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쿄

 



'''고쿄 (황거)
(こう(きょ | (Tokyo) Imperial Palace
'''

'''종류'''
궁전
'''주소'''
도쿄도 치요다구 치요다 1-1
東京都千代田区千代田1-1
'''개장'''
1968년
'''소유주'''
궁내청
'''연락처'''
+81 3-3213-1111
궁내청 참관안내 홈페이지 지도[* 고쿄의 지도, 키타노마루 교엔과 히가시교엔 지도가 함께 그려져 있다. 원래는 모두 에도 성이었기 때문.]
1. 개요
2. 특징
3. 역사
4. 시설
4.1. 궁전
4.2. 어소
4.3. 기타
5. 관광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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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국 도쿄도 치요다구 중심에 있는 천황의 거처이자 황궁이다. 일본의 군주 천황과 황후가 거처하는 곳으로, 이곳의 총관리는 궁내청이, 산하의 주요 업무는 경찰청 본부와 궁내청 병원 등에서 담당하고 있다.

2. 특징


황거(皇居)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에 붙여진 호칭으로 본래는 에도 성이 있던 곳이었다. 영어명은 The Imperial Palace. 가끔씩 별칭으로는 Black House라고도 불린다.[1]
황거 이외에도 여러 호칭이 있다. 내리(內裏), 어소(御所), 대내(大內), 구중(九重), 궁중(宮中), 금중(禁中), 금리(禁裏), 황궁(皇宮), 황성(皇城), 궁성(宮城)처럼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호칭도 있고 대내산(大內山), 백부(百敷), 자지정(紫之庭), 봉동(蓬が洞), 대궁(大宮), 운지상(雲之上), 운거(雲居)와 같은 일본 고유의 명칭도 있다.
고쿄의 천황이 주거하는 곳을 어소(御所)라고 하며, 각종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청사 등도 고쿄에 있다. 도쿄역국회의사당, 야스쿠니 신사, 일본무도관과 가깝다.

3. 역사



본래 에도 막부에도 성으로 건축된 곳이나 메이레키 대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사라진 천수각 폐허 위에 천황의 궁을 세운 것이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1868년에 도케이(東京) 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도쿄의 궁전이 되었고, 이듬해인 1869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두번째 도쿄 행차 때 천황이 앞으로 도쿄에서 체류할 것을 발표하면서 황성(皇城)이 되었다. 1888년에 메이지 궁전이 완공되면서 '''궁성(宮城)'''으로 명칭이 또한번 바뀌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미 공군의 공습으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68년이 되어서야 재건된 것이다. 소실 이전에는 비교적 화려한 편이었지만 신축된 건물은 깔끔한 현대식이다.
5월 24일 있었던 재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다 타 버린 고쿄. 당시 일본군, 40대의 소방차를 포함한 경찰 소방대, 민정문관 등 약 1만의 인력이 동원되어 소화 작업에 들어갔으나 결국 세이덴(正殿)을 포함한 27동이 전소되었다. 쇼와 덴노는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서 생활하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천황가의 보물인 삼종의 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유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1924년 김지섭 의사의 니주바시 의거와, 1932년 이봉창 의사가 도쿄 경시청에서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쿠라다몬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년에 2번, 현(現) 나루히토 천황의 생일2월 23일과 신정 다음날인 1월 2일 그리고 비정기이긴 하지만 새로 천황이 즉위 이후[2]에 일반인들이 고쿄에 자유롭게 출입하여 천황가의 황족들을 볼 수 있는 '''일반참하(一般参賀)'''를 실시한다. 이 때 황거를 찾으면 일본에서 천황의 위치라는 것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서 창가에서 손을 흔드는 천황 일가에게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권력은 없어도 여전히 국민들에게 굉장히 의미가 큰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69년에는 신년 행사 때 군중들의 환호에 답하며 창가에서 손을 흔들던 쇼와 천황에게 태평양 전쟁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목격한 참전자 오쿠자키 켄조(1921-2005)가 새총으로 파칭코 구슬을 날리는 테러를 저지른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이후 황족이 군중들을 접하는 발코니에는 방탄 유리창이 설치되었다고 한다.[3]


4. 시설



4.1. 궁전


사진
설명
'''세이덴(正殿, 정전)'''
'정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고쿄의 중심 건물이며 마쓰노마(松之間)ㆍ다케노마(竹之間)ㆍ우메노마(梅之間) 등 3개 방으로 나뉜다. 신년축하의례ㆍ훈장수여ㆍ궁중행사ㆍ외국 국가원수 및 고위인사 접견 등 공식적인 주요행사를 여기에서 거행한다.
'''호메이덴(豊明殿, 풍명전)'''
면적 915 m²(약 277평)로 궁전 내에서 가장 넓은 방이다. 궁중만찬회나 천황의 생일날 거행되는 연회 등 주로 대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렌스이(連翠, 연취)'''
면적 371 m²(약 112평)로 호메이덴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호메이덴과 기능이 동일하지만, 호메이덴보다 소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조촐한 연회장으로 사용한다.
'''조와덴(長和殿, 장화전)'''
길이 163m의 길쭉한 건물로, 고쿄 방문객의 휴식공간, 각종 리셉션, 일반 참하의례 등 다목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일반 참하의례 때는 조와덴 동쪽 정원에 운집한 군중을 향해 황실이 이곳 베란다 중앙부에 서서 손을 흔드는데, 1969년 1월 2일 새 궁전이 완공된 뒤 진행된 첫 일반 참하 도중 위에서 서술된 파칭코 구슬 저격 사건이 일어나 왼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베란다 중앙부가 방탄유리로 교체되는 소동이 있었다.

4.2. 어소


사진
설명
'''고쇼(御所)'''
후키아게 교엔(吹上御苑) 내에 있으며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 부부가 거주하는 공간이다. 1991년에 착공해 1993년 12월 8일부터 사용 중이다. 2019년 5월 1일부터 나루히토 천황을 맞이하기 위하여 약 9개월간 리모델링이 예정되어 있어서 나루히토 천황 및 마사코 황후 일가가 어소에 들어가는 건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해당 어소 내에는 삼종신기를 보관하는 전용 구역이 있다고 한다.
'''후키아게오미야 고쇼(吹上大宮御所)'''
후키아게 교엔(吹上御苑) 내에 있다. 1961년에 완공된 이래 쇼와 천황(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 부부가 생전에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의 사망 후 황태후가 된 고준 황후가 이곳에서 지냈다. 2000년 6월 16일 고준 황후가 사망한 후로는 주인 없는 공간이 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019년 4월 30일아키히토가 퇴위하고 아들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저절로 아내인 미치코 황후와 함께 상황·상황후의 자격(신분)으로 이곳에 머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다만 20년 가까이 빈 집이었던 관계로 이곳을 사용하려면 수리 및 재건축이 필요할 것이나 결국에는 이곳에 가는 게 아니라 다카나와 황족 저택으로 가서 임시로 지내다가 리모델링을 마친 토구고쇼에서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이에 대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에 안 지내고 굳이 토구고쇼로 가는 이유가 이곳에 거주하던 마지막 사람이 자신을 죽을 때까지 괴롭히던 시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4.3. 기타


사진
설명
'''고쿄 히가시 교엔(皇居東御苑)'''
황거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1960년 1월 29일에 결정된 각의에 근거, 구 에도성 유지를 정원으로 정비해 1968년 9월에 완성했다. 일반 개방은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도카가쿠도(桃華楽堂, 도화악당)'''
쇼와 천황의 아내인 고준 황후의 회갑을 기념해 1966년 2월에 건립되었다. 음악당의 명칭 '도카(桃華)'는 고준 황후의 오시루시(お印)[4]복숭아(桃)에서 따온 것. 고준 황후는 생전에 큰며느리 미치코 황후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도카 악당 건립 당시에도 빼먹지 않고 에피소드(?)를 남겼다.
'''산노마루쇼조칸(三の丸尚蔵館)'''
황실에 소장되어 전해지던 미술품들이 1989년 6월 국가에 기증되자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1992년 9월에 착공해 1993년 11월 3일에 개관했다. 현재 이곳에는 다이쇼 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인 세츠코(勢津子) 친왕비[5](1909-1995)의 유증품과 쇼와 천황의 아내 고준 황후의 유증품, 다이쇼 천황의 3남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인 키쿠코(喜久子) 친왕비[6](1911-2004)의 유증품이 추가되어 미술품 약 9천여 점이 소장되었다.
'''후시미야구라'''(伏見櫓)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니주바시 사진에도 함께 찍힌, 교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 야구라(櫓)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적이 다가오는지 감시하는 성루이다, 교쿄에는 후시미야구라 이외에도 여러 성루(야구라)들이 있다.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후시미야구라가 무너져 복구공사를 하던 중, 1925년 6월 29일에 건물 밑에서 시신 16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발견된 시신들이 똑바로 서 있는 자세로 오래된 동전을 머리 위에 얹은 희한한 모습이었다고 하면서, 에도 막부가 구 에도 성을 지을 당시 후시미야구라가 자꾸 무너지자 이를 주술적으로 막아보겠다고 바친 인간제물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궁내청은 이런 소문을 부정하고 에도 막부에도 성을 짓는 과정에서 해당 위치에 있던 사찰과 묘지를 이전하다가 남은 시신들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시신들이 발견된 이야기는 고쿄의 대표적인 '''괴담'''으로 남았다. 발견된 시신들은 인근 사찰 조조지(増上寺)[7]에서 수습하였다.

5. 관광


일반인의 경우 히가시교엔(東御苑, 황실정원)구역은 자유롭게(월,금, 연말연시 제외) 출입이 가능하나, 그 외에 참관이 허가된 구역은 일본 황실을 관리하는 부서인 궁내청에 사전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단체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굳이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지 않더라도 선착순 3백 명까지 투어에 참가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도 모든 구역이 참관 가능한 것은 아니고 일부 구역에 한정된다. 요금은 무료이며 한국어 가이드도 있다. 궁내청 참관 안내 사이트
대개 도쿄도 여행에서 한 번쯤은 들르는 장소이며, 다른 여행 코스와 묶어서 둘러보기에도 좋다. 히가시교엔 기준으로 JR그룹 도쿄역에서 도보로 10분, 도쿄메트로 오테마치역에서 도보 5분, 타케바시역에서 도보 5분 가량 소요된다. 고쿄 자체가 부지가 상당히 넓기 때문에 그 외에도 다양한 광역전철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6. 기타


  • 일본국 헌법상의 천황은 국가원수로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냥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만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안팎에서도 실질적으로는 천황을 국가원수로 예우하기 때문에 외국의 국가원수들이 방일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기도 한다. 이때 그들의 경호를 위해서 고쿄 관람은 당연하고 고쿄 앞 2블럭(고쿄 앞은 고급 호텔이 밀집해 있다)까지 경찰이 차량 통행 및 사람 보행을 엄격히 통제한다. 이 교통 통제는 외국의 국가원수가 탄 차량이 통과하면 풀리지만 그래도 고쿄는 여전히 통제 상태를 유지한다.
  • 국회 보고 정보 <헤이세이 15년(2003년) 국유재산 증감 및 총계산서>라는 문서에 따르면, 국유 재산으로써의 고쿄의 가치는 2188억 1000만 엔이라고 한다.[8] [9]
  • 고쿄의 위치 자체가 도쿄의 중앙부이자 녹지대이기 때문에 고쿄의 해자 주변은 달리기 코스로 인기 있다. 고쿄를 방문하면 꼭 한 번쯤은 그 주변을 달리며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일명 고쿄 러너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
  • 고쿄 와다쿠라 방면에서 직선으로 600m 정도 거리에 도쿄역이 있는 데 덴노 내외가 지방 공무로 도쿄역을 이용할 때 여기에서 차량을 타고 도쿄역 내 덴노 전용 건물까지 이동하게 된다고 한다.
  • 고쿄 및 토구고쇼에는 궁내청 직원들 이외에도 주변 환경 미화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1] 백악관이 White House라고 불리고, 중남해가 Red House라고 불리듯이 각 색깔별로 별칭이 있다. 한국도 청와대가 Blue House라고 불린다.[2] 즉위 기념으로 일반참하를 하는 건 헤이세이 때부터라서 이번이 두 번째 천황 즉위 기념 행사라고 한다. 아키히토 상황이 천황에 오를 때에는 쇼와 천황의 붕어에 따른 것이었기에 쇼와 천황의 추모를 위하여 일반참하는 헤이세이 2년으로 미루어졌지만, 이번 천황 승계는 생전 퇴위에 의한 것이기에 즉위 후 바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천황 즉위 행사를 최종적으로 마친 10월 중순에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5월 4일에 앞당겨서 시행했다.[3] 오쿠자키 켄조는 이 사건 이후 교도소에 1년 간 연행되어 이듬해인 1970년에 석방된 이후에도 1970-80년대 당시 쇼와 천황과 일본 권력층들의 전쟁 책임과 구 일본군 장병들의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반전 운동을 이어갔고, 1989년 쇼와 천황이 사망하고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이 된 이후에도 아키히토 천황에게 쇼와 천황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일본 국민들의 앞에 서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우편물들을 써 보내며 2005년 죽을 때까지 쇼와 천황을 비판했다.[4]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5]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의 손녀이며,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6]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외손녀.[7]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1393년에 창건된 정토종 사찰이다. 1590년에 도쿠가와 쇼군가의 보리사(菩提寺: 집안 조상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되었고, 1598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이후로 크게 번창했다.[8] 한화로 약 2조 2154억 7300만 원[9] 캘리포니아 주 전체 부동산 가격과 맞먹었다. 혹은 캐나다 전체 부동산 가격과 맞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