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 AFC 아시안컵 홍콩
1. 개요
1956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국령 홍콩의 완차이에 위치한 홍콩 정부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던 초대 아시안 컵. 이때는 명칭이 AFC 아시안 컵이 아니었고, '''아시안 네이션스컵 1956'''이었다.
2. 예선
당초 참가국은 20팀이었고, 이중 개최국인 홍콩이 본선에 자동진출하게 되었다. 나머지 19팀을 서부지역(1조), 중부지역(2조), 동부지역(3조)으로 나뉘어 진행했으나, 수많은 팀들이 기권을 하는 바람에, 나머지 7팀끼리의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본선진출팀은 굵은 글씨, 기권팀은 취소선으로 표기한다.
1조(서부지역) : '''이스라엘''', , [1] , [2] , , , ,
2조(중부지역) : '''말라야 연방'''[3] , 캄보디아, 베트남 공화국[4] , , ,
3조(동부지역) : '''대한민국''', 필리핀, 중화민국, [5] ,
2000년대와 비교하면 없어진 나라도 있으며,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들도 참가가 가능했었다.
2.1. 1조
이 조에 포함된 모든 팀들이 기권하면서 이스라엘이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2.2. 2조
1라운드: 태국과 베트남 공화국은 부전승으로 1라운드를 통과,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말라야 연방과 캄보디아의 경기로 1라운드가 치러지게 됐지만, 싱가포르의 기권으로 인도네시아는 자동진출, 결국 제대로 치러진 경기는 말라야 연방과 캄보디아의 홈앤 어웨이 경기뿐이었다.
말라야 연방의 스트라이커 압둘 가니 미냐트는 1차전에서 무려 7골을 때려 박으며, 캄보디아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팡 시앙 혹이 두 골을 보탠 말라야 연방은 일찌감치 9-0으로 앞서갔고, 후반에서야 캄보디아는 투이, 레이스의 연속골로 따라붙기 시작했으나 경기를 뒤집기에는 너무나 많은 실점을 했다. 2차전에서 캄보디아가 3-2의 역전승을 거두지만 1차전의 대패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라야 연방이 11 - 5로 최종라운드에 진출하였다.
2라운드: 부전승으로 올라온 태국과 인도네시아, 역시 부전승으로 올라온 베트남 공화국과, 1라운드를 치르고 올라온 말라야 연방의 매치업이 성사됐지만, 태국의 기권으로 인도네시아는 최종 라운드 진출. 결국 2라운드도 말라야 연방과 베트남 공화국의 경기만 치러지게 되었다.
1차전 사이공에서 치러진 홈경기에서 베트남 공화국은 4-0의 대승을 거뒀고, 2차전에서도 베트남 공화국의 응옌 반 투의 선제골로 베트남 공화국은 앞서 나간다. 말라야 연방 역시 1라운드의 히어로 가니 미냐트가 후반 시작하자마자 한 골 따라붙었으며, 베트남 공화국 역시 쩐 반 누엉의 골로 도망갔다, 가니가 또 동점골을 터뜨렸고, 팡 시앙 혹이 83분경 역전골을 터뜨렸으나, 1차전 무득점 패배로 사실상 탈락은 확정되었다. 88분 쩐 반 누엉의 두 번째 골로 경기는 무승부. 베트남 공화국이 7 - 3으로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지만...
3라운드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공화국의 경기. 그러나 인도네시아 역시 기권으로 베트남 공화국이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2.3. 3조
1라운드
5팀밖에 없었기에 필리핀, 대한민국, 북보르네오는 2라운드로 바로 진출,
일본과 중화민국의 경기만 치러져야 했으나, 일본의 기권으로 중화민국이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
필리핀과 대한민국, 북보르네오와 중화민국의 대결로 이루어졌고,
북보르네오가 기권함에 따라 중화민국은 최종라운드로 진출했다.
대한민국은 단 1실점도 하지 않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5 - 0으로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최종 라운드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경기를 통해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4 - 1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스코어보드만 보면 무난히 이긴 걸로 보이지만, 중화민국은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팀이고, 이 대회 후 2년 뒤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딴 아시아의 강호였다.[6] 또한 이때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엄청난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는데 이는, 이야깃거리에서 후술.
3. 결승 리그
결승리그는 풀리그제로 치러졌다.
3.1. 제1경기 이스라엘 3 - 2 홍콩
1956년 9월 1일 19:00
예선을 전혀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한 이스라엘과 개최국 홍콩의 경기가 개막전으로 치러졌다.
개최국 홍콩이 12분경 아우치잉의 선제골로 앞서갔고, 이스라엘의 글레이저가 37분경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전반 종료. 아우치이인은 후반전에도 맹활약을 하며 66분에 대회 두 번째 골을 터트렸지만, 3분 뒤 스텔마치의 동점골이 터지고, 76분에 그라제르가 대회 2호 골을 성공시키며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아시안컵 첫 승리를 가져갔다.
3.2. 제2경기 대한민국 2 - 2 홍콩
1956년 9월 6일 19:00
1경기로부터 무려 5일 뒤에 2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이유는 대한민국이 재정상황으로 출국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깃거리에서 후술. 9월 6일 8:00에 간신히 도착해서 같은 날 19:00에 경기를 치르는 살인적인 일정 속에 대한민국은 첫 경기를 치르게 된다. 푹 쉰 홍콩은 첫 경기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10분경이 탕이킷의 선제골로 앞서가고, 39분 코포쿵의 골로 2-0으로 산뜻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내리고, 45분 김지성의 골에 이은, 62분 최광석의 골로 최악의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안컵 첫 승점을 얻게 되었다.
3.3. 제3경기 대한민국 2 - 1 이스라엘
1956년 9월 8일 19:00
무려 2일 뒤에 또다시 이스라엘과 경기를 치르게 된 대한민국. 반면 상대인 이스라엘은 이미 1승을 거두었고 무려 7일간의 휴식을 통해 완벽한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2경기의 큰 비로, 유니폼 물이 다빠져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현지 교민의 도움으로 빨간색 유니폼과 축구화에 번호를 대충 붙여서 착용하는 안습한 행보를 보였다. 이스라엘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이스라엘은 너무 쉬었던게 독이 된 건지, 경기력이 좋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52분 우상권의 골과 성낙운의 추가골로 순식간에 2-0으로 앞서갔다. 대한민국은 스텔마치의 한 골로 따라붙은 이스라엘을 제치고, 승점 3점으로 1위에 등극한다.
3.4. 제4경기 베트남 공화국 2 - 2 홍콩
1956년 9월 9일 19:00
개최국 홍콩의 마지막 경기. 3만 명의 홈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했던 홍콩과, 대회 첫 경기를 치르는 베트남 공화국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쩐 반 통의 선제골이 먼저 터지며 홈팬들은 절망에 빠졌고, 추윙와가 대회 첫 PK를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따라붙었지만, 레 후이 득이 또다시 홈팬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추가골을 터뜨리며 앞서나갔다. 라우치람이 간신히 동점골을 만들었지만, 그대로 경기는 끝났고, 홍콩은 승점 2점으로 대회를 마무리 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이미 승점 3점이었기 때문에, 우승은 실패.
3.5. 제5경기 이스라엘 2 - 1 베트남 공화국
1956년 9월 12일 19:00
승점 2점의 이스라엘로서는, 이 경기를 반드시 잡고, 베트남 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이기거나 무승부를 해주길 바라며 마지막 경기를 시작했다. 개최국의 경기가 끝난지라 관중 수는 절반인 15,000명. 스탈라치가 대회 3호 골과 4호 골을 연속으로 기록하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화국의 쩐 반 통도 대회 2호 골을 넣었지만, 역부족. 이스라엘은 승점 4점을 거두며, 선두에 등극했다.
3.6. 제6경기 대한민국 5 - 3 베트남 공화국
1956년 9월 15일 19:00
당시 순위는
이스라엘 승점 4점
대한민국 승점 3점
홍콩 승점 2점.
베트남 공화국 승점 1점
대한민국은 이기면 승점 5점으로 우승, 비기면 승점 4점. 패배하면 승점 3점으로 3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은 이겨도 승점 3점으로 우승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대회 우승은 대한민국과 이스라엘로 좁혀지게 되었다.
살인적인 일정으로 두 경기를 치른 대한민국은 7일간의 귀중한 휴식을 가졌고, 베트남 공화국은 이겨도 우승이 물 건너간 상황이라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유리했다. 그러나 경기는 성낙운의 선취골에도 베트남 공화국은 물러서지 않고 짜이 반 다오의 동점골, 우상권이 PK득점에 성공했지만, 레 후이 득이 또 다시 따라오며 팽팽히 흘러갔다. 그러나 57분 최정민, 58분 우상권의 릴레이골로 베트남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63 레 후이 득이 또다시 골을 기록했지만, 3분 뒤 최정민이 또다시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의 승리로 경기는 마무리된다.
대한민국이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4. 결과
- 득점왕 : 나훔 스텔마치(1936~1999)(이스라엘) 4골
5. 이야깃거리
- 단순히 보면 대한민국 대표팀이 손쉽게 우승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매우 안습한 환경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한 대회였다. 중화민국과의 지역예선에서 1차전인 홈경기는 문제없이 치렀지만, 2차전을 치르러 중화민국의 수도 타이베이로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재정이 바닥이 나서 출국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현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와의 협상 끝에 외상 달고 원정길에 올라서 2-1의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문제는 저 외상값이랑, 본 대회인 홍콩행 비행깃값인데... 당초 중화민국과 9월 2일에 열렸던[7] 2차전이 끝난 2일 뒤인 9월 4일 친선경기를 연이어 치러서 이 수익금으로, 경비를 충당할 게획이었으나, 당일 비가 오는 바람에 경기가 취소되었다. 졸지에 중화민국에서 미아가 될 뻔한 대한민국팀이었으나, KNA와 다시 재협상 끝에 이번에도 외상 달고 홍콩으로 오게 되었으니, 이날은 9월 6일이었다. 대회 두 번째 경기이자 한국의 첫 경기가 치러지는 당일 도착했다. 오전 8시에 도착해서 숙소에 간신히 짐을 풀고 컨디션 조절할 것도 없이 오후 7시에 바로 경기를 스타트했기에 컨디션은 이미 상상 그 이상의 최하...[8]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팀 홍콩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며 역사적인 아시안컵 첫 승점을 거두게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 경기는... 48시간 뒤인 9월 8일에 열리게 되었다. 9월 2일~9월 8일까지 3경기를 치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48시간 만에 한 경기 더 치러야 하는 살인적인 일정에[9] , 상대는 우승을 다툴 강팀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9월 1일 첫 경기 이후 무려 7일이나 쉰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기에, 사실 이스라엘의 낙승으로 보였으나 놀랍게도 대한민국이 첫 승리를 따내며 우승을 향한 교두보를 쌓게 되었다. 이후 7일을 쉬며, 컨디션을 회복한 대표팀은 마지막 경기 베트남 공화국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우승을 하게 된 것이다.
-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스쿼드는 항목 참조
- 경기 일정이 상당히 독특한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동부지역 출장팀은 결정도 안 됐는데 이미 대회는 시작했고, 개최국이 초반에 3경기를 연달아 치르고, 베트남 공화국은 마지막 3경기를 연달아 하는 등, 초대 대회다 보니 행정적으로 미숙한 점도 보인다. 본래 각 지역예선 최종라운드가 대회 시작 즈음이었을 텐데, 서부지역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원 기권으로 예선 자체가 한 게임도 진행되지 않았고, 중부지역 역시 최종 라운드가 기권으로 진행되지 않다 보니 5월경에 치른 2라운드로 종료가 되었다. 동부지역만 최종라운드가 개최돼버리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출국이 늦어진 것. 물론 그렇다고 해도, 4경기에서 베트남 공화국이 첫 경기를 치른 건 현대축구대회 일정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덕분에 대한민국만 홀로 박싱데이를 치뤘다.
- 대한뉴스에서 1956년 AFC 아시안컵 동부 예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만전에서 2-0로 이긴 것을 보도한 적 있다.#
[1] 지금의 미얀마[2] 지금의 스리랑카[3] 지금의 말레이시아[4] 보통 월남이라 불렸던 남베트남[5] 보르네오 섬의 사바 주 지역으로, 이후 말레이시아로 합병[6] 물론 한국이 중화민국에 밀려 은메달을 연속 수상...[7] 하루 전날 이미 홍콩에서는 홍콩과 이스라엘이 본선 1차전을 치른 상황이다. 대회 초창기다 보니, 아직 본선 참가팀이 결정도 안 된 상황에서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8] 2년 전 스위스 월드컵은 그래도 2일 전에 도착했다.[9] 놀랍게도 프리미어 리그의 박싱데이 일정이 현대에도 이렇게 운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