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일본)

 


1. 개요
2. 배경
3. 발전


1. 개요


에도 시대 중반인 17세기 말부터 생겨난 학문이다. 국학은 불교유학과 같은 외래 종교와 학문을 배격하고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학문이다. 이들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신도와 천황을 주목했고 이것이 발전해서 현대의 신도와 천황의 모습을 만들어내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모습을 띠었고 현재 일본이 보이고 있는 일본의 자국 찬양의 뿌리가 되었다.

2. 배경


어렵게 이야기하면 일본의 중세시대 가가쿠(歌學)의 형식적 규범주의와 에도 막부의 봉건체제의 유교적 합리주의에 대항한 가가쿠 혁신운동으로서 발생했다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고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쇄국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의 대외 정보를 얻는 통로는 조선통신사와 네덜란드의 상인들이었고 이러한 배경에 의해 유학과 난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유학과 난학의 발달은 이에 대응하는 일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고 일본 고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라는 것이다.

3. 발전


에도시대 승려였던 게이쥬(契沖)는 학문적으로 도덕적 규범에 제약받지 않는 자연스런 인간상을 고전 속에서 탐구했다. 비정치적인 주정주의(主情主義)와 낭만주의를 본질로 하는 그의 학풍은 크게 볼 때 문학적 주정주의, 문헌학적 방법론, 비합리적 신도론을 기초로 삼았다. 미토 코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의뢰를 받아 '만엽집(萬葉集)'에 주석을 달은 해석본 '만엽대장기(萬葉代匠記)'를 저술하여 기존의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을 비판하고 사료에 근거한 고증적 해석방법을 제시한 것과 역사적 가나표기법을 도입하는 업적을 남겼다.
국학 발전의 기초를 다진 것은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이다. 신관 출신으로 에도에서 활동하면서 유학에 대항해서 국학을 적극적으로 막부 체제에 도입했다. 특히 신도에 중심을 두면서 복고신도(復古神道)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가다노는 만엽집, 일본서기 등 고전·고어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고유의 정신을 규명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말의 뜻을 해석하는 것을 국학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중시하면서도 문학 자체에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신도를 전면에 부상시켜 국학의 도의 학문으로서의 규범성을 부여했다. 즉 신도가 고전의 실증적 연구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신도 관념이 선행하고 이를 통해 고전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는 만엽고(万葉考) 등 만엽집 연구를 통해 고대 정신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이를 통해 고도론을 전개하였다. 그도 가다노와 같이 몰락한 신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지향성이 강했지만 복고신도에는 부정적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시적·문학적 성격이 농후했기 때문에 신도를 불교나 유교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천지의 질서에 따른 순수한 단순함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국학의 학문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을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다.
가모노 마부치의 문하에 있었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스승의 도교 지향적 해석을 거부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신세칠대(神世七代)의 창조적인 힘인 '무스비'(産靈 : 만물을 창조하고 성장시키는 신비로운 힘)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 중시하여 근대 신도의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사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고 이는 근대에 이루어진 신도의 부활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고사기 연구를 통해 게이추의 고어 연구를 기반으로 가모노의 만엽집 연구를 계승하면서 복고주의적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연구는 고전주석·고도론·문학론·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고사기전(古事記傳)과 같은 저술에서 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일본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또 겐지모노가타리를 연구하여 그 본질이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もののあわれ:적막하고 쓸쓸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동)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학을 도덕적 해석의 틀에서 해방시켰다.
자칭 모토오리 노리나가의의 제자를 자처한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는 국학에서도 신도에 중심을 두고 연구했으며 복고신도와 황국 우월론을 주장했다. 초기에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제자를 자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유교와 불교의 교리를 절충한 신도를 비판했지만, 모토오리 학파의 실증주의에서 벗어나 신비주의로 흘러들어갔다. 모토오리가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진정한 일본 정신을 추구했다면 그는 사회적·정치적 행동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신도 신학체계에서 찾으려 했다. 이는 신과 세계, 영혼(사후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영혼의 구제 등)에 관한 것을 연구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불선 삼교에 난학, 기독교 등 다양한 교리를 연구분석하여 팔가학(八家の学)이라고도 불렸다.
아쓰타네의 학설은 미토학과 함께 막말 존왕양이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 그의 황국 우월론은 팔가학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방식의 학문을 융합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주장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또한 아쓰타네는 학자와 지식인 뿐 아니라 서민 대중도 겨냥해 국학 사상을 크게 보급했다. 서민들에게 그의 학설이 받아들여진 것은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한 사상이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후대 민속학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쓰타네의 복고 신도는 히라타 신도라고 불렸으며, 이후 신토계 신흥종교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막부 붕괴 이후 메이지 유신기에 히라타 신도가들은 큰 영향력을 가졌지만, 신도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국가 신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히라타 신도는 배제되어 영향력을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