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탁

 


성명
조진탁(曺振鐸)
생몰
1868년 10월 18일 ~ 1922년 10월 18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사망지
평양형무소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진탁은 1868년 10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서군 반석면 반육리에 소재한 반석교회(盤石敎會)의 장로로, 1919년 2월 28일 볼일이 있어 평양으로 갔다가 3월 1일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원장에 들러 그곳 교회 지도자들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차현구(車賢九) 등을 만나 평양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튿날에는 반석교회의 지도자인 최능현과 백이옥(白履玉)·송현근 등을 만나 반석·원장 두 교회가 중심이 되어 3월 4일을 기하여 원장교회의 합성학교(合成學校)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태극기를 제작하며 시위를 준비했으나 모락장 교회의 간부 10여 명이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시위를 강행하기로 하고 3월 4일 오전 10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시위대를 이끌고 원장장터로 향했다. 이때 시위 규모는 계속 불어나 나중에는 3천여 명이 되었다. 그는 사전에 구속된 최능현과 송현근을 구출하기 위해 모락장으로 시위대를 인솔했다.
그러던 중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오늘이 거사계획을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모락장 입구에 무장하고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시위군중들은 이에 위축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모락장 입구에 들어갔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그는 청년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대항하며 계속 전진하였다. 사태가 불리해진 일본 헌병 분견소장 좌등(佐藤) 상등병과 보조원 3명이 재발리 도망가려 하자, 그는 군중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해 모조리 죽이고 최능현, 송현근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일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 그는 총상을 입은 채 순천, 원산, 통천, 강릉 등지로 피신하며 수사를 회피했다. 일제는 그에게 살인, 방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하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다. 결국 1921년 2월 9일 원산역에서 평양경찰서 고등계 주임형사 중촌(中村)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1922년 10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진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