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사
1. 개요
경학사(耕学社)는 1907년 결성된 국내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가 1911년 4월 남만주 삼원보에 세운 독립운동 교육기관이다. 부설기관으로는 신흥강습소 (이후 신흥무관학교)가 있다. 이후 부민단으로, 또 한족회로 계승된다.
2. 설립 과정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1] 에서 비밀 회의를 열었다. [2]
신민회는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해 양기탁, 안태국, 김구, 이승훈 등 13도의 책임자를 선정해 군자금을 모으고,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강유순 등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의 기지로 적합한 곳을 찾도록 하였다.
이에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김창환, 이동녕, 여준, 이탁 등 100여 명이 일가족들과 이주하여 삼원보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1년 4월 요령성 유하현의 삼원보 고산자에서 300여 명이 노천군중대회를 열어서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5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사장 이철영, 부사장 이상룡, 서무는 김동삼과 이원일, 학무는 이광과 여준, 재무는 이휘림과 김자순, 조사 황만영, 조직은 주진수와 김창무, 외무 송덕규 등을 선임하여 경학사가 발족하였다.
이들은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과 교육구국론의 영향을 받아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3]
3. 해산
설립 1년 여 동안은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운영되기는 하였으나 1912년과 1913년에 걸쳐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이때 중국 정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토지매매와 왕래를 차단하는 등 탄압을 가해 결국 해산되었다.
4. 그 이후
1914년 이회영과 이상룡 등이 조직한 부민단에 인계되어 3년간 다시 명맥이 유지되었다. [4]
3.1운동 이후 한족회로 개편된 부민단은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의 명칭을 바꾸어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