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청나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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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다이칭 구룬 ・ 대청국
'''
[image]
[image]
'''국기'''[1]
'''국새'''[2]
[image]
건륭제 때의 최대 강역
'''1616. 2. 17. ~ 1912. 2. 12.
(296년)
'''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여진'''
남명

북원
준가르
'''군벌''']]
복드 칸국
티베트
영국령 홍콩
일본령 대만
'''상징'''
'''국호'''
금(金)[3] → 청(淸)
'''국가'''
공금구
'''위치'''
동아시아[4]중앙아시아 동부 일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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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겅옌 한으로 추대''' 1616년
'''남몽골 정복''' 1635년
'''대청국(다이칭 구룬) 선포''' 1636년
'''남명 정복''' 1662년
'''북몽골 복속''' 1691년
'''준가르 정복''' 1758년
'''제1차 아편전쟁 발발''' 1840년
'''청프전쟁 발발''' 1884년
'''태평천국의 난 발발''' 1851년
'''제2차 아편전쟁 발발''' 1856년
'''양무운동''' 1861년
'''청일전쟁 발발''' 1894년
'''변법자강운동''' 1898년
'''의화단 운동''' 1899년
'''신해혁명''' 1911년
'''제국 멸망''' 1912년

'''수도'''
허투 아라(흥경) ,(1583 - 1587, 1603 - 1619),
퍼 아라[5] ,(1587 - 1603),
자이퍈[6],(1619 - 1620),
사르후 ,(1620 - 1621),
랴오양 ,(1621 - 1625),
묵던(성경) ,(1625 - 1644),
'''버깅[7](순천부)''' ,(1644 - 1912),
'''면적'''
13,150,000km2 (내수면 비율 2.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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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추산)
'''
1790년
3억 100만 명
1820년
3억 8,310만 명
1898년
3억 9591만 8,000명
'''민족'''
만주족과 한족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족
'''공용어'''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공용 문자'''
만주 문자, 한자, 몽골 문자, 티베트 문자, 아랍 문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백련교, 이슬람교, 만주 샤머니즘[188]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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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616 – 1908),
입헌군주제 ,(1908 – 1912),[189]
'''국가원수'''
황제[190]·천자(중국식 군호)
(만주식 군호)
카안 (몽골식 군호)
'''역대 황제'''
12명
'''주요 황제
(황제 연호 년도)
'''
초대 천명제 ,(1616 – 1626),[191]
2대 '''숭덕제''' ,(1626 – 1636),
4대 '''강희제''' ,(1661 – 1722),
5대 '''옹정제''' ,(1722 – 1735),
6대 '''건륭제''' ,(1735 – 1796),
12대 '''선통제''' ,(1908 – 1912),
'''국성'''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정부수반'''
황제내각총리대신[192]
'''역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아이신기오로 이쾅 ,(1911 – 1911),
2대 위안스카이 ,(1911 – 1912),

'''통화'''
,(~ 1899),
청 위안 ,(1899 ~ 1912),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몽골, 러시아, 미얀마, 카자흐스탄, 라오스, 베트남, 인도, 네팔,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1. 개요
2. 국명
3. 역사
3.1. 건국 이전
3.1.1. 여진족의 상황
3.1.2. 건주여진의 발흥
3.1.3. 누르하치의 즉위
3.2. 건국 이후
3.2.1. 몽골 복속
3.2.2. 조선 복속과 명의 패퇴
3.2.3. 기울어가는 명조
3.2.4. 순치제의 천자 공포
3.2.5. 융화 정책 시도
3.2.6. 전성기: 강희제
3.2.9. 한족 차별 문제
3.2.10. 황후와 총독 제도
3.2.11. 중앙정부구조
3.2.12. 다중 수도 체제
3.3. 멸망
3.3.1. 팔기군의 쇠퇴
3.3.2. 외세에 시달리다
3.3.3. 천자국의 기상을 잃다
3.3.4. 마지막 부흥 시도
3.3.5. 신해혁명과 제정의 붕괴
4. 강역
5. 문화
5.1. 의복
6. 경제
7. 군대
7.1. 해군
8. 평가
9. 상징
10. 역대 황제
10.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10.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10.3. 추존 황제
10.4. 종합
11. 항렬
12. 계보도
13. 대외 관계
13.1. 원(元)
13.2. 명(明)
13.3. 조선
13.4. 일본
13.5. 몽골
13.6. 그 외
14. 같이보기
14.1. 주요 사건 (시대순)
14.2. 인물 (시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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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이자 정복왕조, 한대(漢代) 이래 역대 왕조 중 왕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조이다.[8]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압카이 수러 한이 국호를 개칭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1644년, 중국 북경에 입관(入關)했으며, 1924년까지 300여 년 동안 대청(大淸)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부활하기도 했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아이신교로라고 쓰기도 하며, 현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뤄'로 발음된다.
또한 21세기 이전 기준 최후의 중화제국이자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퉁구스만주족을 중심으로 그 외의 다수의 민족들이 연합한 다민족국가이다.[9]

2. 국명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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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 '''만주어'''
후금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193]
ᠮᠠᠨᠵᡠ ᡤᡠᡵᡠᠨ [194]
'''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195]
ᠠᠮᠪᠠ ᠴᡳᠩ ᡤᡠᡵᡠᠨ[196]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197]
'''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ᠤᠯᠤᠰ[198]
'''중국어'''
간체자
清朝[a]
清国 / 大清国[b]
大清帝国[c]
中华大清国[d]
정체자
淸朝[*a ]
淸國 / 大淸國[*b ]
大淸帝國[*c ]
中華大淸國[*d ]
'''일본어'''
清(しん)[199]
大清帝国(だいしんていこく)[200]
'''영어'''
Qing Dynasty[201]
Great Qing[202]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한자로는 대청(大清)이다. 19~20세기에는 대외 문서에서 중화대청국(中華大淸國)이나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10]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the Great Qing)으로 부르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라고 불리고 있다. 다이칭 구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암바 칭 구룬(Amba Cing Gurun), 암바 다이칭 구룬(Amba Daicing Gurun)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른 중국 왕조들과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하), (안출호수), 대원(대재건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그 이유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말이 있다.

3. 역사


1588년 '''누르하치, 여진 통합'''
1606년 '''누르하치, 쿤두런 한 즉위'''
1616년, '''누르하치, 겅옌 한 즉위'''
1618년 '''국호를 '금'으로 개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선포'''
1621년 '''요양 천도 '''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북경 광덕문 전투'''
1636년 '''대청 선포 및 칭제건원, 병자호란'''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
1662년 '''남명 멸망 '''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
1683년 '''대만 원정, 정씨 왕조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77년 '''흠정몽고원류 간행, 공포'''
1778년 '''흠정만주원류고 간행, 공포'''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89년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간행, 공포'''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
1813년 '''천리교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1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74년 '''일본, 대만 출병'''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나라-프랑스전쟁'''
1894년 - 1895년 '''청나라-일본전쟁 '''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1년 '''우창 봉기, 신해혁명'''
1912년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3.1. 건국 이전



3.1.1. 여진족의 상황


만주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퉁구스계 여진족금나라를 세워 만주와 화북 일대에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몽골의 침공으로 멸망되어 만주의 분열세력으로 여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15세기를 전후해 명나라의 영락제는 요동도사를 설치한 뒤 여진족의 각 부족들을 회유하여 부족명에 위소의 명칭을 갖다붙히고, 흑룡강압록강 그리고 두만강 지역으로 팽창을 시도하였지만, 선덕제 치세에 누르간도사가 유명무실해지는 등 명의 팽창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명 조정은 여진을 건주삼위 일대의 건주여진과 해서위(海西衛) 일대의 해서여진 그리고 그 동부의 여진족들을 야인으로 여진족을 구분했다.
이후 오이라트와 몽골 세력 그리고 여진 부족들이 요동의 안정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산해관-개원-봉황성을 연결하여 요동도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의 축조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완성된 요동변장은 요동도사에 위협이 되었던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자 명나라의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는 국경으로 설정되었다.
요동변장 동쪽의 혼하 유역과 그 부근에는 건주삼위가 있었는데, 이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명의 요동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 동북쪽으로는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과 각축전을 벌이며 팽창을 시도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차하르 몽골의 투먼 자삭투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건주여진의 세력가 왕고(王杲) 및 왕올당(王兀堂) 등에 의해 여진의 요동 공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3.1.2. 건주여진의 발흥


건주여진으로부터 청나라가 발흥하기 시작한다.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한편 먼터무 이래 흥기하여 왕고의 통치를 받은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Suksuhu Aiman)의 허투 아라(Hetu Ala)에서 출생한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사망을 기회로 계모 컨저(Kenje)를 죽이고 허투 아라의 주인이 돼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아(Giocangga)의 여섯 형제의 가족들인 '''닝구타 일족'''을 통합하는 등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누르하치는 1586~89년 왕야부(완안부)와 후너허부(혼하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건주여진을 모두 합병했다. 그는 세력을 더욱 팽창하여 1606년에는 내칼카의 바야우드 오톡의 엉거더르 타이지에게 '쿤더런 칸'(쿤두런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1616년 2월에는 '겅옌 한'의 칭호를 취했다.

3.1.3. 누르하치의 즉위


이후 그는 금나라의 계승 의지를 표명하기 하여 자신의 나라 또한 '''아이신 구룬(Aisin Gurun)[12]'''으로 칭하고, 자신의 씨족명인 '교로'에 '아이신'을 덧붙여 '''아이신 교로(Aisin Gioro)'''라는 가족도 조직했다. 그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전하여 요동 지역을 석권하고 동시에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팽창했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통솔하는 명군에게 대패하고 몇달 뒤 병사하고 말았다.

3.2. 건국 이후



3.2.1. 몽골 복속


누르하치 사후 네 버이러 중 네 번째 버이러(Duici Beile)였던 8남 홍타이지는 2남 다이샨의 지지를 통해 한의 지위를 계승한 뒤, 동북쪽으로는 다구르어웡키, 서북쪽으로는 차하르 몽골, 서쪽으로는 명나라의 요서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후금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갔고, 1635년에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로 고쳤다.
그는 청해에서 릭단 칸이 병사하여 와해되어 버린 차하르 몽골을 복속했는데 릭단 칸의 아들인 어저이 콩고르는 부마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획득한 대원 전국옥새와 조선 정복 그리고 몽골 통합을 구실로[13] 1636년 4월 11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대원을 계승한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을 선포했다.

3.2.2. 조선 복속과 명의 패퇴


정묘호란을 통해 사실상 조선 문제를 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1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 문제를 트집잡고 공경을 요구했으며, 1636년 2월에는 자신의 존호례에 조선국왕의 동참을 요구하며 군신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이른바 '대명의리’를 기조로 삼고, 모문룡의 전폭적인 원조 및 후금과의 교섭 단절로 정권을 시작한 인조 정권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화친이 단절되어 전쟁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인조의 교서가 청 측에 입수되고 뿐만 아니라 4월 존호례에서 조선 사신들이 고두를 거부하여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홍 타이지는 친정을 통해 삼전도에서 조선국왕의 항례를 받아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양국의 국운을 건 전쟁을 계속한다. 명청교체기 혹은 명청 전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전쟁에서 청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를 연전연패의 길로 몰아 넣는다.
청 제국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1621년에 요동을, 1636년에 막남의 칼카 5부와 차하르 등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1642년에 송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리장성 동북 지역을 석권했다. 1629년부터 1643년까지는 여섯 차례 화북을 공격하여 무인지경으로 약탈함으로써 기근과 대규모 반란으로 마비된 행정력에 더욱 악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북경을 포위하기도 했다.[14]
청나라는 명나라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시킬 수준의 국력은 아니었다.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결국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인구에서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며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접촉 덕분에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신흥 국가인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국가의 역량이 모자랐다.

3.2.3. 기울어가는 명조


그러나 명나라의 대기근 그리고 자연 재해 등으로 반란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청군이 약탈전까지 벌여 명나라가 큰 타격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청나라는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었다. 명군의 서광계와 손원화 등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 측량과 각도 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 장전 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은 명군의 정예였다. 또한 이자성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산해관을 방비하던 오삼계 및 그 휘하의 명군은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북경을 점령하려던 청군에 합류하여 산해관을 열어주었다.
한편 당시 명나라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상당수가 총병일 명군을 상대로 하는 후금군은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 후 근접전을 벌였을 테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명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야 했다.
더구나 이자성 등이 명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신형 무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하기 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청의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게다가 명나라는 암군들[15]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도 장거정 등의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 압도적인 인구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명나라의 사정이 얼마나 안 좋았냐면, 환경 변화와 각종 재해로 쌀값이 7배나 오르는 현상이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고 우수하지 못한 황제들로[16] 인하여 재정이 파탄나고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수치적으로도 명나라의 국력이 순식간에 반토막 나고 추락하는 걸 보면 아찔할 정도다. 이때 명나라는 식량난이 너무 심해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풀을 먹고 심지어 썩은 송장을 먹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3.2.4. 순치제의 천자 공포


순치제와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들어온 직후, 자금성에서 정식으로 의례를 거행, 중화의 천자임을 만방에 공포했다. 하지만 이는 청나라 자체의 주장이었을 뿐,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옛 유신들이 오히려 남쪽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명나라의 황족들은 이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갈래갈래 나뉘어 서로 황제를 칭했는데, 이를 남명 정권이라고 한다. 허나 남명은 타고난 무능함 때문에 진격해오는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이나 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청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명 최후의 황제인 영력제를 잡아죽이고 중화권의 유일한 황제를 자처하게 된다.[17] 청나라가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남명 정권이 있던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흔히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고 뒤통수에 동전 크기만 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변발이다.[18] 일명 금전서미. 이 변발은 19세기 말 조선의 단발령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원나라의 몽골인들도 변발을 했지만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다른 이민족계 왕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라서 한족들에게는 큰 수치였고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19] 그리고 청나라는 변발을 거부하는 한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하여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3.2.5. 융화 정책 시도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순치제는 간신히 굴복 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20]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령 등을 발표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황비홍 머리로 불리는 이 변발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초기에는 장난에서 수만 명을 죽이고 장인시에서 대략 십만 명을 학살하는 등의 잔혹한 수단으로 강요했으나 나중에는 딱히 적극적으로 안 죽이고 혼란한 정세와 전쟁으로 그렇게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여러 이유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왔다.[21][22] 의복 역시 관리들에게는 만주족 의복을 강요하고 신민들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자 신민들이 죄다 만주족의 의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전족은 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 등이 적극적으로 전족을 제거하려고 해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청나라 시기에 다른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하였다. 청나라 황제들은 만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중시하여 전족을 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죽이기도 하였으나 전족만큼은 오히려 만주족에게까지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 청나라가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만한차별정책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입관 후 하급 행정구역인 부나 현의 수장은 한족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들에게 맡겼으나 상위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총독과 순무만은 팔기 소속이였다.

3.2.6. 전성기: 강희제


청나라는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 시기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강희제는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15세의 어린 나이로 권력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던 보정대신[23] 구왈갸 오보이를 숙청해버리며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번을 실시하며 남방의 후환을 정리했다.[24] 번들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혼자 황제가 되겠다는 헛꿈에 빠진 오삼계의 멍청한 헛물켜기로 결국 청나라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망했다.[25]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도 외몽골 지역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곳을 점거하고 있던 준가르 칸국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준가르 칸국의 잔존 세력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도망가 달라이 라마의 힘을 빌어 청나라에 대항하려 하자,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갈아치우는(!) 초강수를 두며 아예 티베트까지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넣어버렸다.
1683년에는 타이완으로 도망가 끊임없이 저항하던 정씨 왕국을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명나라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에게는 해징공의 작위를 내려 청나라 귀족으로 끌어들이는 노련한 유화책을 선보였다. 또한 사사건건 흑룡강 유역에서 충돌하던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장하였고, 이후 약 200여 년간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을 차단했다.[26]
강희제는 무려 6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재위하며 외치에 힘을 쏟았고, 타고난 능력으로 내정도 강화하며 청나라의 기틀을 다잡았다.[27]

3.2.7. 옹정제 시기


강희제의 뒤를 이어 넷째 아들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다.[28] 옹정제는 즉위 직후 흔들리는 황권을 막기 위해 황친들을 엄청나게 옥에 가두거나 죽여버렸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정세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또 옹정제는 타고난 워커홀릭으로,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부친 강희제가 상대적으로 외치에서 업적을 남겼다면, 옹정제는 내정에서 업적을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지정은제의 확립, 강희제 말기의 황권 다툼으로 흔들리던 황권의 공고화, 부정부패 근절, 군기처 등의 업적들이 있다. 특히 당시 극도로 정교한 동군연합 체제를 확실하게 굳혔고, 이로 인해 청나라의 황제는 한족의 천자이자 몽골의 대칸, 티베트의 법륜성왕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전무후무한 칭호를 한꺼번에 손에 넣게 되었다.
한편 옹정제는 이처럼 하루하루를 일만 하다가, 결국 재위한 지 13년 만에 58세의 일기에 과로로 숨졌다. 그의 뒤를 이어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이었던 홍력이 황위에 올랐는데, 이 자가 바로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건륭제이다.

3.2.8. 건륭제 시기


건륭제는 24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건륭제는 즉위 후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 신장 지역에 대대적인 원정대를 보내 서부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였으며,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깔끔하게 쓸어버렸다. 그의 재위기에 청나라의 국력은 그 정점을 찍었으며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는 심지어 서양의 프랑스, 영국, 스페인 따위와 견주어도 압도적일 정도였다.
건륭제는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사고전서를 발행하며 문학을 집대성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도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경을 말년에 접견하며 서양과의 교류를 슬슬 시작하였다.[29] 청나라는 이때에 중국 역사상 가장 기나긴 전성기를 맞으며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무려 130여 년에 달하는 이 청나라의 전성기를 '강건성세'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심지어 현재의 중국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자랑하였으며, 중국의 워낙 풍요로운 문물 탓에 전세계의 상인들이 몰려 교역을 하는 통에 세계의 은이 청나라로 빨려들어왔다.[30]
그러나 건륭제의 통치는 말년에 그 빛이 퇴색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너무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가자 부정부패가 점차 판을 치기 시작했고, 군대 기강은 해이해졌다. 게다가 건륭제가 미남 니오후루 허션에 빠진 바람에[31] 그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하면서 청나라의 붕괴는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허션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32]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속으로는 깊숙히 썩어들어갔다. 건륭제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건륭제는 청나라에 입맛에 맞지 않는 서적들과 학문을 탄압하는 정책, 즉 문자의 옥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물론 강희제와 옹정제도 어느 정도 학문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단순하게 청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는 목소리나 개혁 요구 등까지 모두 없애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그저 청나라 중앙정부의 뜻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학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는 결국 중국 학문의 소실과 퇴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세의 건륭제에 대한 평가는 꽤 엇갈리는데, 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라는 평도 있는 반면 부정부패를 심화시키고 나라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지못한 암군이라는 평도 있다.
어쨌든 60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 기간[33] 동안에는 청나라의 병폐가 눈에 띄일 정도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며, 그 폐해는 그의 후계자인 가경제 시기에 들어서야 보이기 시작했으니 건륭제 시기가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던 것 만은 분명하다.

3.2.9. 한족 차별 문제


청나라는 전성기에도 한족과의 차별이 상당히 심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만주족이 한족화되기는 하였으나[34], 그렇다고 만주족과 한족 간의 차별이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나라 초기에 처음 한족 대신을 임명했을 때 같은 직책이라 하더라도 팔기인이 한족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가 나중에 동급으로 조정되지만, 만한차별은 청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애초에 인구비율을 보면 만한병용제부터가 한족에 대한 차별이었다. 거기다 청나라 황제들은 한족들 앞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짐의 자식이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35] 만주족들만 있을 때는 한족들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3.2.10. 황후와 총독 제도


또한 황후는 만주기인[36]이어야 했으며[37], 공주들도 한족에게 시집보내지 않은데다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대표적으로 건륭제가 있다. 이 경우는 옹정제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건륭제가 유일한 만주족 후궁 소생이었다. 다만, 한군기인 출신 후궁의 소생으로 가경제가 있기도 한다.
청대 지방제도에서 최고 지방관은 총독과 순무였다. 총독은 초기 정2품이다가 옹정제 때를 거치며 병부상서를 겸직하는 형태로 종1품이 되고, 순무는 종 2품이다가 병부시랑을 겸직하는 형재로 정2품이 되었다. 총독은 1개 이상의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명나라 때는 비상설직이었으나 명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한편 순무는 1개 성만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총독과 마찬가지로 명 초기에 비상설직으로 설치되어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보통 총독은 만주족이 임명되고 순무는 한족으로 임명되었다. 품계가 차이나긴 하나 직무상 동등, 중첩되어 상호 견제를 유도하였다. 총독과 순무는 황제에 직속되었고, 황제에게 밀접을 상주할 권한이 있어 황제는 이를 통해 지방을 명확히 파악하고 감시할 수 있었다.

3.2.11. 중앙정부구조


중앙정부의 경우는 아예 초창기에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만군기인''', 몽골족으로 구성된 '''몽골기인''', 한족 출신으로 팔기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인 '''한군기인'''만이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을 임명하는 제도인 '''만한병용제'''가 시행된 뒤에는 내각대학사, 6부상서, 6부시랑, 군기대신 등의 직책에 각 1명씩 2명으로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을 따로 임명하였다.(몽골족은 수적으로 적어 이민족 담당기관인 이번원의 정족수를 채우기도 힘들었다.)
거기다 한족은 군대와 관련된 무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다만 녹영군의 직책은 받았다. 무관직책이 한족에게 개방된 때는 태평천국 운동 때에 가서였는데 당시 팔기군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퇴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이때도 만주족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을 의미하는 '''멸청흥한(滅淸興漢)'''이니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을 의미하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니 하는 구호와 쑨원의 삼민주의의 민족의 뜻이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만 봐도 한족과 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고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도 건륭제 때부터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심각해지자 한족의 풍습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지고 의도적으로 만주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3.2.12. 다중 수도 체제


다중 수도 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특히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황사', 즉 황제의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이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연회상에서도 황제와 동석할 수 있었고, 티베트는 거의 자치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의 자율성이 허락되었다.

3.3. 멸망



3.3.1. 팔기군의 쇠퇴


[image]
열강에게 분할 당하는 청,[38][39]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청나라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기술적, 문화적인 발전을 거의 이뤄내지 않았다. 유럽 문명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터지며 급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던 반면 청나라는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40]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승마궁술에 대한 집착 혹은 한족의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41], 궁기병이 아직도 군사력의 척도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팔기군의 기마궁사는 화승총을 쏘는 준가르나 신장 지역 위구르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준가르 정복 전쟁화에서 보듯이 청군도 다수의 포병과 화승총병을 운영했으며, 단지 기병들이 총을 쏘지 않고 활을 쏜것일 뿐이다. 특히 현대식 소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상에서는 활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42]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43]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팔기군의 쇠퇴는 유목민 정복왕조라면 으레 다 겪는 것이었다. 특히 도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군사력 유지를 하려면 대규모 수렵 훈련을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들의 고향인 만주와 달리 중원에는 이렇다 할 수렵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건륭제까지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무란위장이라는 군사 훈련 목적의 수렵장을 설치하는 식으로 군사력을 유지했다. 또한 만주족 전통 유희 겸 훈련인 빙희 시합도 주기적으로 열었다. 게다가 건륭제까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실전능력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18세기에도 많은 훈련량이 필요한 궁기병을 운용했다는 건 그들이 얼마나 팔기군의 군사력 유지에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건륭제 이후부터는 실전에서의 전투 능력을 잃고 그나마 조정에서 억지로 시키던 군사훈련도 지지부진해져 팔기군은 전투력을 급속도로 잃게 된다. 신분은 군인인데, 그냥 한족보다 지위가 더 높은 공무원에 불과했던 셈. 즉, 청나라의 군사력 쇠퇴는 당시의 모든 후진적 전제군주제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에 유목민 정복왕조의 문제점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륭제가 물러나고 즉위한 가경제 시기부터 청나라는 갈수록 기울어만 갔다. 특히 건륭제 시기부터 쌓여온 부정부패로 인해 농민들에 대한 세금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참다못한 농민들은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44] 게다가 서서히 서양 세력들이 중국 내부에 아편 등 마약들을 수출하며 재정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했고, 만주족과 한족 가릴 것 없이 무능과 타락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경제도 나름 반란을 진압하고, 개혁을 실시하려 들었으나 이미 뿌리가 썩은 청나라에게 이는 너무 미약한 시도였을 뿐이었다.

3.3.2. 외세에 시달리다


가경제 사후에는 도광제가 제위에 올랐다. 도광제는 가경제 시기에 직접 총을 쏘며 반란을 진압할 정도의 패기를 보였으나, 황제가 된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도광제 시기에는 1차 아편전쟁과 난징 조약[45]이 맺어지는 등 점차 청나라가 서양에 종속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청나라의 무너지는 국력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등 청나라는 쇠퇴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도광제는 무려 30년 동안이나 재위했으나, 별다른 개혁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제위에 오른 함풍제 때에 청나라는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함풍제 즉위 이듬해인 1851년에 중국 최대이자 최악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중국 남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와중에 약삭빠른 서양 열강들은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엄청난 이권을 떼어먹어갔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의화단 운동 때에는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와 황제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을 약탈하고 작살내버렸다. 함풍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튀었고, 이후 속을 끓이며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는지 연회나 즐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3.3.3. 천자국의 기상을 잃다


함풍제의 사망 이후, 마지막 직계 황제인 동치제가 즉위했다. 이후 함풍제의 부인인 동태후서태후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았다. 동치제는 성년이 된 이후 서태후로부터 권력을 가지고 오려 시도하였으나, 고집센 서태후가 이를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여색에 탐닉하다가 죽었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중체서용', 서양의 기술만을 빌려 온다는 내용의 양무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결과는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을 당하며,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청나라는 이후 서양과 일본에 이중삼중으로 얻어터지며 훌륭한 전투력 측정기 정도로 전락하는데, 심지어 한 때 반 속국이었던 대한제국에게조차 간도를 빼앗길 뻔한 등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수준으로 추락하였고, 결국 말기의 청나라는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다.

3.3.4. 마지막 부흥 시도


새롭게 즉위한 광서제는 그나마 개혁에 열의를 보였다. 캉유웨이 등을 임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고, 입헌군주정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 등의 보수파들의 극렬한 반발로 100여일 만에 중지되었고, 광서제는 서태후 등을 쫒아내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버렸다.[46] 이후 광서제는 독살당했고[47], 서태후는 1908년에 청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2살의 나이에 황제로 옹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이상 과거처럼 통치를 할 수 없게 변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맨틀을 넘어 내핵까지 추락했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태평천국 운동 때도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가 태평천국에 가담한 한인들이 만주족과 청에 대한 반감으로 만주족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군이 태평천국군 포로들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의 지휘관들의 경우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후 신해혁명 때는 수많은 만주족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3.3.5. 신해혁명과 제정의 붕괴


우창 봉기
신해혁명의 시발점으로 봉기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본격적인 청 멸망이 시작되었다.
선통제가 즉위하고 난지 3년도 안된 1911년에는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였다. 지방의 군 부대들도 청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자 청 왕조는 지방 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 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배신으로 흥했다가 한족의 배신으로 망하는 아이러니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북양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 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이 조건으로 푸이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억눌렀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고 만다.
특히 북양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 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1924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푸이는 톈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제스는 푸이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푸이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베이핑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쑨뎬잉이 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동릉 도굴 사건이 처벌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야명주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 데 쓰였단 소문에 푸이는 난징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푸이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48]

4.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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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청의 강역. 청은 전성기에 파키스탄카슈미르, 카자흐스탄 잠발리주와 알마티주, 키르기스스탄, 투바 인민 공화국, 러시아 연해주하바롭스크, 아무르 주, 몽골[49]을 지배했다.[50]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원나라를 제외하고 중국땅에 존재했던 국가들중 가장 영토가 넒었다.''' 청말 민초 이래 캐발살내어 지금 중국이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내몽골, 티베트위구르만이 아니라 연해주 즉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 카자흐스탄 동부 일부 지역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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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청의 강역.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과의 여러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잃었으며, 투바외몽골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인 위구르티베트, 내몽골, 칭하이 성은 현 중국의 영토이다.

5. 문화


청나라가 130여 년에 달하는 워낙 오랜 전성기를 이끈 덕분에,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는 한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문화를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등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51]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열하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타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스스로가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타 문화에 관용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포탈라궁을 본따 지었는데, 타민족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52]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나 옹정제 등은 황제가 주도해서 이들을 때려잡았고, 이때문에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허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 건륭제 시기 말에 이르자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많은 고위급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 나이많은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 내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나이많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 으로 선회하면서 청나라 사회는 갈수록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에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 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53]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본관을 떠올리면 쉽다.[54][55][56]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57]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다만 만주 수렵민족 시절의 씨족 사회가 영향을 주어서 만주족이 성씨나 풀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중원에 입관하면서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게 생겨났는데,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 글자 성씨처럼 쓰는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이름인 '오보이'의 첫글자를 따서 '오 대인'으로 불린 게 대표적이다.

5.1. 의복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치파오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

6.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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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당시 세계의 GDP 비교 그래프이다. 당시 청나라가 이미 쇠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것도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청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7세기 말이 되자 명나라 침략 과정에서 입었던 경제적 피해들도 어느 정도 복구가 이루어졌고, 청나라가 농업을 대대적으로 진흥함에 따라 경작지가 증가하고 인구가 명 말기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인 3억 명으로 증가했다.[58] 아메리카 대륙에서 땅콩, 고구마 등이 유입되었고, 해금령을 내려 무역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해외 교역량도 증가했다. 청나라는 광동 체제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직 광저우 한 곳에서만 해외 교류를 허가하고 조정의 허락을 받은 공행들만 서양 상인들과의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외국인 입장에서야 전근대적인 독점 제도였겠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는 해외와의 무분별한 교류를 막고 은 유출을 막을 수 있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제도였다.[59]
또한 강희제 시기에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건설, 남북의 교류를 활성화하면서 지역 간의 무역이 폭증하며 내수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톡톡히 거두었다. 특히 이 대운하가 경제적 효과가 엄청났는데, 청 조정은 이 운하를 이용하여 북부의 베이징으로 밀, 소금, 비단 등 필수품과 사치품들을 남쪽에서부터 운송해와 필요를 채웠으며, 남부의 상인들은 이 물건들을 수도의 엘리트층에게 판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60]명나라 말기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경제는 커녕 기본적인 내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61] 청나라 들어서는 황제들이 직접 치수와 경제를 책임지고 떠맡았다. 이덕분에 중국 전역에서 상품작물의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단순히 자급자족용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들이 생기자 당연히 중소형도시들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현재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시들도 정말 웬만한 대도시급이 아니면 그 역사가 청나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62]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 지역의 상인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어 비단과 차, 도자기 등의 고급 상품들을 사가면서 중국에는 그야말로 은이 쏟아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빼앗아온 은의 80%가 동남아시아를 거쳐 그대로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통계 자료가 있을 정도이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강남 지방에서는 멕시코에서 흘러들어온 은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와미 은광 등 세계 최대 규모의 은 광산을 가지고 있던 에도 막부도 중국으로의 은 유출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때문에 나중에는 중국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세기에 중국에서 은의 가치는 유럽보다 2배 가량이나 더 높았다. 중국에서 은의 가치를 훨씬 더 높게 쳐주자 유럽의 상인들이 바리바리 은을 싸들고 중국을 찾아간 것이다. 아무튼 중국에서는 이렇게 유입된 은을 이용하여 옹정제 시기에는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63] 다만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된 18세기 중반이나 19세기부터는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이같은 조세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못했고, 이는 사회 불안정을 불러와 청나라의 멸망을 촉진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크게 전근대 중국의 경제사는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지역 간에 사치품, 필수품 교류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송나라 시대이고, 두 번째가 바로 1550년부터 1800년대까지 진행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점차 교환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의 권한이 굉장히 강화되었다. 특히 청나라 시기에는 서양과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으면서 권력을 거머쥐기도 했다.
1인당 GDP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개인이 풍요롭게 살았던 때는 북송 시대이다. 1840년 기준으로 26.5테일이었으나, 명나라 시기 들어 19테일로 줄어들었고 청나라 들어서는 14테일 수준으로, 거의 절반에 가깝게 떨어졌다.[64] 다만 이걸 보고 청나라 시대의 개인들이 세계적으로 못살았다고 생각하면 안되는게, 북송 시기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국가였다. 다만 1300년대 들어서는 1인당 gdp에서 이탈리아에게 추월당했고, 명나라 시기에 들어서도 영국의 90%에 못미칠정도로 떨어졌다. 나라에 망조가 들어가던 19세기 중반 즈음에는 영국의 20%에도 미치지못할 정도였다.
1840년 당시 청나라의 1인당 gdp를 당시 최강대국인 대영제국과 비교해 보았을 때, 중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4.95% 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의 물가가 영국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수치가 23.57%까지는 올라가기도 한다. 그래봤자 영국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치이기는 하다.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1840년대 청나라의 1인당 gdp는 2020년 기준으로 297만원 정도였다. 당시 원 기준으로 1,260만원 정도의 1인당 gdp를 자랑하던 영국과 비교하면 훨씬 뒤떨어지는 셈.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를 상당히 장려했다. 명나라 시기에는 정부가 광산 산업을 독점했기에, 생산력이 북송 시기나 청나라 시기에 비해서도 꽤나 낮았다.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사업에서 얻은 이익의 15분의 1을 나라에 바쳐야 했고, 그 외에도 보호비, 뇌물 등으로 상당수가 관료들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때문에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사업을 기피했고, 나라가 거의 광산을 독점하다시피하자 생산력이 당연히 낮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광산업에서 거의 손을 놔버렸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한 철과 금, 은 따위의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하면서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광산업이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청 중반기에 들어서부터는 초기 형태의 은행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만 하는 상인들의 수는 늘었다. 이 상인들은 무거운 금과 은 따위를 이 먼거리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니 돈을 모아 상단을 설립하였고, 출발하기 전에 미리 은을 맡겨놓고 차용증을 받은 후 도착한 이후에 해당 상단 지점을 찾아가 증서를 보여주고 은을 받았던 것이다. 18세기 즈음에 다다르자 이러한 은행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자본의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중국 대륙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흔히 중국의 왕조들이 상인들을 천시하고 경제를 옥죄었다는 편견이 있는데, 따지고 들어가보면 완벽한 사실은 아니다. 7세기에 당나라가 경제에서 손을 떼버리는 쪽의 정책을 펼치면서 후대의 왕조들은 모두 경제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고, 그냥 되는대로 놔두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명나라의 경우 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소금 등 일부 필수품들을 제외하면 국가가 독점하거나 간섭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청나라도 당연히 이같은 선례를 따라갔고, 경제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간섭이 뜸하니 시장경제가 활기를 찾았고, 대상인들이 등장하며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65]

7. 군대


청나라의 군대는 1700년대 내내, 그리고 18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의 군대들 중 하나였다. 역사는 누르하치가 창건한 만주족의 팔기군 시절로 거슬러올라가는데,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단순한 군대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할도 겸하게 하였고, 거의 호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겼다. 이후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는 만주족의 팔기를 본따 몽골족들로만 이루어진 몽골팔기, 투항해온 한족들로만 이루어진 한군팔기 등을 새롭게 만들어 군력을 강화하였다. 1644년에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 투항해온 한족이나 명나라 군인들을 이용해서는 녹영군[66]을 창설했는데, 워낙 녹영군의 수가 많았던 지라 팔기군들을 다 합쳐도 녹영군의 수의 3분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청나라 초기의 군대는 명나라 시절에 물려받은 화기를 나름대로 활용하여 그 전성기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평화기가 지나치게 오래가자, 만주족이나 녹영군이나 마찬가지로 요새에 짱박혀있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실전 경험이 줄어들며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희제 때와 옹정제 시기,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도 서부 지역으로 몇 차례 군사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18세기 말 즈음에 들어서는 청군의 규모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반면 효율성은 거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때문에 가경제 시기에는 낫과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한족 반란군에게도 쩔쩔맸고, 태평천국의 난 때에도 반란군들을 제대로 진압하기는 커녕 쫒겨다니기에 급급했다.[67] 청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의 열세였다. 명나라를 진압한 이후 청나라의 화포와 무기 등은 거의 진보하지 못했고, 1700년대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총, 군함, 대포 등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데에 반하여 중국 무기는 거의 17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수십만 청병이 단 2만 명도 되지 않는 서구식 군대에 무너지기도 했다.
나라가 망할 기운이 들자 더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조정은 드디어 노후화된 군대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몇 만도 안되는 서구 열강 군대에게 청군이 농락당하자, 증국번, 이홍장, 만주족 출신 문상 등은 서구식 무기들을 수용하여 서양식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신군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지방에서 회군을 조직했고, 문상과 몇몇 청 황친들은 베이징에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신기영은 대략 2,5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손쉽게 수많은 강도 떼들을 진압하자 황실도 이에 마음이 움직여 대대적인 서구식 군대의 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한족, 만주족 관료들은 힘을 합쳐 서구식 함대[68]와 군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푸저우에 군항을 설치하여 15척에 달하는 군함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난징, 톈진, 란저우 등에도 새로운 군사기지들이 설치되며 외형상으로는 현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비상이 걸렸다. 열강들은 중국이 힘을 키우면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69]
허나 이 근대화는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에게 대패하며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서구 열강들과 중국은 무조건 청나라의 승리를 점쳤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일본이 훨씬 압도적인 군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먹고 본격적인 군대 현대화에 착수한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바로 군대 근대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때 혁명군과 타협을 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7.1. 해군


청나라 초기에는 명나라의 사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해금령을 펼쳤다. 또한 만주족은 주로 말을 타던 기병 위주였기에, 배를 타야하는 수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청나라의 해군은 대부분 한족이었다. 청나라는 항저우와 전장에 수군 기지를 두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이 주로 대만 섬으로 도망간 정성공의 약탈 부대나 동남아의 해적들, 그리고 왜구들로부터 청나라 해안가를 방비하는 역할을 했다.
1661년에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지린성에 해군 기지를 새롭게 세웠으며, 팔기군을 해군에 배치하기도 했다. 1677년에는 푸젠성에 대만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독자적인 해군 기지를 따로 창설하였으며, 이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정씨 왕국을 꺾고 대만 섬을 청나라의 지배 하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비슷하게 해군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유럽과는 다르게 대양 해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해안가에 주둔하면서 외적들의 침입을 막고 방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해안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크게 황해 쪽과 가까운 보하이해, 장쑤성저장성 인근 해안, 타이완 해협 인근 해안, 그리고 광동성 해안으로 나누었다. 보하이해에는 덩저우 함대, 자오저우 함대, 뤼순 함대, 톈진 함대 등이 주둔했으며, 장쑤성과 저장성에는 장난 함대와 저장 함대, 타이완에는 푸젠 함대, 광동 해안에는 광동 총독 직속 함대와 광동 함대가 각각 주둔했다.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해군선에는 각각 대략 40여 명의 수병들이 승선하였으며, 네덜란드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포와 총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해군은 건륭제 말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백련교의 난과 묘족의 난 등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 조정은 해군보다 육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기강이 날로 무너져가던 해군은 붕괴에 가속도가 붙으며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때문에 아편 전쟁 때에 이르자 청나라의 해군은 서구식 무기를 갖춘 함선들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수병들마저 '이렇게 약했었나?'라고 놀랄 정도.

8. 평가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내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70]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旗人)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

이렇게 영토가 넓고 민족이 다양했던 만큼 단순한 한만국가보다는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비유럽권 중에서 동군연합을 했던 몇 안 되는 국가이며[71] 중국사에서는 유일하다. 그래서 지역 및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72]으로, 북방의 몽골지역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신강영하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73]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키메라[74]의 제국'''"이라고도 한다. 청나라의 황제는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써 얻은 군사력을 중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유지, 통솔했고 티베트 불교의 힘으로 전국을 하나로 만들었다. 오죽하면 명나라의 명군이 청나라에 오면 평범한 군주 수준이라는 평이 있을정도. 이 정도면 중동을 포함해도 전 아시아 동군연합의 끝판왕이다. 이후 19세기 후반 청은 내우외환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사실상 중화제국화 하였다.[75][76]
그러나 문명을 볼 때 학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및 제조 금지[77] 등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특히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청의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크게 봐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몇몇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의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들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을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하려고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영국은 근대 국가였었고, 온 힘을 쏟는 데도 없었던 국가였기에, 시대를 뛰어넘는 적이 아닌 네덜란드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던 영국과의 비교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도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던 국가라 해전에서 유럽은 물론 비유럽까지 아주 탈탈 털고 다녔으나, 대영제국과 네덜란드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 때나 황제들[78]이 자기들이 말을 타고 중국을 정복했다고 한족 지배층들이 하던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던 면이 있어서 중국 학계가 상대적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말기에도 만주족 지배층들은 서구화 능력도 그렇고 의지도 별로 없었으며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던 것들도 물론 있었지만 퇴보했던 것들도 있었다.
당시 만주인들을 봐도 문명을 이끄는 데 아무래도 유목민의 기풍과 문화가 있어서 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 환빠의 영향이 강할 때 나온 서적의 영향인지 희한하게도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에 대해서 사서에도 쓰여진 단점을 지적하지 않고 장점만 거론되는 경향이 있는데[79],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들도 딱히 초인적 존재는 아니라 명백히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구 증감 같은 양적인 것들을 단순하게 비교할 때도 시간 정도는 고려를 해야 한다.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지배층들이 보통 지금의 지식인 계층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도 생각보다 영향력이 엄청났고 수학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에 기여한 학자들을 찾아보면 지배층 출신들이 많다. 심지어 가난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리스 학자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불로소득 계층이 많았다.
반대로 유목민들은 정작 지배층인 유목민들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 물론 공부를 하기 시작한 유목민들도 있었고 그러다 정주민이 되기도 했다.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 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 단,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건 생각보다 잘한 유목민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러시아처럼 자기들을 정복한 유목민들을 보고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니 어쩌고 하며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곳들도 있다.
중국에서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매우 싫어하며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80]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하며, 19세기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이 안 되고 열강의 각축에 밀린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런 한족 우월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주족은 중국의 산타클로스’란 말도 있다. 사실 명조까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신장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모두 만주족이 정복하여 중국에 붙인 지역이기 때문. 만주족 왕조가 한족 왕조보다 유능했다고 은근히 돌려까는 내용이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몽골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81]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탄누투바, 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82]
물론 투바위구르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위구르는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는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건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이때문에 유튜브 같은 데서 보면 만주족은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83]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들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 만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 칸이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외몽골의 할하인들에 비하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적은 게 아니라 정확히는 별 신경 안 쓰고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노예였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명나라 뿐만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 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84]

9. 상징



9.1. 국기


'''황룡기(黃龍旗)'''
[image]
[image]
1862~1889
1889~1912
원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정식국기가 따로 없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의 정식 국기가 필요했는데, 권력자인 서태후의 결정으로 1862년 10월 17일 청나라의 국기가 삼각의 황룡기로 결정 되었다가 1889년 사각의 황룡기로 바뀐다. 그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기 또는 국장이 없었고 그나마 의장기나 팔기군의 팔기를 사용했다. 국기의 모티브 역시 팔기였다. 따라서 해당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황룡기가 나온다면 이는 고증오류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중국 황제의 상징 색[85]이며,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위엄이라고 한다.
청나라가 멸망한지 오래인 현재는 사실상 만주족을 상징하는 기로 쓰인다

9.2. 국장


청나라의 국장
청나라의 국장. 위의 사진을 모티브로 채색된 것. 또 다른 버전.
역대 중국의 국장들. 제일 밑에 청나라의 국장들이 나온다.
청나라도 국기와 함께 국장(나라의 문장)도 쓰였다. 팔기군의 팔기처럼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노란 깃발에 바깥 테두리는 파란색 계열이며, 배와 등의 비늘, 뿔, 혀가 붉고 몸이 푸른 용이 새겨져 있는데, 청나라 시대의 국기에서 따왔다. 용 주변에 태양, 흰 구름이 연기처럼 표현되어 있다.

9.3. 국가(國歌)


1911년 공식 국가가 지정되었지만 곧바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망하여 단 131일 동안만 사용되었다.


10.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제외된다.
  • 시호는 각주로 병기하되 만주식과 중국식의 순서로 한다.
  • 한호는 만주식 군주 칭호, 칸호는 몽골식 군주 칭호이며 연호는 00제로 알려진 중국식을 먼저 쓰고 만주식을 뒤에 쓴다. 세조 때부터는 한호가 연호 + 한(ex: 순치제는 이지슌 다산 한, 강희제는 얼허 타이핀 한)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생략한다.
  • 국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는 생략한다.

10.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대수
묘호
연호
시호
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86]
[87]
[88]
-
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02
태종(太宗)
천총(天總, 1627년 ~ 1636년 3월)[89]
[90]
[91]
[92]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36년 5월 15일
9년 208일
소릉(昭陵)

10.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2
태종
(太宗)
숭덕(崇德, 1636년 4월 ~ 1643년)[93]
[94]
[95]
홍타이지
(皇太極)
1636년 5월 15일
1643년 9월 21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96][97]
-
도르곤
(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順治, 1644년 ~ 1661년)[98]
[99]
[100]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康熙, 1662년 ~ 1722년)[101]
[102]
[103]
히오완예이(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雍正, 1723년 ~ 1735년)[104]
[105]
[106]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乾隆, 1735년 ~ 1796년)[107]
[108]
[109]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嘉慶, 1796년 ~ 1820년)[110]
[111]
[112]
용얀(顒琰)[113]
1796년 2월 10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道光, 1821년 ~ 1850년)[114]
[115]
[116]
민닝(旻寧)[117]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咸豊, 1851년 ~ 1861년 7월)[118]
[119]
[120]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同治, 1862년 ~ 1874년)[121]
[122]
[123]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124]
[125]
[126]
자이티얀
(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127]
-[128]
[129]
푸이(溥儀)[130]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131]

10.3.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재위 기간[132]
능호
비고
-
충의신무관성대제
(忠義神武關聖大帝)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개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開聖大帝)
관우(關羽)
-
관릉(關陵)
함풍제 추존, 후한 말의 인물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
먼터무(孟特穆)
1405년 ~ 1433년
-
태조 추숭, 태조의 6대조
-
순황제(順皇帝)
충샨(充善)
1433년 ~ 1467년
-
태조 추숭, 태조의 5대조
-
흥황제(興皇帝)
톨로(妥羅)
1467년 ~ 148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4대조
-
정황제(正皇帝)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흥조(興祖)
직황제(直皇帝)
푸만(福滿)
1522년 ~ 154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경조(景祖)
익황제(翼皇帝)
기오창가(覺昌安)
1542년 ~ 157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현조(顯祖)
선황제(先皇帝)
탁시(塔克世)
1571년 ~ 1583년
흥릉(興陵)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성종(成宗)
무덕수원광업정공안
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
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
(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
-
-
세조 추숭, 태조의 14남.
추후 삭탈

10.4. 종합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
-
-
-
,<만주족 시조(始祖)>,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
-
-
조조
(肇祖)
-
[133]
-
먼터무
(孟特穆)
1405년
1433년
38년
-
-
-
-
-
-
충샨
(充善)
1433년
1467년
70년
-
-
-
-
-
-
톨로
(妥羅)
1467년
1481년
28년
-
-
-
-
-
-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1522년
43년
-
-
흥조
(興祖)
-
[134]
-
푸만(福滿)
1522년
1542년
24년
흥경릉
(興景陵)
-
경조
(景祖)
-
[135]
-
기오창가
(覺昌安)
1542년
1571년
33년
-
-
현조
(顯祖)
-
[136]
-
탁시
(塔克世)
1571년
1583년
14년
흥릉(興陵)
-
-
-
-
-
누르하치
(努爾合赤)
1583년
1616년
33년
-
01
태조
(太祖)
천명
(天命, 1616년 ~ 1626년)[137]
[138]
[139]
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
-
천총
(天總, 1627년 ~ 1636년 3월)[140]
-
-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43년 9월 21일
9년 208일
-
02
태종
(太宗)
숭덕
(崇德, 1636년 4월 ~ 1643년)[141]
[142]
[143]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9월 30일
1636년 5월 15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144]
-
도르곤
(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
(順治, 1644년 ~ 1661년)[145]
[146]
[147]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
(康熙, 1662년 ~ 1722년)[148]
[149]
[150]
히오완예이
(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
(雍正, 1723년 ~ 1735년)[151]
[152]
[153]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
(乾隆, 1735년 ~ 1795년)[154]
[155]
[156]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
(嘉慶, 1796년 ~ 1820년)[157]
[158]
[159]
용얀
(顒琰)[160]
1795년 2월 9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
(道光, 1821년 ~ 1850년)[161]
[162]
[163]
민닝
(旻寧)[164]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
(咸豊, 1851년 ~ 1861년 7월)[165]
[166]
[167]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
(同治, 1862년 ~ 1874년)[168]
[169]
[170]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
(光緖, 1875년 ~ 1908년)[171]
[172]
[173]
자이티얀
(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
(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174]
-[175]
[176]
푸이
(溥儀)[177]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178]

11. 항렬


강희제 시대에 아들 대의 항렬자가 윤(胤: 또는 允)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옹정제의 휘 윤진(胤禛)에서 나타난다. 손자 항렬은 홍(弘: 건륭제), 증손자 항렬은 영(永) 또는 옹(顒: 가경제)로 정해졌다. 건륭제 대에 와서 손자대 항렬로 면(綿) 또는 민(旻: 도광제)이, 증손자대 항렬로 혁(奕: 함풍제), 고손자대 항렬로 재(載: 동치제, 광서제)를 정하고, 도광제 대에 추가로 부(溥: 선통제), 육(毓), 항(恒), 계(啟)가, 함풍제 대에 그에 덧붙여 도(燾), 개(闓), 증(增), 기(祺)를 더했다. 1938년에 애신각라 족보를 수속(修續)함과 동시에 부의는 경지개서(敬志開瑞),석영원성(錫英源盛),정조무상(正兆懋祥) 등 12글자를 더 추가했다.
청나라 종법상 '''항렬 하나에 황제 한 명'''이 원칙이라 청나라 말기에 동치제 다음으로 항렬이 부(傅)인 사람이 황위에 올라야 했지만, 서태후가 동치제와 항렬이 같은 광서제를 동치제 다음 황제로 옹립하여 이 원칙을 깨트렸다.

12. 계보도


추존 황제
현조 탁시
'''1.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
'''2.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3. 아이신기오로
푸린
'''
'''4.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
'''
'''5. 아이신기오로
인전
'''
'''6. 아이신기오로
훙리
'''
'''7. 아이신기오로
용얀
'''
'''8. 아이신기오로
민닝
'''
'''9. 아이신기오로
이주
'''
혁현
혁종
'''10. 아이신기오로
자이슌
'''
'''11.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
재풍
재의

'''12. 아이신기오로
푸이
'''
아이신기오로
푸쥔

청의 12명의 황제 중 5명[179]이 10살이 되기 전에 황제로 즉위했다.
또한 청 후기의 황제들(도광제부터)을 보면, 초기 황제들과 달리 궁중 생활만 해서 그런지 대체로 얄팍한 체형에 심지어 대부분 단명했다.

13. 대외 관계


대외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점으로,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체결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관련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긴 이유는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이던 표트르 1세와 이복 누나 소피야 간의 대립으로 내부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군사적으론 유리했으나 청에게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내주는 등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이는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이자성의 순나라가 제대로 성공하여 약 300년 가까이 이어진다든가, 삼번의 난이 성공한다든가, 아예 명나라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여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등을 가정해도 말이다.
평등 조약이라는 것은 중화사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된다.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조약문에는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만주는 한자 문화권이 아니였기 때문에 지리상으로 북방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남쪽에있었던 한족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고 한문으로 적을 이유도 없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참여했던 통궈강의 경우는 한족 출신이지만 팔기에 편입되어 있었고 1688년 만주족으로 변경을 하게 된다.[180]
후대의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한참 취약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지만 당장 한족 왕조인 북송요나라, 서하와의 군사적 충돌 문제 탓에 다른 한족 왕조들에 비해서, 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보다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중화 사상을 추구하지 못했다. 상국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명목상 북송의 제후국이었던 고려 또한 여요전쟁을 겪은 후부터는 명목상 북송과 요나라에 이중으로 사대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면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내고 평화 협정을 맺을 때 대외적으로는 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대내적으로는 중화 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일종의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13.1. 원(元)


원나라명나라에게 대도를 뺏기고 북쪽 내몽골 및 만주 지역으로 물러가서 북원을 세웠다. 그 후로 명나라중국 대륙을 빼앗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실제로 알탄 칸 때는 경술의 변을 통해 거의 원나라 부활 일보직전까지 성공했기까지 했으나 알탄 칸의 사후 약체화되었고, 외몽골의 오이라트와도 고비 사막을 경계로 툭하면 전투를 벌여 쇠약해진 상태에서 후금이 팽창하자 북원의 후신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 칸이 대원진국옥새를 후금의 홍타이지 칸에게 바치고, 후금은 대원옥새를 바탕으로 중국의 황제를 선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황제국을 선포한다.
이후 청나라는 북원의 영역인 내몽골과 만주 흥안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 왕공들을 대거 팔기군에 합류, 막강한 기병 전력을 갖고 명과 조선을 털어버리며 특히 조선에게는 희대의 굴욕을 주기까지 했다. 차하르는 청나라와의 연합으로 실질적으로도 내몽골 최강 세력이 된다. 그러나 청나라는 다른 몽골인들을 매우 탄압하였는데, 유목민인 그들에게 영역을 정해주고 그 영역을 벗어나면 심각한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몽골인 탄압이 정점에 이른 게 준가르를 멸망시킬 때였으며, 이때문에 오이라트인들은 몽골계 민족 중에서 청나라의 탄압을 가장 혹독하게 받은 민족이 되었다.
청나라와 관계를 가진 건 북원이지만, 북원도 원의 일부이자 연장선이니 원이라 표칭한다. 실제로 대원진국옥새를 갖고 있던 차하르 칸국은 북원의 후신이기도 했다.

13.2. 명(明)


명과는 후금 건국 당시부터 줄곧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의 국력이 쇠하고 정정불안이 가속화하자 먼저 조선을 침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명을 압박, 결국 이자성의 난을 계기로 명이 멸망하자 남진하여 명의 영토를 접수하였다. 이후 남명 정권이 토벌되면서 명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옛 명나라의 유신들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썩혔다. 한족은 그 특유의 중화사상 때문에 '야만족'이 세운 청나라를 공식적인 중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만주족이 명나라를 도와준다고 사기를 치고 천하를 낼름 빼앗아 갔다고 여겼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을 치고 그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왔다고 주장하며[181] 이같은 반발을 무마시키려 노력하였으나, 그래봤자 한족의 입장에는 마찬가지였다.
청 말기의 쑨원 같은 민족주의 혁명가들이나 반청 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13.3. 조선




13.4. 일본


일본과는 막부 시절 및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계가 없었다. 물론 서로 존재는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함경북도로 진출한 가토 기요마사가 여진족 노토부락을 털다 누르하치와 도도의 부대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고, 이후 가토는 명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여진족과 북원을 거쳐야 하는데 둘 다 만만하지 않다며 사실 상 대륙 정복은 불가능하단 보고를 올린다. 제 아무리 조총이 있어도 여진의 기병과 맞서는 건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패배하여 요양을 상실하자 일본 역시 촉각을 세우며 규슈 쪽 방비를 강화한다.
그러면서도 내심 임진왜란의 복수를 후금이 대신 해준단 생각에 우호적인 시선도 보내고 조선이나 명을 통해 후금과 무역도 시작한다. 후금은 활을 만들 때 쓰는 물소 뿔 수우각궁면을 매우 필요로 했는데 물소는 한반도엔 살지도 않고 중국 남부 지방이나 오키나와에 사는지라 명과 일본을 통해 구입해야 했으며, 이 수우각궁면과 모피, 말 등을 맞바꾸는 마시 및 호시를 조선과 후금이 변방 지역에서 열면서 후금 물건이 일본에도 들어간다.
사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도 입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 청나라가 중국 본토 점령에 올인하는 와중에 흐지부지된 듯하다.
실제로 청나라는 병자호란 직후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는 전혀 관여를 안하는 등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어느 정도는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어느 정도 중계 무역을 통해 교역을 하였다.
명과 조선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었던 일본인들은 여진족 그리고 후금 및 청나라의 팽창에 대해서 꽤 우호적인 시선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명과 조선이 크게 분노하기도 했었고 청나라의 팽창 덕분에 굉장한 실리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왜인들이 기세가 더욱 살아난다'''는 기록도 있고 쓰시마는 인조의 어필과 대장경, 향로, 범종, 화병, 촛대 등을 공물로 요구하며 "두 나라의 안녕과 우호를 위해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며 조선이 거부할 경우 이전까지의 우호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다른 왜인들 역시 명과 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믿고[182] 조선에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1638년 2월 경상감사 이경증은 "왜인들에게 품질이 나쁜 공포를 주면 왜인들이 분노하고, 품질이 좋은 공포를 주면 백성들이 원망한다. 하지만 결국 품질이 좋은 것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통탄하였으며 인조는 이에 대해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왜인들이 분노하는 상황이 난처하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동래 왜관의 왜인들은 동태를 주시하며 본국에 계속해서 보고했으며 자기네들도 새끼가하라 전투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라 잘못하다 만주족이 조선은 물론 다음 차례로 자기들까지 복속시키려 들까봐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에게 유리한 세견선 파견을 더 많이 요청하기도 하였다. 결국 북방은 물론 남방의 안정까지 위해 일본이 해달라는 걸 다 해줄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본은 세키가하라 연간에서 임진왜란 주도 세력이 모두 싹쓸이 당한데다 전투의 격렬함 때문에 동군도 이겼지만 피해가 꽤 커서 다시 조선을 쳐들어갈 힘 따위는 없었고 되려 청나라에 의해 제2 여원 연합군 일본침공 사태를 맞을 걱정을 했다. 조총을 보유하긴 했지만 일본보다 더 먼저 마카오를 통해 조총불량기포를 도입한 명나라조차 사르후 전투에서 만구다이 궁기병을 앞세운 후금에게 너무 쉽게 패배한 것을 보고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카타 등 규슈의 방비가 병자호란 때 강화되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은 위치 상 연해주함경도 동해안과 맞닿아서 살던 여진족 각 부족, 특히 함경도 일대에 살던 올랑합이라 불리던 야인여진 부족들이 존재를 모를 리가 없고 고려 시대에는 도이라고 일종의 해적 집단을 만들어 실제로 도호쿠 등에 쳐들어간 적이 있다. 일본은 이때 정체불명 무리가 고려 북쪽 함경도에서 쳐들어 오자 당황해서 고려에 얘네 누구냐며 지원을 타전했고 고려는 얘네가 바로 그 유명한 여진족이라며 정체를 알려준 일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뒤 일본 제국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며 위협 세력으로 떠올랐다. 1894년 조선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양국이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갈등이 폭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전 결과 청은 일본에 타이완을 내주어야 했다.
반면에 극우 단체 흑룡회에서 쑨원의 흥중회, 중국 혁명 동맹회 등 혁명 단체를 '''대륙 침공 목적'''으로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주었고 청이 멸망함에 따라 티베트, 위구르, 몽골 등 소수 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시도하였다. 결국엔 외몽골은 독립에 성공했지만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사실 외몽골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케이스이며 몽골 인민 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1912년 청이 멸망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향한 세력 확대에 나선다. 그러나 청의 경우는 나라가 아니라 왕조만 망한 것이어서 바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일본의 팽창을 견제했고 이후 만주사변으로 이어서 푸이를 끌어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케 한다.
이미 만주사변 이전 청일전쟁 이후 불법적으로 일본 경찰들을 만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후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만주족의 청나라처럼 드넓은 중국 땅을 지배하려는 야망 때문에 일본 제국에서는 청나라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183] 물론 이와 별개로 당시의 만주족은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 핍박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만주국에서 중화민국으로 도망치는 만주족이 속출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한족 민족주의자들과 일반 한족들 그리고 만주족이 일치단결로 의견을 내는 게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에 대한 비판이다.

13.5. 몽골


외몽골의 경우 1691년 돌론노르 회맹에서 칸들이 강희제에게 분명한 신속의사를 포명함으로써 청나라에 복속,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4년 다시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러시아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위성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대원전국옥새를 바치며 청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의 외번 몽골군이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184]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 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85]

13.6. 그 외


오늘날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청대의 일. 동투르키스탄의 경우 북방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무역 수입 및 생필품 공급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 제국의 흥기를 경계하던 중화 왕조들은 종종 이 지역을 침공하였다. 오이라트의 잔당인 준가르가 다른 몽골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밀려 서쪽의 동투르키스탄으로 도망쳐 준가르 칸국을 세웠으며 이후 청나라의 복속 시도에 계속 저항했다. 하지만 국력 차로 인해 준가르 칸국은 1757년 건륭제 때 멸망하였고, 서역 원정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고 생각했던 건륭제는 후환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실시했다. '''준가르족은 노예 납치 및 주변 민족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수탈로 원성이 높았기 때문에, 탈주가 봉쇄당한 상태에서 학살당했다.''' 청은 점령한 동투르키스탄에 새로 정복한 곳이란 뜻에서 '신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위구르인과 동쪽에 있던 한족, 후이족들을 이주시켜 유목민들이 다시 정착하지 못하도록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둔전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티베트의 경우 오랫동안 중원정권과 무관한 독립국이었으나, 1717년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 달라이 라마 계승 문제에 개입하자 1720년 강희제가 친청파 티베트군과 함께 원정군을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낸 후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청 말기 청이 쇠락하고 이 지역에서 봉기가 계속 일어났음에도 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티베트는 외몽골처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청에게서 독립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행동했으나, 암도와 캄 지방은 중화민국 영향 하에 있었다. 1950년 중국을 평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 하에 든다.
러시아 제국과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견제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가 청말 연해주일리 강 서부 영토를 내주어야 했다.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청나라 지식인 중 서양 언어를 구사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신장성은 신해혁명 이후 양쩡신, 반독립적으로 행동한 성스차이[186]와 같은 친소 성향 한족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었고,러시아 제국 또는 소련과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였다. 중화민국이 신장을 직접 통제하려 할 때마다 강압적인 통제에 반발하여 위구르인들과 카자흐인들이 봉기하였는데, 결국 소련이 동투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버리면서 신장위구르자치구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높은 산맥이 있어서(...).[187]
조선 외에 조공국으로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코칸드 칸국카자흐 칸국이 있었다. 다만 코칸드 칸국의 경우 완전히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기 전까지는 청나라의 변방을 약탈하여 한족, 만주족, 위구르족 등 청나라의 민족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다. 이 때 코칸드 칸국으로 잡혀온 한족들의 후손이 오늘날 구소련 국가의 둥간족이다.

14. 같이보기



14.1. 주요 사건 (시대순)



14.2. 인물 (시대순)


[1] 청룡 그림은 국장 역할도 맡았다.[2] 청나라 전성기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가 모두 새겨진 국새였으나, 청나라 말기에 만주족 대다수가 정체성을 제외하고 거의 한화되면서 한자만 새겨진 위의 국새로 바뀌었다.[3] 편의상 후금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 공식 국호는 대금국(大金國)이었다.[4] 한반도 및 일본 열도 제외한 거의 전역[5] 퍼 아라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 용링진 얼다오허쯔촌 남산-하얼사산 북쪽 기슭의 가장 높은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다.[6] 자이퍈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구 동부 혼허 중상류의 다훠팡 저수지 동남쪽의 톄베이산에 위치한다.[7] ᠪᡝᡤᡳᠩ(Beging)[8] 참고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이고 그 다음이 송나라이다. 다만 한은 신나라의 건국으로 광무제가 왕조를 복구하기 전까지 15년간 끊겼었고, 송은 정강의 변으로 황제가 잡혀가고 북송이 멸망하는 바람에 왕통이 한 번 끊겼다.[9] 명목상 청나라의 후신을 칭한 만주국일본 제국괴뢰국이었다.[10] 현행 병음표기로 qing은 '칭'으로 발음한다.[11]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국호를 바꾸고 8년 뒤에 정말로 중원을 정복한다. 만약에 국호를 그대로 금(金)으로 유지했다면 불(火)의 기운을 가진 명나라에게 제압당했을지도?[12] '아이신'은 '금'을 의미하고 '구룬'은 '나라'를 의미한다.[13] 실제로 후금은 몽골계 세력을 하나로 합치거나, 조선을 정복한 적은 없다. 국내 호란사 연구에서 지적되듯이 후금은 조선이 신속했다고, 조선은 형제관계라고 여겼다. 일례로 정묘호란 이후 귀국하는 아민을 만난 홍타이지가 조선이 항복했다고 발언한 것이 그것이다.[14] '''기사년의 변'''이라고 부른다. 청군은 영원성을 방비하던 원숭환이 급히 지원하자 한 발 물러서 퇴각했다. 원숭환 참조.[15] 정덕제는 좋은 군주상은 아니었으나, 가정제만력제에 비빌 정도로 암군이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16]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도 일하지 않은 만력제, 천계제와 달리 열심히는 하였으나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능력이 모자랐으며 일처리도 엉망이었다.[17] 이 과정에서 오삼계가 큰 공을 세웠는데, 영력제는 자신의 군대가 대패하자 버마, 즉 현재의 미얀마로 튀었다. 그러자 오삼계가 버마를 협박하여 영력제를 끌고 왔는데, 영력제가 역적의 상판을 보기 싫다고 일갈하자 아무 말 않고 죽여버렸다고 한다.[18] 영화의 변발은 청나라 후기에 생겨났다.[19] 특히 청나라 이전의 한인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겨 승려를 제외하곤 머리를 깎는다는 것 자체를 큰 수치로 여겼다. 실제로 한족 왕조의 형벌 중에서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아 모욕을 주는 형벌도 있었다.[20]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에 의하면 한족을 포함하여 다른 민족들이 만주족의 군사기술을 검증받고 만주로 세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만주족들이 나와도 방관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중화권에는 법적으로 만주족이면서도 정작 DNA상으로는 퉁구스인이나 북방 한족보다 남방 한족에 더 가까운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21] 대지(the Good Earth)를 보면 한족임에도 변발을 멋있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들이 나온다.[22] 서양으로 치면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크계 무슬림 지배층의 문화를 따라하는 피지배민족들이 점차 생겨난 것과도 비슷하다.[23] 전 황제인 순치제가 죽기 전에 어린 강희제를 보좌하라고 임명한 특별 대신이다. 허나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손에 쥐게 되면서 오히려 황제를 깔보는 수준에 이르자 강희제가 참다참다 숙청해버린 것이다.[24] 번이란 청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3명의 옛 명나라 장군들, 즉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 등에게 '번왕'의 칭호를 내리고 각자 운남성, 광동성, 복건성을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해준 특권이었다. 허나 이들이 자체적으로 소금을 만들고 동전을 주조하는 등 막나가기 시작하자, 강희제가 이를 정리해버린 것이다.[25] 오삼계는 처음에는 옛 명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반란 초기에는 숭정제와 영력제의 위패에 참배하기도 했다.[26] 참고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서양 국가와 맺은 첫 근대적 조약이기도 하다.[27]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청나라의 진정한 건국군주가 강희제라는 이야기도 있다. 강희제가 청나라의 기틀을 다지지 않았으면 진작에 망했을 것이라는 것....[28] 이 과정에서 옹정제가 강희제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던가, 아니면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2013년에 옹정제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것이 맞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291년 만에 황위 찬탈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29] 물론 건륭제 시기의 청나라는 영국 따위가 눈에 들지 않았고, 건륭제는 영국과 교류를 할 필요가 없다며 매카트니 경을 국외로 쫒아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영국은 몇 십 년 후에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서구 세력을 얕보았던 청나라는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30] 애초에 아편 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 것이었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사가기 위해 은을 지불하는데, 정작 중국은 자신들에게서 사가는 것이 없으니 심각한 무역적 불균형이 벌어졌던 것. 영국은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 중독성이 강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하기 시작했고, 청나라가 이를 금지하려 들자 영국이 반발하며 전쟁이 터진 것이다.[31]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다.[32] 가경제 시기에 황제가 친히 허션을 족친 결과 그의 집에서 무려 청나라 20년치 세입에 달하는 재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33] 건륭제는 89세까지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장수했다. 원래 그는 60년을 넘어서 재위할 수도 있었으나, 자신이 존경하는 강희제의 61년 기록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재위 60년에 양위했다. 다만 양위한 이후에도 태상황으로 올라가 거의 막후의 실세로 군림하기는 했다. [34]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는 만주어를 거의 못할 정도였다.[35] 현대 중화권에서는 만한전석을 재현하는 행사에서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36] 팔기군 출신의 만주인이라는 뜻.[37] 청 초기는 만몽연합으로 몽골족이 황후가 되었다. 후기로 가서도 몽골족 출신의 황후가 나타나기도 하였다.[38] 왼쪽부터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프랑스마리안, 일본 제국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 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 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 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9] 사실 이 그림을 서양 왕실 및 황실 간의 혈연 관계를 고려해서 보면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자세한 건 에드워드 7세 문서 참조.[40]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준가르 정복 당시에 서양식 화포를 쓰긴 썼다.[41] 그런데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아주 어이없는 일로 보이진 않을 수도 있었다. 청조 황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가 이전 왕조인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이렇게 이룬 대외적 확장 과정에서 팔기군을 비롯한 궁기병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42] 사실 청 황실에서 피정복민족의 반란 위협을 차단하고자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한것도 있었다. 그러나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들도 있었는데 정작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43] 만주족과 여진족 모두 사냥이나 군공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나 지주로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게되면서 만주족 팔기군과 맹안모극의 구성원들은 전투력이 사라지고 말았다.[44] 이때 가장 거대했던 것이 바로 백련교도의 난이다. 청나라의 전성기에 종지부를 찍은 상징적인 사건이다.[45] 이 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게 무려 99년간 임대되었다. 말이 임대지 당시에는 그냥 주는 거랑 똑같은 것이었다.[46] 이 사건으로 그나마 싹을 틔웠던 청나라의 근대화 정책이 숨을 거두었다는 평을 듣는다. 서태후도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개혁 조치를 단행했지만, 그래봤자 늦은 시도였을 뿐이다.[47]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견된 사실로, 실제로 비소를 먹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역사학계는 광서제를 독살한 진범으로 위안스카이를 지목하고 있으며 서태후가 독살을 지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48] 국제 학계에서도 만주국을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다. 실제로 30년대 일본에서도 만주국의 시조를 누르하치가 아닌 푸이로 지정했는데, 이는 푸이가 청나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49] 지도상에서 청의 판도를 중국 대륙을 넘어서 사할린, 쿠릴 열도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간혹 있다.[50] 청나라가 18세기 중반까지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하면서 중국의 영역은 만주,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에 걸치는 광범위한 땅에 걸치게 되고 청나라 이후 군벌내전시대, 중화민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는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외몽골이 독립하고 흑룡강 이북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 정도. 티베트는 청나라 멸망 후 독립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다시 합병되었다.[51]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52]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53]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다 보니 문구가 애신각라와 일치하게 된 것이다. 신라 = 사로 = 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54]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55] 그나마 가장 가깝게 비유하면 본관과 분파를 이름에 쓴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예를들면 안동권씨 복야공파 출신의 권철수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할라와 무쿤을 적용한 만주어식 이름 배열은 '복야공(파)(안동)권(씨) 철수'인 셈이다.[56]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57]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58] 이때문에 청 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기도 했으니 좋은것만은 아니다.[59] 이때문에 청나라가 약해지자 서구 열강들이 가장 먼저 트집잡았던 것이 바로 이 광동 체제였다.[60] 청 조정은 세금을 주로 밀이나 은의 형태로 거두었으며, 이때문에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운송품과 함께 조정에 바칠 세금도 함께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거두는 세입도 엄청났다. 그랬기에 19세기에 서양 열강군대가 이 대운하를 차단해버리자 청 조정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화친을 청한 것이다.[61]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환관들과 황친들이 막대한 양의 대토지를 거느리면서 세입 자체가 줄고 경제는 피폐하져만 가고 있었다. 물론 청나라도 초기에는 말을 타고 달려서 그 말이 달린데까지를 땅의 경계로 하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썼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땅의 재분배를 실시했다.[62] 명나라 때에는 엄청 거대한 대도시 몇 개와 조그만 도시들 몇 개, 그리고 시골 깡촌들로 지역이 나뉘어진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소형 도시들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63] 은본위제가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여도 당시에는 엄청난 거다. 일단 은본위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려면 기본적으로 은이 충분해야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함부로 실시하지 못하는 정책이다. 조선만 해도 19세기까지 은본위제는커녕 물물교환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64] 다만 이는 인구 증가분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된다. 북송 시기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북송의 경제력이 더 강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65] 근대 중국까지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여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둔 적은 드물었다. 아무래도 유교를 중시하는 사대부층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경제에 대한 실무적 지식은 약소했고 굳이 개입해서 망칠 바에야 차라리 상인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66] 한족 병사들에게 녹색 깃발을 상징으로 삼게 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나라 보병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성기 때에는 대략 80만 명 정도의 녹영군이 있었다고 한다. 만주 병사들은 항상 이들보다 더 나은 무공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는데, 이때문에 강희제는 녹영군보다도 무능하다면서 만주족 장군들을 질책하기도 했다.[67] 이때문에 태평천국의 난 때에는 한족 세력가들이 자치적으로 군대를 모아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 무너지니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했던 것이다.[68] 가장 대표적인게 북양함대다.[69] 미국과 러시아의 대사들은 각국에 중국의 군비 증강에 대비해야 한다고 긴급 전보를 쳤고, 나중에는 심지어 미국과 중국의 군사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70]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인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71] 중동 국가 중에서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샤한샤이집트파라오를 겸한 게 대표적이다.[72] 칸의 만주어 발음이다.[73] 물론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를 더욱 선호했으며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74] 카메라가 아니다![75] 흔히 청이 명을 정복한 직후부터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다.[76] 의외로 한족이 서양 문물 수입에 적극적이었으며 개화기를 이끈 인사들도 대부분 한족이다.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그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을 일으킨 증국번리훙장은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근대화된 군대를 창설했다. 캉유웨이는 영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며, 쑨원은 미국 공화주의와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삼민주의를 제창하고 신해혁명을 일으킨다. 그 외에도 노신이나 양계초, 호적 같은 인물들도 적극적으로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여 정치활동 및 저술활동을 하여 현대 중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77] 본격적인 중원 천자로서의 청나라 황제들 중 화기의 연구 및 제조에 있어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뿐이다(다만 이쪽도 나중에는 화기의 연구 및 제조를 금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음). 그리고 강희제 치세의 문자의 옥 또한 손자인 건륭제마냥 막나가지는 않았다.[78] 강희제는 제외한다. 옹정제의 경우 지나친 정복전쟁을 삼가고 문치주의를 추구했으므로 논외로 한다.[79] 물론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보다 앞서 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한 청나라를 미화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80] 당연히 중국을 지배한 나라 중에 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매우 싫어하는 건 덤이다. 괜히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원vs송) 이후 중국은 없다.)"이란 말이 중국 역덕들 사이에서 도는 게 아니다.[81] 사실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들을 하찮은 족속들이라고 무시하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82]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 인과 함께 두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83] 물론 몽골 제국의 중국 정복에 대해서는 반대로 한족 우월주의자들과 만주족이 합심해서 몽골 제국을 까기도 한다. 전자는 남송의 멸망과 관련해서, 후자는 금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몽골 제국을 깐다.[84] 홍콩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85] 사실 중국 뿐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 황제의 상징색이기도 하다.[86]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87]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88]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89]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90] 겅시연 수 황제.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91] 언두링거 한.[92] 복다 카간.[93]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94] 겅시연 수 황제[95] 복다 카간.[96]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97] 추후 삭탈.[98]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99]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100] 아이비어 자사크 칸.[101]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102]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103] 엔크 암갈란 칸.[104]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105]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106] 나이랄트 토브 칸.[107]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108]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109] 텡게린 테트게센 칸.[110]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111]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112]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113]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114]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115]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116] 터르 게렐트 칸.[117]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118]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119]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120] 투기멜 엘베그트 칸.[121]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122]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123] 부린투 자사그치 칸.[124]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125]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126] 바다라울트 투르 칸.[127]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128] 후에 구 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129] 휴브트 요스 칸.[130]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라서 그런지 이름은 만주식 이름이 아닌 중국식 이름이다. 만주식 발음은 중국식 발음와 같은 푸이다.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푸런(溥任, 1918.8.17~2015.4.10)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131]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132] 건주위 추장[133] 원황제(原皇帝)[134] 직황제(直皇帝)[135] 익황제(翼皇帝)[136] 선황제(宣皇帝)[137]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138]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139]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140]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141]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142] 경시연 수 황제[143] 복다 칸[144]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145]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146]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147] 아이비어 자사크 칸.[148]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149]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150] 엔크 암갈란 칸.[151]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152]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153] 나이랄트 토브 칸.[154]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155]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156] 텡게린 테트게센 칸.[157]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158]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159]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160]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161]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162]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163] 터르 게렐트 칸.[164]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165]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166]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167] 투기멜 엘베그트 칸.[168]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169]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170] 부린투 자사그치 칸.[171]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172]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173] 바다라울트 투르 칸.[174]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175]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176] 휴브트 요스 칸.[177]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201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그의 동생 푸런(溥任, 1918년 8월 17일 생)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178]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179] 순치제,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이 중 광서제와 선통제의 경우 황위 계승 서열이 한참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실권력자인 서태후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즉위한 것이다.[180]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181] 청나라는 이를 근거로 오히려 자신들이 명나라의 원수를 갚았다고 주장했다. 강희제는 명나라의 창립군주인 주원장의 묘를 참배했으며, 숭정제의 위패도 세워주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사실 명나라 황족의 후손인 주지련 등에게 세습 작위를 줘서 명나라 황실의 제사를 계속 맡기기도 했다. [182] 왜냐하면 원래 명이 조선을 도와 중화 질서를 어긴 일본을 손 좀 봐주려고 했었는데 여진족이 성장하자 그 계획이 취소되었다.[183] 오늘날 한국인들의 반만주족 감정이 거의 희석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국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일본 제국이 이렇게 청나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식민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만선사관의 영향력이 약해진 데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조선의 천연두 및 청나라 본토의 경제난 때문이었고 청 태종 숭덕제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원래 목적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었다는 게 학계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에, 현재는 반만주족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사극을 제작할 때 만주족이 악역으로 나오며 이들 만주족이 사용했던 언어인 만주어가 고증되고 있다.[184]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185]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186] 독소전쟁 초반 소련이 패배하자 소련을 배신하였다. 후에 소련이 승기를 잡자 스탈린에 접근하다가 장제스에게 헤임당한다.[187] 다만 그렇다고 충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무굴제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청나라 령이었던 티베트를 침공했는데 티베트가 청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고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맞붙었다. 청나라가 나라 상태가 멀쩡했다면 히말라야를 넘어온 인도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알다시피 당시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진 않았지만 이겼다고 하기에도 뭐한 전투 이후 인도가 그냥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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