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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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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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4대 주석
김구
金九 | Kim Gu'''
'''출생'''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1]
(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2]
'''사망'''
1949년 6월 26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본관'''
안동 김씨(구 안동)[3]
'''별칭'''
'''자(字):''' 연하(蓮下), 창암(昌巖)
'''호(號):''' 백범(白凡)[4]
'''가명:'''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 창암·창수·구(龜)
'''신체'''
180cm[5]
'''직업'''
정치가, 독립운동가
'''재임'''
제9·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제18·19·2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정당'''

'''종교'''
천도교(동학)불교(법명: 원종)개신교(감리회)[6]
'''가족'''
조부 김만묵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아내 최여옥, 아내 최준례
장남 김인, 차남 김신
장녀 김씨, 차녀 김화경, 삼녀 김은경
'''이념'''
민족주의, 반공주의
'''양심건국'''[7]
1. 개요
3. 사상
3.1. 종교
4. 외모에 대한 묘사
6. 대안교과서 테러 언급 논란
7. 가족 관계
8. 선거 이력
9. 대중매체에서
9.1. 개괄
9.2. 단독 작품
9.3. 담당 배우/캐릭터로서
10. 관련 단체
11. 여담
12. 관련 자료
1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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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은! 우리 전 민족이 세계 무대로 발을 들여놓는 그런 시기를 당했습니다.[* 여기에서의 '당하다'는 '해를 입거나 놀림을 받다.'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때나 형편에 이르거나 처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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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15일 연설

한국독립운동가, 정치인.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7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진영 가리지 않고 김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존경받고 있다는 것. 실제 그를 높이는 표현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8] '통일 조국의 문지기가 돼 뜰을 쓸고 창을 닦아주고 싶다'는 연설이나 백범일기 등의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무력이 아닌 문화다(일명 문화강국론)'[9], '내 나라가 식민 지배 당한 아픔을 알기에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길 원치 않는다' 등 그가 남긴 명언들도 지금까지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부정적인 행적들도 제법 밝혀지기 시작했다. 일본인 상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이나, 안창호 계열 국민당원 옥관빈 피살사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립 피살 사건, 해방 정국 당시 정적들을 향한 백색테러 의혹, 해방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활동 당시 친일파가 많았던 한국민주당쪽으로부터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받은 것 등이 그 예다.[10] 사실 이는 맹목적 민족주의가 퇴조하면서[11] 독립운동의 거두였던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미화에 대한 반론도 제법 많아진 덕분이기도 하다. 사실 개방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선 오히려 바람직한 방향일지도.
아무튼 간에 이런 논란과는 별개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건 확실하다. 이름 있는 정치인이자 비극적인 죽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활동, 해방 후에는 반공 활동 및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

2. 일생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안동 김씨(구 안동) 익원공파로 약 300년 전 김자점 이후 몰락해 어려운 가운데도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시험에 떨어졌고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사라졌다.[12] 김구는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九)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반기를 이끌던 지도자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가 모두 이탈, 독자세력화 하면서 규모와 정통성이 공히 크게 약화된 임정을 이끌었고, 과감한 항일 활동으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해방 이후에는 귀국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13] 등과 대립하였으며,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14]과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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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세한 행적은 김구/일생 문서 참조.

3. 사상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16]

[17]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일반적으로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18]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내 나이 73세,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아래에서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中

해방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 김구는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다.[19] 김구의 정치 노선은 '''좌우합작운동 전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 좌우합작운동 전인 일제강점기 당시 김구는 김립 피살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굉장히 경계했고,[20] 광복 후에도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도우파들과는 달리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등 철저하게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활동하였다.[21]
다만 남한 지역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반탁운동을 이끈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한 후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좌우합작 7원칙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며 지지하고 나섰고, 좌우합작이 결렬되자 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한마디로 좌우합작운동 이후 김구는 오히려 김규식과 다를 바 없는 중도우파 비슷한 컨셉으로 활동한 것이다. 결론은 김구를 극우파 또는 중도우파로 명백하게 콕 집어서 분류할 수는 없고,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타협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할 순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김구는 소련을 추종해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당 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걍 다 부정적으로 본 것. 김구는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민족을 떠나 노동자끼리 뭉친다는 식의 사회주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면모가 보이는 부분.
또한 해방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중국에서 임정에 합류한 사회주의 세력과 별개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국내 사회주의 세력들은 그들과 접점이 닿지 않는 임정봉대에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들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 세력과 합작해 배척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다른 독립운동세력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임시정부의 법통만을 내세우는 김구를 극딜하기도 했다.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허헌[22]

한편, 이승만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23]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탄핵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군기원과 함께, 이승만의 사퇴 전까지 사용되었다.

3.1. 종교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위키백과에서는 김구의 종교를 동학 -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감리회)로 나열하여 개종을 2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외에도 임종 시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고, 해방 직후 전재동포 구호 사업으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원불교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교류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불교의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한 기록이 있는 등,[24] 국민지도자로서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자 했다.
한편, 그가 생애 마지막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그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임종세례 및 조건부세례 전통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가 사회적 시선에 의할 때에도 천주교로 개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확인되는 사실은 김구가 암살 사건 당일 절명을 전후하여 천주교식 세례성사종부성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생전에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김구는 당시 며느리 안미생과 명동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했다고 하며,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명동성모병원장 박병래 신부는 곧바로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다고 하고,[25] 사망이 확인된 뒤에는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26]
그런데 당일 김구의 비서 선우진이 암살범 안두희를 김구의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안내 후 2~3분이 채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며,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인 박동엽(독립운동가이자 대광고 교장)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 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김구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따라서 영세 당시 김구가 생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김구에게 암살 당일 세례를 준 것이 본인의 진의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백범이 과거 입교 의사를 밝혔다”는 관련자의 증언 뿐이다.
김구가 받은 세례는 임종세례이자 조건부세례인데,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며 이때 영세자의 의식을 확인할 수 없거나 의사의 사망선고가 있었더라도 “영세자가 영세를 원하였던 것이 분명하고 아직 완전히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조건으로” 세례를 준다. 즉 세례가 유효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27] 이와 관련하여 과연 김구가 생전에 천주교 영세를 원했느냐가 문제되는데, 김구가 명동성모병원 입원시 천주교 입교를 언약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증언을 교차 검증할 자료는 없고, 그가 생전에 성당에 출석했다는 자료도 없다. 노기남 대주교의 기념 화보집에 한국 천주교회 주요 행사에 김구가 배석한 모습이 등장한 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천주교계와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친분과 개종은 분명 다른 문제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로 현재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3대 종교지도자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 한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써 1940년대 한국 정계의 중심이였고 그런 그가 천주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그가 천주교 입교의지가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다만, 암살 사건 직후 다른 곳도 아닌 명동성당에 곧바로 피살 소식이 알려지고, 천주교 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백범의 주거지에 찾아가 사후 예식을 순조롭게 거행한 것을 보면, 백범의 생전 입교 의사표시나 이에 대한 유족들의 용인이 아예 없었다고 성급히 단정하기는 또 어려운 측면도 있다.
정리하자면, 백범이 암살 사건 직후 천주교 임종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나, 이 때에는 총격으로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세례를 주는 것이 천주교의 종교적 전통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다만 그러한 전통은 그런 방식으로 영세한 사람을 천주교회 밖에서 볼 때에도 사회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로 분류할 수 있는지와는 별개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백범의 천주교 개종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보아 본 문서에서도 위키백과와 같이 그의 최종 종교를 개신교로 기술한다.
백범이 생애 대부분을 개신교인으로 살았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2004)에는 사망 전 천주교 영세를 받은 내용은 없으나,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한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 ≪마의상서≫를 석달 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 게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9세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접주가 되어 700여 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 이후 도피 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인 감리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 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 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 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 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 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28]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할 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이때 혼인예식은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뤘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 이후부터의 삶 대부분은 개신교인이었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29]

4. 외모에 대한 묘사


외모만 봐서는 말년의 한복 입은 온화한 지식인의 이미지가 강하고 앞으로 조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등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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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보다 1살 많은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 국내정진군 OSS소속 도노번 미 육군 소장 옆에 서도 꿀리지 않는 큰 체격을 자랑한다.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왼쪽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학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체격 또한 생각보다 큰 편이다. 키가 180cm 전후로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기준으로 봐도 장신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위에 나오는 김구는 70대였다. 칠순임에도 백범은 180cm에 달하는 신장이었다. 이로 보아 20~30대 때의 김구는 못해도 182~3cm 정도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동학 당시 거친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이었음에도 접주 역할을 했다는 점, 치하포 사건 당시 성인 남성을 제압하여 살해했을 정도였음을 보면 체격만큼 완력도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승만과 비교하면 김구가 머리 반 개는 더 큰 위의 짤이 약간 퍼져있는 편인데 이는 구도상의 왜곡 문제로 실제로는 저정도 차이까지는 아니다. 위 짤에서는 이승만의 키가 거의 김구의 눈 언저리지만 같이 찍은 다른 정면 사진을 보면 이마에는 닿아았다. 손기정과 찍은 사진을 봐도 대충 이마 언저리인데 손기정과 이승만의 키가 같다.
이승만의 키는 당시 남성 평균보다 약간 큰 편인 약 165cm 정도로 알려졌는데, 사진 속 이승만과 비교해 보면 김구는 180을 훌쩍 넘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언급하였듯 살짝 왜곡된 구도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작을 것이다. 위에 업로드된 다른 사진인 지청천의 키는 178cm라고 하니 대략 180cm 정도인 게 맞아 보인다. 180 정도의 키는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지만 대략 1950-60년대 20대 남성 평균키가 163cm 정도고 현재 20대 남성 평균키가 174cm이니 170인 이승만만 보더라도 요즘 기준으로 181cm 쯤인 셈이다. 그런 키보다 10cm 정도 더 크니 체감상 지금으로 따지자면 190 정도 된다. 젊은 시절의 투쟁 활동은 이러한 큰 체격이 뒷받침해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청년기를 그린 영화 대장 김창수의 김구 배역을 조진웅이 맡았으며 그 또한 180을 훌쩍 넘는 체구의 소유자이다.
복장 자체의 경우 노년기의 동그란 안경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 잘 알려져 있지만 양복 차림의 모습도 많이 남아 있다. 초창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을 보면 안경을 쓰지 않고 카이저 수염을 기른 모습도 있다.
노년기의 이미지와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김구 역의 연기자들이 대부분 굵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 김구의 목소리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이나 대화할 때의 육성을 들어보면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이다. 느릿느릿 차분하게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면서 논리와 감성에 모두 호소하는 연설 스타일. 1946년 광복 1주년 행사 때의 연설 영상, 연설 영상 2. 연설 영상 3

5. 평가




6. 대안교과서 테러 언급 논란


김구는 일본 상인을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29쪽

2008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31]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서술되었는 데 이 내용이 알려지자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다니!"라면서 여론이 폭발, 해당 교과서를 집필한 뉴라이트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외수진중권 등 일부 지식인들도 이 교과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이 형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론화 하기도 했다.
김구가 독립운동 당시 수행한 일은 임시정부 조직, 광복군 조직 등의 체계적인 일이었기에 이 교과서의 설명이 그의 업적 중 일부만을 악의적으로 표현한다고 오해를 살 소지는 충분히 있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불특정 민간인까지 희생제물로 쓰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테러 대신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를 써서 폭력을 사용하는 독립운동을 구별하기도 한다. 의열활동과 테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일어나는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이전부터 다른 논문이나 책, 교과서에서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오사마 빈 라덴의)투쟁의 방식이 테러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민족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김구 선생도 테러 부대원이었다'''.

— 오만한 나라 미국, 김승국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은 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위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구의 항일활동을 테러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위의 수많은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금성출판사 교과서 뿐만 아니라 진보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많은 저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그런데 이외수나 진중권과 같은 지식인들이나 언론들이 저렇게 언급한 매체들을 비판한 적은 별로 없다.
결국 진영논리가 어느정도 겹쳐진 결과라는 것. 사실 김구의 요인 암살 행위 자체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고, 사회적 의미에서 따지자면 해방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해방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 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방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는데#, 여기서 조봉암이 말한 테러리스트란 비난엔 "어떻게 동포를 살해하느냐"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김구의 경우에도 일본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우익 진영에 몸담아 좌익, 우익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벌였으며, 자신과 정치적인 입장이 같지 않는 인물을 대상으로도 백색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단, 진보진영 측에서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백의사의 활동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좌익보다 우익인사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 자세한건 백의사 항목 참조. 물론 우익 진영내에서도 배신자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테러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마냥 이상할건 없다. 당장 안창호계 온건 우파 국민당원이던 옥관빈 역시 비슷한 이유로 피살당했다. 다만 그런 것을 다 떠나 김구가 백의사와 접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 이들을 지휘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명확한 근거는 별로 없다.
이 논란은 학술적으로 연구된 김구라는 인물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거두로서 존중받는 대중적 김구 사이의 이미지 괴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전이나 연구자료는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이 용어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그 차이가 커졌던 것이고[32] 이 간극이 이슈화 되면서 용어 사용 논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테러 행위가 불특정다수의 민간인들을 겨냥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테러'라는 어휘에 이전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짙어진 것도 대중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장 투쟁을 포함한 근대의 테러 행위는 거의 대부분 적국의 국가원수 등 주요인사, 배신자, 군인 또는 경찰 등 명백히 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는 20세기 당시의 테러 활동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현대의 무차별 테러와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7. 가족 관계


생전에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지만 딸인 장녀(이름 미상),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사망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들에 비해 오래 살았지만, 장남 김인도 1945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6대 공군참모총장[33]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에 기여를 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에 협조를 한 전적이 있어 분명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다만 당시 나라가 워낙 시궁창이었고 5.16이 사상자가 없었단 점에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반대하지 않긴 했다..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34]
  • 증조부: 김영원(金榮元, 생몰년 미상)
    • 조부: 김만묵(金萬默, ?~1888) - 조모: 장씨(생몰년 미상)
      •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1848~1901년 2월) -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 아내: 최여옥(崔汝玉, ?~1903)[35]
아내: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
  •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국민정부 국민혁명군 소교 역임. - 큰며느리: 안미생(安美生, 1914년 ~ 2007년, 안중근의 조카)
    • 손녀: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장자 김인의 딸. [36]
  • 차남: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공군 6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백범기념관 관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역임. - 작은며느리: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 손자: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현) 광복회 자문위원장.
    • 손자: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 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 손자며느리: 이정희(1959년 ~ )
    • 손자: 김휘(金揮, 1955년 ~ ) 나라기획 이사, 에이블리 대표 역임.
    • 손녀: 김미(金美, 1956년~ ) - 손녀사위: 김호연(金昊淵, 1955년~ ) 기업인 겸 전 국회의원, 빙그레 회장 역임.
  • 삼종조카(9촌): 김흥두( 金興斗, 생몰년 미상)
  • 사돈: 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 ~ 2009년 10월 31일) 정치인,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 제10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역임.
  • 사돈: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한화그룹 회장.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 정당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6.7%'''
'''낙선(2위)'''
간접선거
1948
제1대 부통령 선거
'''31.6%'''

9. 대중매체에서



9.1. 개괄


1950년대만 해도 백범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작품은 금기시됐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퇴진한 후부터 활발해졌다.

9.2. 단독 작품


  • 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최금동 각본 / 전창근(1908~1973) 감독 작품으로, 전창근 감독 본인이 직접 백범 역을 맡았다.
  •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1973): 한립물산 제작 / 조긍하 감독 작품으로, 원작은 TBC 장편 라디오 다큐멘터리극 <광복 20년>의 전반부이며, 대배우 박암이 백범 역을 맡고 이승만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최용한이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았다. 그 외에 몽양 여운형은 남궁원, 유석 조병옥은 이향(문희준의 외조부), 장택상은 허장강, 박헌영 역은 박경규, 김구의 맞수인 공산당 간부 역을 이예춘이 각각 맡았다.
  • 백범일지(1989): MBC 특집드라마로, 김기팔 각본 / 고석만 연출 작품이며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중국 로케이션 촬영을 했던 작품이다.
  • 김구(1995): 광복 50주년 기념 KBS 대하드라마.
  • 백범 김구(2010): 임진택 명창이 만든 판소리 작품.

9.3. 담당 배우/캐릭터로서


  • 1960년에 제작된 최초의 김구 영화 《아아 백범 김구선생》에선 배우 겸 감독 전창근이 손수 김구를 맡았는데, 그는 1967년작 영화 《춘원 이광수》 및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69년에 조긍하 감독 작품 《상해 임시정부》[37]에선 배우 정민이 김구 역을 맡았다.
  •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백범 역할은 대배우 박암이 주로 맡았다. 1969년 최인현 감독 영화 《춘원 이광수》와 1973년 조긍하 감독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까지 두 번 나왔다.
[image]
(박암이 김구 역으로 출연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 1979년 10월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안병경이, 1980년 1월 '승자와 패자(3부작)' 편에선 황범식이 각각 연기했다.
  • 2021년 기준으로 김구를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는 이영후다.[38]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을 비롯해 1982년작 《거부실록》 '백산 안희제' 및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 1986년작 《그의 아내》, 1991년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 2009년작 《자유인 이회영》 등지에서 각각 백범을 연기했다. 또 1998년 오태석 작가의 연극작품 《천년의 수인》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이영후에 버금가는 백범 전문 배우로는 이치우가 있다. 그는 국립극단원 시절 TBC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백범의 젊은 시절 목소리를 맡기 시작하여 1985년 이전까지 연극 《이승만과 백범》, KBS1 8.15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1982)》 등지에 총 9번 나왔고, TV에서는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과 국군의 날 37주년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 1994년 《다큐멘터리극장》 등지에서 동일 배역을 맡았다.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선 동학군 접주 시절의 모습이 나오는데,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 1986년작 창극 《윤봉길 의사》에선 배우 조통달이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와 1990년작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진태가 각각 맡았다. 김진태는 바로 이영후 본인이 '좋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그리 자주 맡진 못했다. 결국 KBS의 여명의 그날에서는 이영후가 복귀했다.
  • 1992년작 MBC 특집드라마 《매헌 윤봉길》에선 원로배우 정욱이 맡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덩치가 있는 김구 역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느낌이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 1994년작 애니메이션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선 성우 홍시호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청년 시절의 김구 역을 배우 김상중이 맡았고[39] 장~노년의 김구 역은 연극계에서 백범 전문배우로 유명한 조상건이 맡았다.[40][41] 2008년작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출연했다.
  • 이응준 작가의 소설 《국가의 사생활》에선 너무 순수해서 이승만에게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리첼렌 작가의 대체역사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두 개의 태양'편에서, 미국 사절단의 배가 인천 부두에서 멀어져가는걸 바라보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신문에서 본 '인본', '자유', '민주'라는 낱말들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대한제국도 미국과 같은 강국이 되는 걸 꿈꾸게 된다. 후에 국익에 큰 손실을 입히고 공공의 적이 되어 해외로 도망치려는 이완용을 알아보고 뒤를 밟아 철길에서 밀어 처단한다. 직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고 체포되는데 이를 두고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논란이 일지만, 어차피 김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대세인지라 법관들도 여론을 의식해 무거운 처벌을 내리기 어렵다는 걸 예상한 고종이 쿨하게 법대로 하라는 말만 하고 넘어간다. 이 세계에서는 현실의 박기서와 비슷한 평가를 받을 듯한데, 박기서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사적으로 처단한 사람이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 같은 작가가 다른 설정으로 쓴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히틀러, 스탈린 뺨치는 냉혹한 독재자의 지배 하에서 만주를 지배하는 패권국 한국의 국가안보국 국장이 되어 만주인들에 대한 세뇌교육, 반체제 인사 암살, 중국인 대상으로 ABC 무기를 실험하는 731부대스러운 비밀 실험시설 운영 등을 전담하는 한국의 예조프가 되어 있다. 김구의 행적이 21세기 들어 소상히 알려지면서 젊은 층에서 늘어난 김구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 듯.
  •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아나키스트》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중국인 배우 리다오준이 연기했다. 주인공인 의열단원들과 우연찮게 어느 식당에서 마주친다. 그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대놓고 임정 뒷담화를 늘어놓는 주인공들을 등지고 있던 김구는 결국 아주 불편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다 말고 문을 나선다. 나중에서야 큰형님 격인 한명곤이 "아까 나가신 양반이 백범이다."라고 조용히 알려주자 나머지 주인공들이 벙 찐 표정을 짓는 것이 백미.이후 창문에 돌을 던져 주인공들에게 일본군의 습격을 미리 알려준 뒤 퇴장.[42]
  • 2001년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선 백범을 본뜬 '김대성'이란 가상인물이 있는데, 배우 조상건이 연기했다.
  • 2010년작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에선 왕기석 명창이 청년 시절을, 장년은 왕기철, 노년은 임진택이 각각 맡았다.
  • 2012년작 KBS2 드라마 《각시탈》에 나오는 양백도 백범을 모티브로 했는데, 배우 김명곤이 연기했다.
  •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김홍파가 맡았다.
  • 2017년 10월 19일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는 조진웅이 김창수(김구)역할을 맡았다.[43]
  • 2019년작 MBC 드라마 《이몽》에선 배우 유하복이 맡았고, 같은 해 방영된 SBS 드라마 《녹두꽃》에선 박훈이 연기했다.

10. 관련 단체



11. 여담


  • 키가 180cm 정도인 거한이었다. 일부 넷상에선 190cm에 가까운 거한이었다라는 이야기가 살짝 떠돌기도 하는데, 실제 키는 180cm 전후였다. 물론 이 키도 당시 평균 키를 생각하면 거한으로, 현재로서는 190cm에 해당되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게 와전된 것일지도...[44]
  • 김구가 독립운동가로 활동 당시 일제가 걸었던 현상금은 60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현재의 120~180억에 해당하는 액수다. 오사마 빈 라덴에게 걸렸던 현상금은 당시 금액으로 약 540억원이었다.
  • 인터넷 상에서 우스갯소리로 나라 잃은 김구 표정이라는 관용어가 있다. 어원(?)은 디씨인사이드에 올라온 "어제 소개팅했는데 여자가 내 얼굴보고 나라잃은 김구 표정 짓더라 X발 ㅋㅋㅋㅋㅋ"(…)이라는 글.
고액권 예상 도안 출처
2007년 한국은행에서 오만원권 지폐와 함께 발행할 10만원 지폐의 모델로 백범을 선정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5만원권만 발행되어 흐지부지된 상태.
  • 90년대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영화 넘버 3의 유명 장면을 패러디하면서 송강호 역할의 두목이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백범 선생님이다 얼마나 범죄를 많이 했으면 100범씩이나 되셨겠냐"고 하자 부하가 "그분은 전과자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입니다"라고 하자 내가 그리 말하면 그런거라고 대사를 하여 시청자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물론 해당 드립 자체는 오래전부터 농담으로 이어져 오던 것이긴 하다.
  • 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전 연령대 막론하고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 <백범일지> 1부 말미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2. 관련 자료


  • 백범 김구 평전 -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4.
  •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백범 김구(총 2편) - 2012. KBS1.

13. 같이보기


[1] 대한민국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에 해당된다.[2] 독립유공자 강홍모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선(先) 안동 김씨 25세손 '회(會)' 항렬. 두산 베어스 투수 김승회, 탤런트 연우진(본명 김봉회)과 같은 항렬이다.[4] 하얀 호랑이가 아니다(1음절이라 한자어 느낌이 나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범'은 고유어이다.). 어감자체도 그런 느낌이 들고 김구의 별명 중에 호랑이와 관련된 게 있어 오해하기 충분하지만 실제 뜻은 조선 시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및 범부, 즉 일반 백성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아무리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로 만들 수 있다는 김구 선생의 신념이 담겨있다.관련 기사 [5] 175cm로 알려진 조소앙보다 좀더 컸으며 178cm인 지청천장군보다 미세히 컸음. 여담으로 광복당시 남자평균이 163-164cm인데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2m에 가까울 정도로 그냥 거인에 가까운 키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젊었을 때의 키가 아니라 나이 70이 다됐을 때의 모습에서 추정한 키이다. 젊었을 때는 더 컸을 것이다.[6]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종교.[7] 사진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여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걸려있었다. 특유의 심하게 떨리는 글씨체가 잘 드러나있다. 1938년 이운환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몸속을 비집고 들어갔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후부터 그 후유증으로 심한 수전증이 생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글씨체를 '떨림체'라고 말했으나, 본인은 '총알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본을 기념품으로 판매 중[8] 근데 호칭은 호불호를 떠나서 예의상이라도 붙여주는 경우가 많긴 하다. ○○ 회장, ○○ 의원, ○○ 교수 등. 물론 안붙이는 경우도 있다.[9] 하지만 김구 연구자 도진순 교수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백범일지에서 단순 윤문이 아닌 완전한 이광수의 창작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 이 문화강국론이다. 일제의 "아름다운 나라" 담론의 영향이 짙다는 분석도 있다. 물론 본인 저서에 넣어뒀다는건 김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소리로도 볼 수 있겠지만.[10] 물론 김구는 받은 정치자금으로 광주 등에 '전재민촌' 같은 빈민을 위한 집을 수십 채 짓는 등 상당수 공적인 활동을 하긴 했다.[11] 사실 식민지 시절엔 저항적 민족주의와 합쳐져 민족주의가 거의 종교 이상으로 신성시되는 측면이 있긴 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일 뿐 근본적으로 바뀐건 없어보인다만.[12] 나라가 부패해 그렇다고 울분을 토했다는데 믿거나말거나. 사실 당시 조선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건 사실이지만, 과거 시험 자체가 작금의 고시에 비유해도 좋을 만큼 세도가의 자제들도 꽤나 붙기 어려운 시험이었다.[13] 분단을 막으려 노구를 이끌고 1948년 평양 개최 '통일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당시 김일성한테 냉대만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14] 김구는 1940년대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기 대부분을 미주에서 보냈으며 임시정부 대통령직 태만, 세금 유용 혐의로 1925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하지만 탄핵 이후에도 임정에서 외교 관련 직위를 유지하며 김구와 연대 관계를 이뤘다.[15] 사실 김구와 이승만 둘이 대립하던 시기는 장덕수 암살 이후부터 김구 암살까지의 짧은 기간에 국한돼 있다. 임정에서 시작해 해방정국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건 사적으로건 상당히 절친한 연대 관계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임정 현상유지론을 고수하는 우파 민족주의자, 반공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노선과 성향이 일치했고, 사적으로는 한 살 차이라 김구가 이승만을 "형님", "우남이형"이라고 불렀을 정도.[16] 단, 도진순 교수에 따르면 이 단락은 이광수의 창작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세부사항은 후술. 여담으로 이광수가 백범일지에 참가하게 된 연유에 대해 김구의 차남인 김신은 “춘원(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백범일지의)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라고 1986년 신동아 8월호에서 밝혔다.[17] 방탄소년단과, 영화 기생충이 해외에서 큰 호평을 받고 인기를 끌자 인용되는 일이 부쩍 늘었다.[18] 김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록이다.[19]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파라는건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거라 지금으로 보면 상당수 좌파 계열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범위의 개념이긴 하다. 작금의 민주당계 정당이나 해외의 상당수 리버럴계 정당들도 이 기준에선 최소 중도~중도우파.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저서에서 자긴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썼다.[20] 김립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거슬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임정 시절에 김구가 몰두했던 작업 중 하나가 다름아닌 다른 좌익 운동가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처음 이 사실을 배우는 사학도들을 여러모로 충공깽에 빠뜨리는 부분.[21] 멀리 갈 것도 없이 김구는 지청천, 김규식 등과 함께 우익계열 민족주의자 세력인 한독당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넓게 보면 범 우익계열 통합집단이지만, 그 실체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의 배타적 민족주주자 결집세력이었다.[22] 다만 당시의 임정 법통 논란은 임시정부만을 독립국가 수립의 주체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공동으로 할 것이냐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임시정부 법통 논란은 건국절 논란과 연관이 깊지만 해방 이후의 임정 법통 논쟁은 "통일정부 수립의 주체"와 관련이 깊었다. 즉 당시의 임정법통 회의론은 임시정부를 깎아 내리려는 것보다는 임시정부 이외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발언권과 참여 기회를 주자는 것에 더 가깝다.[23] 중화민국 정부는 이른바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중화'''민국'''의 수립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였다.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똑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잡아 민국 연호를 썼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썼다.[24] 원불교 역시 불법에 바탕한 종교로 초창기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그러하듯이 종단으로써는 불교와 별개로 운영되는데 그 구분이 명확해진 것 자체가 한참 뒤의 일이다.[25] 세례명은 베드로. 당시 10시에 명동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마친 서울감목 노기남 대주교도 급히 경교장에 도착하였다.[26]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515쪽)[27] 심지어 신체 상태가 온전하다면 사산된 태아에게도 조건부 세례를 주는 종교가 천주교다. 물론 이때 그 세례가 유효하게 효력이 발생하였는지 여부는 천주만 안다고 한다.[28] 최기영 "백범 김구의 애국 계몽운동"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29] 조동걸,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 백범학술원.[30] 2000년 개봉한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이런 이미지가 돋보인다.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급진적인 무장투쟁에 반대하던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의열단의 주인공들을 후원하던 김구와 의견 대립을 보이는 장면이 한 차례 나온다.[31] 이 교과서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식 교과서는 아니다.[32] 쉽게 말해 대중들이 생각하는 '독립운동=(국가간)무장투쟁'이지 단순한 '테러'가 아닌 것이다.[33] 빨간 마후라로 유명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주역[34]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김구 문서의 가족 관계 부분을 참고했다.[35] 정확하게는 약혼을 한 상황에서 병사한 것이므로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가족관계 부분에는 포함.[36] 안미생은 1948년, 김효자는 1960년대 초 미국으로 떠난후 집안과 연락을 끊었다[37] 당시 이봉창은 이순재, 윤봉길은 박노식이 각각 맡았으며, 김지미, 신성일, 오지명, 김무생, 이대엽 등도 나왔다.[38] 모 토크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백범을 맡았을 때 박암 선생의 아성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고. 정작 이영후가 MBC에 처음 가서 고위 임원과 만나는 순간 '김구로구먼!' 소리를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만큼 이영후에게 안성맞춤인 배역이었다.[39] 해당 역할은 캐스팅 과정에서 탤런트 이종원이 맡을 뻔했으나, 사극인 데다 연기력 부족으로 포기했다. 김상중 입장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첫 TV 출연이 앞서 말한 작품에서 윤봉길 역이였다.[40] 영화 타짜에서 너구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원로 연극배우인 조상건의 최초의 외도가 바로 김구 전기드라마.[41] 정확하게는 105인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수감 말엽부터 배우가 바뀐다.[42] 실제로도 의열단과 임정은 서로 다른 노선을 택해서 서로 디스하기 바빴지만, 김구는 의열단의 고문을 맞기도 하는등 독립을 위해 서로 최선을 다해 협력 했었다.[43] 다만 해당 영화가 하필이면 치하포 사건 당시 김구의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어서 역사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44] 190cm라는 다소 과장 섞인 수치도 있지만, 165cm인 이승만이 구두를 신었음에도 고무신을 신은 채로도 한 뼘 정도 차이가 났고 당시 미군 인사들과 찍은 사진에서도 큰 편이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구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승만도 그 당시 남자 키 기준으로 따지면 평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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