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
1. 중구(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이철영
이철영은 1863년 10월 16일 한성부 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생으로 이회영, 이시영을 두었고,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09년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그는 봉천성 유하현에서 거주했다. 1911년 삼원보에 한족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으며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생업지도(生業指導) 등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후의 독립운동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1925년 3월 18일 유하현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이철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공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철영
이철영은 186년 3월 17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에서 부친 이홍제(李弘濟)와 모친 상산 박씨 박용원(朴龍遠)의 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대원(柳大源)의 문인이 되어 한학을 공부했고, 1904년 일본인들이 철도 공사를 하던 중 공주에 있는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陳情書)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해 철도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리고1905년에는 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기의려문(起義旅文)’이라는 항의문을 지어 조정과 일본에 보내 항의했다. 그는 기의려문에서 “을사늑약은 법적 형식이 결여된 불법적인 조약으로 을사 적이 여기에 찬성하여 맺어진 것으로, 백성들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것이며, 합법성을 의미하는 조약이 아닌 늑약인데다 불법과 강제성을 띠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 정부에 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를 보내 "조선의 귀신이 될 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로 인하여 그는 수차에 걸쳐 일경의 취조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19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아야 했고, 한번은 일제가 추진하는 민적에 등록하길 거부해 69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이렇듯 빈번히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그는 결국 1919년 12월 6일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철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북청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철영
이철영은 1919년 8월 14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신북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에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7포병부대에 강제입대 당하였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학병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47포병부대 소속으로 학병 항쟁에 참가한 그는 42부대의 학병동지들과 모의를 갖고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의거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내 각부대의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학병조직의 제2지대를 지휘하였다. 학병항쟁의 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학병의거를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金完龍)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군 헌병대에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2009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이철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