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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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海(くうかい[1]
774-835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활동한 일본 불교의 초석을 다진 승려로 속명(俗名)은 사에키노 마오(佐伯眞魚)라고 한다.
지금의 가가와현 출신으로 일찌기 논어를 배우고 791년 나가오카쿄의 대학에 입학하여 3교(불교, 도교, 유교)를 두루 배웠다. 법명을 구카이라 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804년에 사이초와 함께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留學)을 했다[2]. 구카이는 당나라 청룡사(靑龍寺)에 있던 밀교의 고승 혜과(惠果)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여 밀교 승려로서 관정[3]을 받았다. 또한 혜과는 구카이에게 변조금강(遍照金鋼)이라는 밀호[4]를 내렸다고 한다. 사이초가 먼저 귀국(805년)하고 구카이는 이듬해(806년)에 귀국하였다. 구카이는 또한 사가 덴노의 자문에도 응하였다. 그러나 구카이와 사이초, 두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끝내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5], 기어코 사이초는 히에이산(比叡山)의 천태종(天台宗),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의 진언종(眞言宗)으로 완전히 각자의 갈 길을 갔으며 835년 고야산에서 입적하였다. 942년에 다이고 덴노는 구카이에게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본에는 구카이의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 유학 당시 구카이는 붓을 입과 사지에 쥐고 달필을 피로하는 퍼포먼스를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에 월화수목금토일 7요일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도입했다고 한다. 일본어에는 뛰어난 전문가나 숙련자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보 대사도 붓을 잘못 놀릴 때가 있다."(弘法も筆の誤り) 하는 속담이 있는데, 구카이가 헤이안 신궁에 건립되는 오텐몬(應天門)의 현판을 달필로 써놓고 걸어보니 '''應'''자의 맨 윗쪽에 점이 빠트린 바람에[6] 구카이가 '''재빨리 붓을 던져 점을 찍었다'''는 야사에서 유래했다. 일설에 의하면 차와 우동을 일본에 처음 도입한 것도 구카이라고 하지만 이견이 많다.

[1] 실제 일본어 발음은 "쿠:카이"에 가깝다.[2] 사이초는 국가직속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구카이는 사비를 털어 당나라로 간 것에 차이가 있다.[3] 밀교에서 입문자가 밀교수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입문식이다.[4] 밀교 승려가 스승에게 받는 법호. 속명이나 법명과는 따로 받는 호칭이다.[5] 평소 구카이의 법을 흠모한 사이초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우려 했고 제자 한 명이 구카이의 제자로 들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러나 밀교 공부를 위해 밀교 서적을 빌려달라고 구카이에게 부탁했지만 구카이가 "불법을 종이에 담아 배우려는가?" 하며 빌려주지 않자 서운함이 폭발해 결국 교류를 단절했다.[6] 엄호(广)여야 하는데 민엄호(厂)로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