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1. 개요
2009년 7월 5일부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로 최소 197명이 사망하고 1500여명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7월 5일 약 1천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중국 광동성 사오관시 공장에서 위구르인 두 명이 살해당한 일##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 격화되어 한족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우루무치 시는 위구르인 인구보다 한족 인구가 훨씬 많았고, 7월 7일부로 평소 위구르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족이 중심이 된 폭도 수백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위구르인들이 운영하는 점포들을 파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한족 폭도들로부터 위구르인 거주지를 방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공안에서는 해당 사건 사망자 197명이 대부분 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해외 위구르 민족운동 단체에서는 위구르인 사상자 수가 "실종"으로 계산돼서 축소, 은폐되었다 주장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해당 유혈 사태 관련하여 중국 공산당 측은 레비야 카디르 같은 일부 친일 인사들이 획책한 분열주의 폭동으로 규정했으나 해외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들은 해당 유혈사태가 외부 개입이 유도되지 않은 평화 시위에서 시작되었으며,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내 만연한 위구르인에 대한 차별 대우 및 경제 발전 성과 소외라고 지적하며 중국 공산당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게다가 당시 위구르인들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흔들며 시위했는데 이는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2. 원인
사오관시 내 한 장난감 공장에서 해고당한 한족 노동자 한 명이 앙심을 품고 해당 회사 내 위구르인 근로자 여섯 명이 한족 여성 두 명을 성폭행했다는 루머를 퍼트리고, 이를 사실로 오해한 한족 노동자들이 위구르인 노동자들에게 린치를 가해 위구르인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해당 사건에 관해 다룬 동아일보 기사, 조선일보 기사 등에서 시위에 근본적인 원인은 위구르족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속적인 차별 대우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당장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은 위구르족이 먼저 시작한게 아니라 한족 노동자들이 루머 때문에 위구르인을 공격해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위구르인들이 반발하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혈사태의 주된 공격자는 한족으로 반면에 위구르인들은 피해자로 한족의 폭행에 반발내지는 항의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3. 기타
2014년 7월에도 위구르인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반대하는 평화 시위가 야르칸드 근교 엘리스쿠(Elishqu)라는 마을에서 일어났으며, 7월 28일 중국 군경들이 평화 시위마저 유혈 진압하면서 98명이 사망하였다. 중국 공안은 시위 중 흥분한 사람들이 칼을 들고 경찰서를 공격해서 발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세계 위구르 회의 등 위구르 독립 운동 단체들은 해당 시위는 부녀자들이 주로 참여한 평화 시위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위구르인 사망자 수가 축소 발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같이 보기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 사태(한국어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