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방

 

'''귀방'''(鬼方)은 고대 동아시아의 한 민족이다.

1. 역사


상나라 때 현재의 섬서성 동부, 산서성 북부, 내몽골 자치구 서부에 존재했으며, 황제와 인척 관계를 맺은 씨족인 대외씨(大隗氏)가 기원이라고 한다.[1] 유목과 수렵을 하며 살아갔고, 그 수령은 귀후(鬼侯), 귀공(鬼公) 등으로 호칭되었다. 상나라의 외부 위협이 된 민족으로, 《주역·기제(旣濟)》에는 "고종(高宗)이 귀방을 정벌하여 3년이 지나 크게 이겼다.[2]"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귀방과 당시 화하족은 또한 인척 관계가 있었다.[3] 상나라의 제신은 귀방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귀후(鬼侯)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기도 했다.[4] 비록 적지 않은 문헌에 고종이 귀방을 정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갑골문의 복사(卜辭) 중엔 귀방에 대해 정벌을 나갔다는 내용을 명확히 담은 문구는 없다.[5] 또한 귀방이 바이칼호에서 와서 몽골고원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또한 허타오 지역으로 남하해 황하를 돌아 섬서, 산서 지역으로 들어 왔고 적적(赤狄)으로도 지칭되었으며, 정령, 위구르 및 현재의 위구족, 위구르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6]
귀방은 보통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夷), 관이(串夷) 등의 명칭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방준익(方濬益)은 "귀방은 서방 여러 융(戎)의 통칭이다."라고 하였다.[7] 또한 상나라 때에는 여러 소국들이 모두 방(方)으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방(邦)의 의미에 해당하며 상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여겨진다.[8] 예를 들면 귀방 외에 토방(土方), 설방(𢀛方), 고방(苦方), 용방(龍方), 마방(馬方), 촉방(蜀方), 우방(盂方), 강방(羌方), 사방(𠭯方), 비방(轡方), 이방방(二邦方) 등이 있다.
현재 귀방이란 족속과 귀방의 발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정론은 아직 없다.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는 귀방은 곧 흉노의 전신이라고 여겼다.[9]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선진 시대의 귀방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하였다.[10] 고고학자들은 현재의 산베이(陝北) 지역의 리자야(李家崖) 문화를 귀방과 견주어 비교하고 있는데[11] 리자야 문화의 선주민들은 산지의 농업경제를 주로 하였고, 소량의 목축활동을 생업 형태로 경영하였다고 한다.[12]

2. 함께 보기


* 곤이
* 견융
* 훈육
* 험윤
[1] 杨建敏《黄帝·鬼方与大隗》[2] 高宗伐鬼方,三年克之。[3] 《大戴禮記‧帝繫篇》有提到陸終氏與鬼方氏的婚姻。[4] 《帝王世纪》记载“纣以鬼侯为三公。鬼侯有女美,而进之于纣”。[5] 王玉哲,〈鬼方考補證〉,收於《古史集林》,頁310。[6] https://book.douban.com/subject/3036942/ 鬼方遗民:维吾尔族的真正来历[7] 方濬益,《綴遺齋彝器考釋》上冊(台北:台聯國風出版社,民國65年),頁 285[8] 落合淳思『殷─中国史最古の王朝』(中公新書)p.51[9] 王國維:《鬼方昆夷玁狁考》[10] 林沄《戎狄非胡論》[11] 呂智榮在〈鬼方文化及相關問題初探〉一文中說“而且在李家崖古城址中出土了‘鬼’字陶文。 我們以上述資料研究進而認為,李家崖文化是與鬼方先民有關的文化遺存,當稱它‘鬼方文化’。”[12] http://society.people.com.cn/n/2014/1222/c1008-26255452.html 陕北发现商代宏大重楼环屋形建筑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