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근

 


[image]
성명
송현근(宋賢根)
생몰
1868년 ~ 1935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박석면 상서리
사망지
만주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현근은 1868년생이며 평안남도 강서군 박석면 상서리 출신이다. 그는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평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사천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중 3.1 운동 소식을 듣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3일, 그는 기미독립선언서 1통을 지니고 평남 강서군 박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으로 가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사천헌병주재소로 연행되었다.
그날 저녁에 풀려난 그는 오후 9시경 군중과 함께 주재소 부근으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헌병주재소장 상등병 사토 운코루(佐藤賓五郞)가 보조원과 함께 출동하여 공포를 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날 밤 일경이 수 명의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주재소로 연행해가자 그는 대동군 원장리로 피신했고,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하려 들었다.
3월 4일 원장과 반석교회를 중심으로 다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그는 시위현장 군중에게 사천에서 검거된 동지들의 구출을 요청하여 수백 명 군중과 함께 사천으로 행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천헌병분견소 주재소장은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여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분노한 그는 군중들과 투석으로 대항하였고, 주재소 근처까지 주재소장을 쫓아가 곤봉과 돌로 내리쳐 주재소장을 실신시켰다. 그리고 시위대는 예비구금된 동지 전원을 구출하고 일본 헌병 4명을 살해했다.
만세시위 직후 일제는 평양헌병대를 출동시켜 대대적인 주도자 검거에 나섰다. 이 때 그는 평양시내로 피신하였으나, 추적이 계속되자 노인으로 변장하고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였다. 그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서간도 삼원보 일대에서 기독교 교육 사업과 독립운동에 종사했다고 한다. 또한 1935년경 만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송현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