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산반란

 


均産反亂
송나라 초기에 일어난 농민 봉기로 왕소파, 이순의 난이라고도 하며, 993년 2월부터 시작되어 995년에 끝났다.
1. 배경
2. 전개
2.1. 왕소파의 난
2.2. 이순의 난
2.3. 재주에서 저항한 송군
2.4. 이순을 사로잡은 송군
2.5. 잔당들의 저항
2.6. 촉을 평정하다
3. 반란 이후


1. 배경


익주의 촉 지역은 후촉의 영토였다가 965년에 송나라가 후촉을 점령했으며, 촉의 물자가 풍요로웠고 남한, 남당, 북한, 오월 등 아직 복속하지 않은 국가들이 있어서 전쟁 물자로 동원하기 위해 수탈을 벌여 개봉으로 물자를 옮겼다.
또한 박매무라는 관영 시장을 설치해 백성들의 물산을 독점하면서 상인들의 사사로운 거래를 금지했으며, 백성들은 촉 지역이 땅이 좁아 농사를 짓는 것이 모자랐다. 그러면서 토지를 겸병하는 자들은 곡식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이익을 얻어 백성들은 더욱 어려웠다.
동상합문사 오원재는 지성도부가 되어 가혹한 정치를 해서 백성 중에 범법자가 있으면 가벼운 죄라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잔치를 벌이거나 노는 것을 금지하게 하자 사람들이 원망했다.

2. 전개



2.1. 왕소파의 난


왕소파가 자신을 토과촌의 백성이라 칭하고 이순을 맹대왕의 고아라고 칭하면서 무리를 모아 가난한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들었고 공, 촉의 여러 현을 공격해서 2월에는 팽산을 공격해 현령인 제원진을 죽였으며, 제원진이 빼앗은 재물들을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12월 25일에 강원현에서 서천도순검사 장기와 싸우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으며, 장기를 격파해 죽였지만 왕소파도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 장기가 죽자 휘하 군사 4백여 명이 도망가서 서천 각지로 도망갔는데, 전운사 번지고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망가게 되면서 왕소파가 이끌던 무리들은 더욱 강해졌다.

2.2. 이순의 난


왕소파가 죽자 이순이 추대되자 성도를 공격해 서곽문을 불태웠다가 한주, 팽주를 함락했으며, 994년 1월 17일에 성도를 함락해 전운사 번지고, 지성도 곽재는 탈출해 재주로 달아났다. 이순은 성도를 점령하자 대촉왕을 칭하고 군사를 파견해 북으로는 검관, 남으로는 무협에 이를 정도로 여러 군과 읍을 공격했다.
2월에 익주의 반란 소식을 들은 태종은 소선사, 하주단련사인 왕계은를 서천초안사로 임명해 토벌하도록 했으며, 소부소감 뇌유종, 감찰어사 배장을 협로수군 전운사로 임명하고, 공부낭중, 유석, 직방원외랑 주위를 협로서지서천 수군전운사를 임명해 왕계은에게 속하게 했다. 또한 마보군도두 왕고를 검문, 숭의사 윤원을 협로에서 나아가게 하도록 해서 왕계은에게 속하게 했다.
이순은 군사를 파견해 검문을 공격했지만 도감 상관정이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막았고 성도감군 숙한이 합세해 이순의 군사를 격파했다. 군사 3백여 명이 성도로 도망오자 이순은 분노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 재주에서 저항한 송군


우간의대부 겸 급사중 장웅이 이순의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재주에서 성을 지킬 계획을 세우면서 군사를 훈련했으며, 내전숭반 노빈이 성도를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장웅은 노빈에게 보호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이순이 상귀를 시켜 20만 명으로 재주를 포위하자 노빈이 상귀와 싸웠다.
상귀가 운제와 충차를 설치해 성을 밤 중에 공격하자 장웅은 돌을 발사하면서 그것을 부수고 불화살을 섞어 떨어뜨리자 상귀의 군사들은 조금씩 퇴각했으며, 상귀의 군사들은 서쪽에서 공격 도구를 만들자 장웅은 동쪽 문을 공격하는 척 하기 위해 5백 명을 파견해 동쪽 문으로 다가가도록 했다. 상귀의 군사는 장웅이 나올 것을 생각하고 우두산으로 올라가 산 동쪽에서 매복했지만, 장웅은 결사대 1백 명을 소집해 성의 서쪽으로 가서 공격 도구를 모두 불태웠다.
어느 날에는 상귀의 군사가 불을 질러 북문을 공격했지만 장웅과 노빈이 굳게 지켰고 진세경이 수백 명을 쏘아 죽였으며, 상귀의 군사가 80여 일이 되자 왕계은이 보낸 내전숭반 석지용이 와서 구원하자 상귀의 군사들은 떠났다. 노빈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면서 2만여 명이 항복했으며, 수만 명이 격파되어 낭주를 포위한 군사들이 물러가고 3천 명을 죽여 봉주를 평정했다.

2.4. 이순을 사로잡은 송군


왕계은이 이끄는 군사는 여름 4월 21일에 연구채에서 이순의 군사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가서 청강령을 넘어갔으며, 28일에는 송군이 유지역에서 5천 명이 격파하고 광안군을 공격한 3천 명을 패퇴시켰다. 5월 3일에는 면주에서 승리하고 내전숭반 조습이 가맹에서 노계까지 추격해 1만여 명을 격파하고 낭주에서 이겼으며, 순검사 호정원이 파주에서 이겼다.
소부소감 뇌유종이 간의대부, 지성도부로 임명되었고 촉으로 들어가 군사 업무를 했는데, 협중과 광안군에서 이순의 군사와 싸웠으며, 광안군에서 포위되었지만 기습으로 후방을 공격해 이순의 군사를 격파했다. 5월 6일에는 왕계은이 성도를 공격해 성을 함락하고 10여만 명을 격파해서 3만 명을 죽이면서 이순을 붙잡았다.
왕계은이 검주를 함락할 때 서경직방사 마지절이 선봉에 서서 공을 세웠다가 성을 함락한 후에는 왕계은에게 팽주를 지키게 했으며, 이순의 군사 10만 명이 성도를 공격하자 마지절은 삭을 들고 저항해 물러나게 했다.

2.5. 잔당들의 저항


이순의 부하인 장여가 가주, 융주, 노주, 투주, 부주, 충주, 만주, 개주 등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개주감군 진전서는 관리들이 항복하고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장여의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서 기주를 공격했고 송나라 조정에서는 여경사 백계윤을 보내 협로도대순검으로 삼으면서 병력 1천 명을 통솔하게 했으며, 5월 19일에 백계운은 기주로 들어가서 순검사 해수용과 협공해 장여의 군사를 격파해 2만여 명을 죽였다.
이순의 잔당이 시주를 공격하자 지휘사 황희손이 공격해 도망가게 했으며, 6월 17일에는 광안군, 합주의 서방계 등에서 이순의 잔당을 격파하고 가릉강 입구에서 장한의 군사 2만 명을 격파했다.
또 이순의 잔당이 능주를 공격하자 지주 장단이 백성들을 모아 격파해 5천여 명을 죽였으며, 이순의 잔당이 미주를 공격하자 지주 이간이 한 달이 넘도록 지켜 물러가게 했다. 송의 군사가 장여를 격파해 운안군을 수복했다.

2.6. 촉을 평정하다


왕계은이 연회를 베풀고 잔당을 치려 하지 않자 위소흠이 편지로 재촉하자 왕계은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싸우도록 했는데, 위소흠이 여러 차례 승리했다. 11월 16일에는 이순의 잔당이 미주를 공격하자 승의사 숙한이 이를 격파했으며, 12월 13일에 숙한이 가주로 가서 이순이 임명한 지주 왕문조를 항복시켰다.
995년 2월 30일에는 숙한이 가주에 도착해 장여의 수급을 서천행영으로 보내고 그 무리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3. 반란 이후


송군이 익주를 평정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익주를 제대로 안정시키지는 못해 1년도 안 돼서 8월에 서천의 수졸인 유우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지절, 상관정이 이를 평정했다. 그러나 익주검할 부소수가 백성들을 약탈하고 아랫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등 익주에서 좋지 못한 정치가 계속 되자 10년이 되기도 전에 왕균의 반란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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