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형

 

성명
고지형(高志亨)
이명
고지영(高志永)
생몰
1859년 4월 4일 ~ 1927년 7월 2일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 원장리
사망지
평양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지형은 1859년 4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 원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1919년 3월 1일 강서군 반석면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3월 4일 오전 10시 합성학교에서 독립선포식을 치른 두 사람은 그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으로 행진했다. 마침 장날이라서 시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여기에 합류했고, 시위대의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후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과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이 모락장의 시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했다. 이에 시위대는 유치장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장을 출발해 모락장으로 나아갔다.
시위행렬의 선두가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일본군은 실탄사격을 가했다. 이에 고지형은 시위대를 지휘하여 맨주먹으로 일본헌병에 대항했다. 그들은 총탄을 쏴대는 헌병주재소장과 헌병보조원을 붙잡아 죽이고 구금 중에 있던 동료들을 구출했으며 주재소를 방화했다. 이날 시위에서 13명이 현장에서 피살되었고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대거 동원해 원장, 반석, 사천 등지를 중심으로 400명을 무차별 검거하여 20여 일간 유치하며 가혹한 고문을 가했고,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옥사했다.
고지형은 이러한 일제의 수사를 피해 각지를 피신하다가 1921년 8월 끝내 체포되었고, 1921년 10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 소요,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7년 7월 2일 평양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고지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