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고 덴노

 


[image]
'''시호'''
다이고 덴노(醍醐 天皇, 제호 천황)
''''''
미나모토노 코레자네(源 維城)→아츠히토(敦仁)
'''능호'''
노치노야마시나능(後山科陵)
'''생몰'''
885년 2월 6일 ~ 930년 10월 23일
'''재위'''
897년 8월 14일 ~ 930년 10월 16일
'''연호'''
쇼타이(昌泰)→엔기(延喜)[1]→엔초(延長)
'''황거'''
헤이안쿄(平安宮)
1. 개요
2. 행적
3. 가계도


1. 개요


일본의 제60대 천황. 우다 덴노의 장남.

2. 행적


다이고 덴노는 원래 미나모토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 사다미가 우다 덴노가 되면서 황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2] 간표 원년(889년)에 친왕이 되었고, 간표 5년 4월 2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간표 9년(897년) 7월 3일, 원복식을 거행하고 같은 날에 천조(踐祚) 의식을 행한 다음, 7월 13일에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훈시에 따라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좌, 우대신으로 삼고 정무를 맡겼다. 친정을 통해 율령체제의 강화와 다양한 문화정책을 추진하여 그 통치는 '''엔기의 치(延喜の治)'''라 불리며 후대에 이르러서도 칭송받았다.
900년 1월 다이고 덴노는 아버지 우다 상황의 거처를 방문하였다. 그해 10월 우다 상황은 오사카 남쪽 와카야마 부의 고야산(高野山)으로 여행하였다. 그는 산의 경사지에 있는 사원을 방문하였다. 그 다음해 1월 1일 일식이 있었다.
엔기 1년(901년) 1월, 도키히라의 참소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좌천되는 '''쇼타이의 변'''이 일어났다. 엔기 5년 4월, 기노 쓰라유키가 와카 시집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를 천황에게 헌상하였다. 엔기 9년(909년) 4월,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39세로 사망했다. 도키히라는 집정으로 추존되었다. 엔초 7년(929년) 8월, 홍수가 발생해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
930년 9월 황태자로 책봉한 유타아키라 친왕에게 양위하고 교토의 다이고지(醍醐寺)로 출가 후 법명을 '보금강'이라 칭했으며, 다음달 10월에 다이고지에서 46세로 사망했다. 추호(追号)인 다이고는 다이고지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참고로 사망이 좀 안습한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양위하기 직전인 930년 7월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교토고쇼의 정전인 청량전에 벼락이 떨어져''' 많은 대소신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후지와라노 토키히네의 집안 사람들이 줄줄이 요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제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네의 집안이 덴노의 외척이었던지라 '''황태자고 황태손이고 다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토키히네 집안에게 음해당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어서[3]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고, 급기야는 미치자네를 추방한 칙서를 불태우고, 관작도 회복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흉흉한 일이 벌어져 이걸 두려워하다가 다이고 덴노가 죽은 것(...). 거기에 민간설화에서는 한 귀족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다이고 덴노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다이고 덴노의 증손자였던 미나모토 무네키미(源致公)가 세이와 덴노의 증손이었던 미나모토 미츠스에(源滿季)의 양자로 들어가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 미츠스에(滿季)' 계파가 되었지만,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에 무네키미의 후손은 사실상 다이고 덴노의 후손으로 봐도 된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씨족으로는 모리(森)씨, 하야시(林)씨, 야나기(柳)씨, 카마가리(河曲)씨, 타카야(高屋)씨 등이 있다.

3. 가계도


생전에 매우 많은 후궁을 들였다. (대략 20명)
  • 부 : 제59대 우다 덴노
  • 모 : 후지와라노 인시
    • 다이고 덴노
    • 황후 : 코죠노키사키
    • 비(妃) : 타메코내친왕
      • 장녀 : 유키코내친왕
    • 뇨고(女御) : 미나모토노 카즈코
      • 4녀 : 요시코 내친왕
      • 5녀 : 츠네아키라 친왕
      • 6녀 : 노리아키라 친왕
      • 7녀 : 아리아키라 친왕
      • 15녀 : 아키코 내친왕
      • 17녀 : 타다코 내친왕
    • 뇨고(女御) : 후지와라노 요시코(藤原 能子) (?~964) - 후지와라노 사다카타(藤原 定方)의 딸
    • 뇨고(女御) : 후지와라노 와카코(藤原 和香子) (?~935) - 센다이쇼(泉大將) 후지와라노 사다쿠니(藤原 定國)의 딸
    • 코이(更衣) 미나모토노 카네코(源 封子) (?~938) - 미나모토노 모토미(源 舊鑑)의 딸
      • 제2황녀 : 노부코 내친왕(宣子 内親王) (902~920)
      • 제1황자 : 카츠아키라 친왕(克明 親王) (903~927)
      • 제12황녀 : 야스코 내친왕(靖子 内親王) (915~950)
    • 코이(更衣) : 후지와라노 요시코(藤原 鮮子) (?~915) - 후지와라노 츠라나가(藤原 連永)의 딸
      • 제3황녀 : 타카코 내친왕(恭子 内親王) (902~915)
      • 제3황자 : 요아키라 친왕(代明 親王) (904~937)
      • 제6황녀 : 요시코 내친왕(婉子 内親王) (904~969)
    • 코이(更衣) : 미츠코 여왕(滿子 女王) (?~920) - 아이스케왕(相輔王)의 왕녀
      • 제8황녀 : 나카코 내친왕(修子 内親王) (?~933)
      • 제11황녀 : 히로코 내친왕(普子 内親王) (910~947)
    • 코이(更衣) : 오우미코이(近江更衣) 미나모토노 치카코(源周子) (?~935) - 미나모토노 토나우(源唱)의 딸
      • 제5황녀 : 이소코 내친왕(勤子 内親王) (904~947)
      • 제7황녀 : 미야코 내친왕(都子 内親王) (905~981)
      • 제9황녀 : 사토코 내친왕(敏子 内親王) (906~969)
      • 제10황녀 : 마사코 내친왕(雅子 内親王) (910~954)
      • 제8황자 : 토키아키라 친왕(時明 親王) (912~927)
      • 제10황자 : 타카아키라 친왕(高明 親王) (914~983)
      • 제13황녀 : 카네코 내친왕(兼子 內親王) (915~949)
      • 제18황자 : 모리아키라 친왕(盛明 親王) (928~986)
    • 코이(更衣) : 후지와라노 요시히메(藤原 淑姬) (?~949) - 후지와라노 스가네(藤原 菅根)의 딸
      • 제9황자 : 나가아키라 친왕(長明 親王) (913~953)
      • 제11황자 : 전츄쇼왕(前中書王)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914~987)
      • 제12황자 : 요리아키라 친왕(自明 親王) (918~958)
      • 제18황녀 : 히데코 내친왕(英子 内親王) (921~946)
    • 코이(更衣) : 카에데미야스도코로(楓御息所)후지와라노 쿠와코(藤原 桑子) (?~921) - 후지와라노 카네스케(藤原 兼輔)의 딸
      • 제15황자 : 아키아키라 친왕(章明 親王) (924~990)
    • 코이(更衣) : 미나모토씨(源氏) - 미나모토노 노보루(源昇)의 딸
      • 제4황자 : 리부왕(吏部王) 시게아키라 친왕(重明 親王) (906~954)
    • 코이(更衣) : 후지와라씨(藤原氏) - 후지와라노 코레히라(藤原 伊衡)의 딸
      • 제17황자 : 타메아키라 친왕(爲明 親王) (?~961)
    • 코이(更衣) : 미나모토씨(源氏) - 미나모토노 토시스케(源 敏相)의 딸
      • 제13황자 : 스케아키라 친왕(允明 親王) (919~942)
    • 코이(更衣) : 미나모토노 키요코(源 淸子)
    • 코이(更衣) : 후지와라노 아나코(藤原 同子)
    • 코이(更衣) : 미나모토노 아타타코(源 暖子)
    • 생모미상
      • 제14황녀 : 미나모토노 타케코(源 厳子) (916~?)

[1]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엔기노미카도(延喜帝)라고도 한다.[2] 미나모토 가문은 황실에서 먼 핏줄이라 신적강하된 집안이었다.[3] 미치자네는 903년에 죽었다. 게다가 이전에도 미치자네가 죽고 나서 이런저런 흉흉한 일이 벌어져 진작부터 "미치자네의 원혼이 복수를 하는건가?" 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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