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1. 개요
이회영, 이동녕 등이 1911년 6월 10일 만주 삼원보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발전한 것으로, 신흥무관학교로서 정식 개교한 것은 1919년 5월 3일이다. 사실상 만주, 간도 일대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곳으로, 이들은 다수가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각지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산리 전투로 신흥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명 정도 되었다고 하며,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이곳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1920년, 일본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이자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21년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교하현)으로 옮겼다. 해방 이후에는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을 이어받아 국내에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한다. 신흥전문학원은 이후 전문학교에서 대학기관으로 승격되어 성재학원 신흥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나, 6.25 전쟁을 거치며 경영난을 겪게 되고,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인수한 뒤,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2. 연혁[3]
2.1. 신민회의 설립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2.2. 이회영 일가의 만주 망명, 경학사 설립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
2.3. 신흥강습소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2.4.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2.4.1. 쏘배차의 백서농장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 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2.5. 고산자(孤山子)로의 본교 이전
1919년에는 3·1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교세를 확장했다.
2.6. 청산리 대첩 참전과 일제의 강제 폐교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도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며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만주의 봉천군벌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또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20년 이후 상해임정이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현재 교하현)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대황지(현재 남강자)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영안현 신안촌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 나갔다.
2.7. 해방 후 재개교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해방이 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9년 신흥초급대학으로 가인가 받을 때의 설립내역이 공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초급대학 시절에는 신흥전문학원 시절 학과들을 주간에 4년제의 체육학부, 야간에 2년제 과정의 외국어학부와 전문부(專門部)로 개편하였는데, 전문부에서는 1회 졸업생(1949년), 2회 졸업생(1950년)을 성공적으로 배출했다고 한다.[6] 체육학부에 체육과, 외국어학부에 위의 외국어 6과, 전문부에는 법과와 정경과가 있었다. 참고 다만,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화로 모집생 수를 줄이게 되는데, 1949년에는 총 1080명[7] 으로, 한국전쟁 후인 1950년에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150명[8] 만 모집하게 되었다.설 립 내 역
1. 명 칭 : 신흥대학(新興大學)
2.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2
3. 개교년월일 : 단기 4282년 2월 15일
4. 설립자 : 이시영(李始榮)
5. 설립연혁 : 단기 4282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성립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한 고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신흥대학을 유지 경영함.
6. 설립당시학과개요 :
(1) 법과, (2) 정경과, (3) 영어과, (4) 중어과, (5) 독어과, (6) 불어과, (7) 서반아어과,
(8).노어과, (9) 체육과
7. 참고사항 :
부산피난 당시 문교부에 제출된 학교 현황에 의하면 위의 사실외에 아래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학장 : 이윤영(李允榮)
현항개요 : 시설학과및 학생정원
(1) 법률학과 240명,
(2) 정치학과 240명,
(3) 문학과 160명,
(4) 체육과 160명, 교원수 71명
당연하지만 이 당시 학교측에서 밝힌 학교의 공식적인 창립일은 단기 4244년 6월 10일, 즉 1911년 6월 10일. 바로 신흥강습소의 개교일이다. #
여기서 외국어 학과가 지나치게 많은 점이 주목할 만한데, 이것은 1947년 9월 1일 서울 아현동에 설립된 최초의 외국어 전문학교인 동양외국어전문학원(동양외전)을 신흥초급대학이 1950년 인수하여 해당 외국어 6과의 편제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외국어 학과들은 개편을 통해 문학과로 이어지게 되며, 기존 전문부의 법학과(법과), 정치학과(정경과)와 체육학부의 체육과까지 4개 학과 체제가 성립된 이후 조영식 박사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다.[9] 아래는 이회영 기념관에서 제공하는 관련 자료이다.
1949년 7월 18일 :
전문부에서 제1회 졸업생 205명 배출
(법과 134명,정경과 71명)
1950년 5월 6일 :
전문부에서 제2회 졸업생 189명 배출
(법과 97명,정경과 92명)
2.8. 조영식의 인수 과정과 그 이후
추가예정
3. 역대 교장
- 1대 이철영 · 이동녕 신흥강습소장 (1911~1912)
- 2대 이상룡 신흥강습소장 (1912~1913)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경학사 사장, 한족회 회장, 정의부 독판 역임
- 3대 여준 (1913~?) : 부민단장, 서로군정서 부독판, 검성중학원 교장 역임
- 4대 이광 (?~1919)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북경주재외무위원, 해방 후 체신부 장관, 충부기사 역임
- 5대 이세영 (1919~1920) : 주만통군부 군사부장,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3.1. 재개교 이후
- 1대 이규창[10] 신흥전문학원장 · 신흥대학 초대 학장 (1947~1952) : 신흥 1기, 순국의열사봉건회 기금관리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감찰위원 부위원장[11]
- 2대 김인선 학장 (1952.3~1952.5) : 대한국민당(자유당의 전신) 소속 제2대 국회의원 (제주 북제주 갑), 대동청년단 제주도단 단장 [12]
- 3대 이윤영 학장 (1952.5~1953.3) : 평양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부당수[13] , 제헌 국회의원 (서울 종로 갑), 초대내각 무임소장관, 2대 사회부장관, 1952년 국무총리 서리 역임, 1953년 3월 성재학원에서 이년재(李年宰) 이사장과 함께 이사직 해임.[14]
- 학장 대리 조영식 (1953.3~1954.5) : 이년재와 이윤영이 이사장직과 학장직을 각각 내놓은 이후, 조영식이 "이사장과 학장 대리직을 싫거나 좋거나 다시 겸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15][16]
- 4대 조영식 학장 (1954.5~1955.2) : 신흥대학 부학장[17] (1953.9~1954.5), 공화민정회(자유당의 전신) 조사국장·사무국 차장 겸 법제사법 전문위원 역임.
4. 교과과정
학제는 본과와 특별과(군사과)를 두었다. 본과는 중학교육을 실시하고, 특별과는 속성과로서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반 중등과정은 군사교육과 교양교육이 병행되었으며 총 3년 과정이었다. 군사과는 1년 과정으로 군사교육이 중심이었다. 또한,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이들은 대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1913년 합니하 교사 완공과 함께 4년제 본과, 6개월의 장교반, 3개월의 하사관반, 1개월의 특수훈련반의 체계로 구성하였다. 본과는 3년 중등교육과 1년 군사교육을 합쳐 4년으로 구성되었고, 이후 각각 장교와 하사관으로 진로를 택할 수 있었다.
1919년에 고산자로 옮기면서, 기존 중학교육 과정은 다른 학교에 위임하고 군사과정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이 때, 이름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한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졸업생은 적어도 2년간은 학교의 명령에 따라 복무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여담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야간에 비상훈련도 실시하고 취침중 비상나팔로 완전무장을 해야하는 임전태세도 가르쳤다고 한다.
4.1. 학과
군사교육의 교과과정에 해당하는데, 주요 커리큘럼은
- 보병
- 기병
- 포병
- 공병
- 치중(輜重)
그 외에 내무령, 측량학, 축성학, 육군형법, 징발령, 위술복무, 구급의료, 편제학, 훈련교범, 전술, 전략학 등이 있었는데, 이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과과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이를 잇는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4.2. 일반교과
본과 중학교육의 교과과정이다.
등의 인문교육과
등 이학(理學) 교육, 그리고
의 예체능 교육까지 다양한 교과과정을 제공하였다.
이는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의 쟁취 뿐만 아니라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광복 이후 등용되는 정부 인사 중에도 신흥무관 출신이 몇몇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변영태 前 국무총리.
여담으로, 보통 오전에는 일반교과를, 오후에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4.3. 술과(術科)
연병장에서 각개교련과 기초훈련을 했고, 야외에서는 이 고지에서 저 고지로 가상적에게 공격전과 방어전등 전쟁연습을 실시.
4.4. 체육과
야간도강[18] , 통화현 70리 강행군, 빙상운동, 춘추대운동, 격검, 유도, 축구, 철봉 등.
5. 교가
조지아 행진곡의 개사곡이다. 이 교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하나 있는데, 이 교가가 폐교 후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같은 곡조의 독립군가로 개사되어 불렸다는 점이다. 즉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독립군가 가사의 원형을 제공'''한 셈. 상세 내용은 독립군가 문서 참조.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의 / 여러 만만 헌원자손[19]
업어기르고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 젖먹여 기른 이 뉘뇨
/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 좔좔좔 결치며 돈다
2절
은 /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온다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떴다
6. 후신들
그야말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시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는 1910년 경술국치의 거의 직후부터 국외에서 투쟁하여 당시 한반도의 상황에 비해 탄압이 적어 세를 키울 수 있었고, 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라는 점 또한 많은 학생 및 독립운동가를 모집하기에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경학사를 위시한 신흥무관학교가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자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후신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아예 직접적으로 유관한 단체들[22] 만 따져도 정의부, 조선의용대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절반 정도가 그 후신에 해당할 정도이다. 이보다는 약하게 연결된 단체들[23] 중에 하나는 자그마치 현재 우리 정부의 법통이자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겠으며 실제 임정 산하 무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뻗어나간 곳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수백 명의 졸업생들이 김좌진 장군의 남로 군정서에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으며, 김원봉, 나석주 등이 의열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주요 단체들만 열거해도 대한독립군단, 한국 독립군, 신민부, 고려혁명군, 주만통군부 등등 무수히 많으며 이들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광복 이전까지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신흥무관학교를 직접적으로 잇는 단체는 기능과 역할 면에서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기관 측면에서의 후신이자 '''가장 직접적인 후신'''은 '''경희대학교'''이다.[24] 해방 후 원 설립자 이시영이 1947년에 "신흥전문학원"이라는 학술 전문대학으로 재개교하여,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직접 승계하였다. 신흥전문학원은 당시 문교부의 승인으로 1949년 초급대학인 신흥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이후 1951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자금난으로 조영식 전 경희대 총장이 부채를 떠앉는 조건으로 인수하도록 하였다. 이후 신흥대학은 1955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고 1960년 '신흥'이라는 명칭이 속되다는 안습한 이유로(...) 경희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초급대학 이전 역사는 사라진다.[25] 그러나 많은 졸업생들이 경희총민주동문회를 구성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이을 것을 학교에 요구하는 등 연혁 회복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으며, 최근에도 경희대 학우들이 교내에 신흥사(史) 복원 청구 대자보를 게재하는 등 재단과 졸업생 및 신흥무관학교 기념회 간의 연혁 논란은 100년이 남짓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경희대는 왜 신흥무관학교 흔적과 뿌리를 없앴을까 최근 이에 대해서 2018년 이후로 경희대학교 학내에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한 의제의 공론화가 많이 이루어졌고, 재학생 대표기관인 총학생회와, 졸업생 대표기관인 총동문회가 서로 만나 신흥무관학교를 경희대학교의 역사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경희역사 교육을 위한 협약식을 체결하였다. 경희대 재학생·졸업생들이 ‘신흥무관학교’ 이름으로 뭉친 이유는? 이후 이들 단체들은 경희대가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특강 개최, 경희역사연구소 건립 등을 추진하는 등 경희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연결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군사학교로써의 측면은 '''육군사관학교'''를 후신 단체로 볼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의 후신 격인 학교였다. 실제로 육군무관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강제폐교 이후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무관학교로 이어졌고, 다시 이 학교는 문을 닫게 되지만 무관학교의 줄기는 계속 이어져왔다. 광복 이후, 미군정 산하의 군사학교로써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1946년 5월 1일 개교하게 되는데, 임시정부 요인 및 다수의 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그 적통성을 이어가려 했다. 이는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되는데, 육사는 최근까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이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례적으로 육사의 뿌리찾기를 실시하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육사의 공식적인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육사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 70년만에 육사 찾은 독립운동 후손들 물론 육군사관학교의 건립에는 많은 일본 군관학교 출신들이 들어갔으며, 역사성을 고려하면 직접적인 후신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적 연결성과 계승되는 의식이 희미한데도 억지로 잇고자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범위를 확장하면, 기관 및 단체의 측면에서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육군'''을 후신으로 볼 수도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재단 격인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군기관인 군정부(軍政府)는 임시정부 출범 이후 임시정부 산하기관인 서로 군정서로 개편되며, 이는 다년 간의 이합집산을 거쳐 다시 참의부(육군주만참의부)로 개편된다. 한족회 자체 역시 여러 번의 개편을 통해 조선의용대의 성립으로 이어지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에 조선의용대가 다시 합류하게 된다. 따라서 중추기관의 측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군 등 군기관의 측면에서는 한국 광복군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된다. 이후 광복을 맞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데,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임을 대한민국 헌법 등에 명기하였고 군기관인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한국 광복군을 계승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만약 신흥무관학교의 운영 주체, 즉 재단의 역사 역시 포함시킨다면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된 단체인 신민회는 구한말 항일 단체 최초로 민주공화제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고, 이것이 경학사·신흥무관학교를 위시한 간도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거쳐 그 소속 인물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으니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의 연관관계는 단순히 독립운동 단체들의 이합집산에 따른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의 직접적인 역사적·사상적 연원이 되는 적통이라 할 만하다. 육사를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이라고 끼워맞추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7. 출신 인물
- 이규창 - 신흥전문학원장 · 신흥대학 학장, 순국의열사봉건회 기금관리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감찰위원 부위원장, 이시영의 장남 (신흥 1기, 1911년 졸업)
- 변영태 - 제5대 국무총리 (신흥 1기, 특과[26] , 1912년 졸업)
- 채찬 - 이명 백광운. 대한통의부 중대장, 사이토 총독 습격 시도 (군사과, 입학 및 졸업년도 미수)
- 나석주 - 의열단 단원,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 의거 (1917년 졸업)
- 이규동 - 대한혁명군 복무, 만주에 후신 학교인 신창학교 설립 (1915년 졸업)
- 문창숙 - 참의부 중대장. 국내 잠입 작전 도중 순국 (군사과, 1919년 졸업)
- 권준 - 조선의용대 비서장 (군사과, 1919년 졸업)
- 오광선 - 서로 군정서 중대장, 대한독립군단 대대장, 오희옥 애국지사의 부친. (군사과, 1919년 졸업)
- 김원봉 -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 다수의 독립 운동 조직 수립에 참여한 대표적 독립운동가. (군사과, 1919년 입학, 수학 중 자퇴)
- 김산 - 본명 장지락. 시인, 사상가, 자서전《아리랑》의 주인공 (속성과(하사관반)[27] , 1920년 졸업)
- 신한승 - 태껸 인간문화재 제1호, 태껸 무형 문화재 지정 공헌. (신흥대학 1기, 체육학과, 1951년 졸업)
- 김좌진 - 대한독립군 소장,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청산리 전투 지휘관 (교관)[28]
- 지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교관)
- 이범석 - 초대 국무총리 (교관)
- 신팔균 - 대한통의부 총사령관 (교관)
- 김도태 - 교육인. 오산학교 등 근무 (교관)
- 이건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 이석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가산 처분으로 유명한 분.
- 이철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교장으로 재직함.
- 이회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항일구국연맹 의장
- 이시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광복 이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당선. "신흥전문학원" 재개교 설립자.
- 이호영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북경에서 독립 운동을 이어감.
- 이동녕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임시정부 국무령 · 주석에 재임.
- 이상룡 -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한족회 총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임시정부 3대 국무령에 재임.
다른 신흥무관학교 출신, 혹은 관련자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7.1. 가상 인물
- 속사포 (조진웅 扮) - 영화 암살 등장. 본명 추상옥.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 내 암살 작전[29] 도중 순국 (1920년 졸업)
- 동규 (지창욱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경술국치에 자결한 유생의 아들로 등장.
- 팔도 (강하늘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이회영이 거둬 키운 아이로 등장.
- 나팔 (이태은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대한제국군 해산 당시 홍범도 부대 주둔지에 거주하던 아이로 등장.
- 혜란 (임찬민, 신혜지 扮) -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등장. 마적단이 데려다 키운 조선 아이로 등장.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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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등장 인물인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나왔는데, 속사포 역을 맡았던 배우 조진웅 씨가 신흥무관학교를 널리 알린 점을 감사하는 의미로 신흥무관학교 기념 사업회 측에서 홍보 대사로 위촉하였다.[30]
명당(영화)에서 맨 마지막 장면에 쿠키처럼 언급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