투쟁으로 막아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일시 변심하고 러시아 군사 고문단을 해고하기로 한 것이 원인이고, 그나마 얼마 못 가 재개되었다.[10] 그래서 미국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11]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다.[12] 러일전쟁 말기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패색이 현저해진 상태였다.[13] 전쟁 이전에 이미 러시아군은 탄환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다.#[14] 단, 당시 전쟁 전 선전포고는 의무사항이 아니였으므로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전포고는 국가 간의 암묵적 전통이기에 일본은 미리 러시아가 1809년에 스웨덴을 기습공격했단 사실을 명목으로 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15] 이 고질병을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나 장비 등에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국력상의 문제를 일선 장병들과 중하급 지휘관들의 정신력으로 때워보려는 시도가 거의 처음 나타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16] 봉천 전투에 참전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동생이다.[17] 심지어 이 당시 부상을 입은 러시아군 병사들을 돕던 조선인들까지 일본군이 전부 학살했다.[18] 만약에 전장이 주요 도시와 가까운 러시아 서부였다면 혹시 모를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 배는 막강했던 독일 국방군제2차 세계 대전 때 여기를 못 넘고 궤멸당한 걸 생각하면 보급에 한계가 있는 일본군이 러시아 서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육로로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19] 단 일본의 의료체계는 상당히 선진적이어서 비전투 손실이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각기병 # [20] 당시 각료평의회 의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21] 결과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시아 황실 붕괴→사회주의 혁명 테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차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점의 사정이다.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은 국내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더이상 외국과의 전쟁에 신경쓸 수 없게 된 것이다.[22] 러시아의 경우, 비테가 선방해낸 것에 흡족해 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할 정도였다. 비테 개인 입장에서는 강경파인 베조브라조프 일파가 저질러 놓은 것을 온건파인 본인이 뒷수습한 셈이었으며 얼마 뒤에 러시아 혁명의 뒷수습까지 하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23] 비록 청일전쟁 시에 작곡되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용되었다.[24]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에게 큰 불이익 없이 조약을 체결하여 니콜라이 2세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큰 칭찬을 들었을 정도였다. 일본의 폭동은 언론 통제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국의 어려운 사정을 숨긴 일본 정부의 자업자득에 가까웠다.[25]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 번역 번역 [26] 결국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뒤흔들린, 만주에서 치러진 전쟁이었다. 여기선 잘려 있는 삽화의 해설문에는 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짧게 나온다.[27] 식민 제국주의 시대 당시의 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다만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던 유럽이나 미국 등 서양 열강들이 지리적으로 붙어있지 않는 먼 나라들이였던 태국과 달리 한국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이권과 세력 확장을 노리던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등 여러 강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태국과는 상황이 달랐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28] 책이기는 하지만, 국방부가 한정 수량으로만 발간한 책이라서 교보문고 같은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으며, 용산 전쟁기념관 같은 한정된 곳에서만 판매한다. 간혹 인터넷 중고서점에 판매가 되는 경우도 있다.[29] 출처: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30] 고종 황제도 산포수들의 사격 솜씨가 정규군인 경군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했다.[31] 물론 역사를 보면 그런 사례는 많지만, 근대는 지금보다 그런 역사적 연구나 인식이 미비했던 시기다.[32] 러일전쟁 당시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33] 인도의 엘리트들은 영국의 식민지 규제 정책 때문인지 영국에서 대부분 이과 계열이 아닌 문과 계열의 법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간디, 네루 등 인도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들도 대부분 영국 변호사 출신이다.[출처] #. 터키의 국제관계학 저널을 번역한 내용이다.[34] Ethiopia and Japan before World War II, J.Calvitt Clarke III[35] 초기 대조선 정책을 정립한 니콜라이 기르스(Николай Карлович Гирс)부터 각료평의회를 주름잡던 세르게이 비테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지도부는 청나라 만주 지역의 이권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만주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해 식민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너무 멀고 당시 관점으로는 투자 대비 이익을 고려했을 때 이점이 적었다.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 제거나 양국간 교섭을 위해 러시아 해군과 정부 내에서 일부 지역의 군사적 점령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했고 러일전쟁 직전까지 러시아 중앙정부의 견해는 독립되고 친러적인 조선의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36]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한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37] 실제로 광무개혁이 이루어진 약 10년의 시간동안 대한제국은 엄청난 속도로 국력이 성장했다. 7~80년대와 21세기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알겠지만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시기에 10년 20년의 시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