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원(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불명확한 신원
강진원은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 서면 운평리 당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 양반인 강대룡(姜大龍)이고, 모친은 경주 김씨다. 형제로는 큰형 강충원(姜忠遠), 둘째형 강효원(姜孝遠), 막내 동생 강진원(姜振遠)이 있었는데, 큰형 강충원이 부친의 큰형 강대유의 후손을 잇기 위한 양자로 입적되면서 강진원과 강충원은 족보상 사촌이 되었다.
강진원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현재까지도 명확하지 않다. 1981년에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에서 저술하여 횃불사에서 출간한 <강진원 의병장 약전>(이하 약전)에 따르면, 강진원은 1878년 3월 15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반면 <독립유공자 훈록>에는 1881년 7월 30일에 태어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그가 체포될 당시 신문 기사에는 42세로 기재되었고, 강진원의 제자 장영섭은 강진원이 체포될 때 41세였다고 증언했다. 또한 진주강씨 박사공파 족보엔 강진원이 1878년 3월 15일에 출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순천대학교 사학과 홍영기 교수의 논문 '강진원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에 따르면 강진원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강희열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주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희열은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일조한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14세 손인 반면 강진원은 고려 원종 대 국자감박사 박사공(博士公) 강계용(姜啓庸)의 26세손으로, 중시조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한편 일본측 자료에는 강진원을 강승우(姜勝宇), 강승지(姜承旨), 강여명(姜汝明), 강의연(姜義淵), 강형오(姜炯吾)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일본군의 추적으로부터 신원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가명들인 것으로 보인다.
2.2. 초년기
<약전>에 따르면, 강진원의 부친 강대룡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의학에도 능통하여 한때 한약국을 개설했지만 집 한칸 없이 곁방살이를 할 정도로 빈궁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부인 경주김씨와 어린 아들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강진원이 창의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취응록(取熊錄)'에 따르면, 강진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뒤 늙은 어머니를 받들고 아래로 연약한 아우를 거느리고 승주의 촌구석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으며, 겨우 글을 읽어 약간의 문장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같은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이웃 마을인 구만리 월곡서당에서 정삼산(鄭三山)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외가인 두모리 신기 마을로 옮겨 장경한(張敬漢) 댁에 서당을 개설하고 장경한의 아들 장영섭(張永燮)을 비롯한 십수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1] 그러다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강진원은 비분강개하여 1906년 전라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열린 유림대회에 참석했다. <약전>에 따르면, 이때 강진원은 최익현의 문인들과 시국에 대해 논의했고 통고문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그는 선뜻 의병에 나서는 걸 주저했다. 그러다가 1908년에 이르러 전라도 전역에서 의병 활동이 거세지자, 그는 마침내 의병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갑오년(1895년) 이래로 왜적이 창궐하여 나라 형세가 위급해지고 종사(宗社)가 무너지는 것을 통탄하였으며, 선조의 위대한 업적을 추모하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한 지가 여러 차례였다. 밤새도록 통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이제 의거를 일으킨 대강의 전말을 위와 같이 적는다.
취응록
2.3. 의병 활동
1908년 음력 6월, 강진원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김명거(金明巨), 김화삼(金化三), 권덕윤(權德允), 김병학(金柄學), 그리고 곡성 출신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대 지휘관을 맡았고, 선봉대장엔 김화삼, 수포대장(收砲隊長)에 김병학, 행군대장에 김명거, 모사 김양화, 서기 권덕윤 등으로 편성했다. 취응록에 따르면, 1908년 음력 8월 하순에 강진원의 의병군은 총 93명이었고 다음해 음력 4월 하순엔 23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강진원은 조계산을 근거지로 삼고 무기를 수리하고 의병을 모은 뒤 음력 7월에 인근에서 활동 중인 조규하 의병장과 합세한 후 음력 8월 4일 곡성군 석곡면 조지촌에서 일본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이 후 음력 8월 14일 곡성군 목사동면 평전촌에서 일본군 순사대 및 수비대와 교전했다가 조규하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의병들을 수습해 일본군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그는 순천, 곡성, 여수, 고흥, 광양, 구례와 전북 남원을 무대로 활동하며 순천 괴목장 전투, 과역시장 전투, 동복 운월치 전투, 쌍암 접치 전투, 쌍암 서정 전투, 남원 가정 전투, 곡성 압록과 동리사 전투 등 여러 전투를 치렀다. <약전>에 따르면, 강진원의 의병군은 주민들에게 어떠한 민폐를 끼치지 않을 만큼 군기가 잘 잡혀 있었고 주민들은 그런 그들을 적극 호응했다고 한다.
한편 강진원은 친일 세력을 제거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일본어 통역원, 헌병 보조원, 의병 밀고자, 세무 관리, 밀정 등을 처단했다 또한 주민들을 토색한 자, 군자금을 몰래 유용한 자, 의진을 이탈한 자, 무기를 뺴돌린 자 등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체포된 의병을 구하기 위해 헌병대나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아버지로부터 배운 의술을 발판으로 삼아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몸소 치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음력 6월 준순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 전투에서, 강진원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전 부대가 붕괴되는 참패를 맛보았다. 이때 생존한 의병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고, 강진원 역시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연내도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1909년 9월 일본군이 남한 대토벌 작전을 단행했을 때 연내도에 은신해 적의 추적을 회피했다.
2.4. 10년간의 도피
1909년 10월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 마무리되자, 강진원은 순천으로 돌아와 쌍암면 두모리에 위치한 오성산 동굴에 은신했다. 그는 은신하는 동안 남평 문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지만 1921년 여름 아내와 아들이 홍역을 앓다 동시에 사망하고 어린 딸만 남겨졌다. 그는 오성산 동굴에 은신하면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약전>에 따르면, 강진원은 제자들이 심경을 물을 때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는 한마디만 내뱉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10년간 동굴 속에 숨어지내며 일제의 추적을 회피했다.
2.5. 체포 및 사망
1921년 음력 7월 16일, 강진원은 10년만에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일보> 1921년 8월 31일자 기사에선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31일 기사에도 이와 유사한 기사가 실렸다.전라남도 순천군 서면 출생으로 목하 주소가 일정하지 못한 강형오, 통칭 강대장이라 하는 방금 34세된 청년은 일한합병 후부터 의병이라 하고 수배 수백명을 거느리고 전라남북도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헌병대와 수비대로부터 두어번이나 충돌하여 서로 총을 겨누고 돌아다니던 바 부하가 태반이나 귀순한 후에 5,6명의 동지를 부하로 두고 강도단을 조직하여 두어 번이나 활동하였다. 강대장은 그 자취가 신촐귀몰하여 용이하게 체포하지 못하던 바, 요사이 그 부하 한 명이 순천군 괴목경관 주재소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중에 자백했고, 그것에 의지하여 강대장이 순천군 쌍암면 두월리에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이에 괴목리 월등 두 주재소 일선인 순사 각 한 명씩 체포하기 위하여 쌍암주재소의 지원하에 일행 여섯 명이 지난 21일 밤 중에 잠자는 틈을 타서 일본이 순사 두 명은 문에서 파수를 보게 하고 또 일 순사 두 명과 조선인 순사 한 명은 문을 단속하고 좌등순사부장은 속문으로 돌아들어갔다. 강대장은 벌써 경관이 들어온 줄 알고 뒤문으로부터 도망하고자 했다. 좌등부장이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강대장은 길이가 다섯 치 되는 칼로 좌등부장의 바른편 졋통이를 길이가 일촌오푼이나 뒤는 중상을 입게 했으나, 좌등부장은 굽히지 않고 범인과 서로 격투를 벌였다. 강대장은 또다시 좌등부장의 등 뒤와 팔뚝과 손가락 등 여러 곳을 찔렀다.
좌등부장이 굴하지 않고 격투하는 중에 바깥문을 젓히고 있던 대평과 좌등 두 순사가 달려들어 포박하였고, 좌등부장은 즉시 순천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중이며 생명에는 아무 염려가 없을 듯하더라.
강진원의 제자 장영섭은 훗날 민족문화협회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왕시의 의병두목 강형오 등 체포. 순사 한 명은 부상.
전라남도 순천군 출생으로 각처에서 강대장이라는 이름을 듣는 강형오(42)는 일한병합이 된 후 의병이라 칭하고 수하 수백명을 거느리고 전라남북도 각 지방에서 헌병 수비대와 여러번 교전하여 부하 대부분은 임의 체포 처분되고 5,6명의 부하로 강도단을 조직하여 가지고 돌아다니며 강도살인을 했다. 순천헌병대에서 여러번 그의 있는 곳을 탐지하였으나 강형오는 신촐귀몰한 행동으로 잡히지 않았다.
금번에 그의 부하 한 명이 순천군 괴목경찰관주재소에 체포되었고 그의 자백으로 강대장이 지금 순천군 쌍암면 두월리에 있는 줄 알고 괴목주재소에서 협력하여 순사 여섯 명이 출장해 장시간 동안 격투한 후 체포하였다. 체포할 때에 좌등 순사는 강형오의 칼에 찔러 중상을 당했다더라.
그러나 진주강씨 박사공파 족보에 따르면, 강진원은 1921년 음력 7월 16일에 체포되어 일본군 헌병부대에 이송되었고 모진 고문으로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음력 7월 19일 자신의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일본 헌병들이 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의병 활동에 관한 자백서를 적을 것을 강요받았지만, 강진원은 끝까지 비밀을 지키다가 음력 12월 29일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 헌병부대는 친가에 강진원이 이날 옥사했음을 알렸고, 그것이 족보에 그대로 기재되었다고 한다.강장군은 신유년(1921년) 음력 7월 16일 밤 승주군 쌍암면 두모리 자택(장영섭의 사랑방)에서 일본 헌병대장 좌등이 이끄는 수십여 명의 대원에 체포되었는데, 그 순간 대장 좌등을 난자해서 중상을 가하고 대원들 2~3명을 죽였습니다. 이후 쌍암변참소를 경유, 순천 헌병본부로 압송되어가던 도중 서면 산정 앞 노상에 이르렀을 때 헌병본부에 가면 고문이 심해 의병 조직체계를 탄로시킬까봐 스스로 자기 혀를 끊고 본부로 송치되었는데, 그로부터 3일 후에 순천헌병청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강대장 나이가 향년 41세가 되었지요.
강진원 의병장 약전
<약전>에 따르면, 순천의 유학자 남파(南波) 김효찬(金孝燦)이 강진원의 시신이 헌병대 앞에 방치된 것을 보고 그의 제사를 지내주려 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 헌병대에서 "무엇 때문에 폭도 대장의 제사를 지내려고 하느냐"고 힐난하자, 김효찬이 대답했다.
결국 일본 헌병들이 인부들을 동원하여 강진원의 시신을 삼산동 동천 건너 호랑이골짜기 부근에 매장했지만 후에 분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현재 강진원이 묻힌 장소는 알려진 바 없다.이 사람이 당신네들을 얼마나 괴롭혔는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당신들을 괴롭힐 터이니 이 사람의 혼백을 모시어 달래주어야 할 것 아니냐.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진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