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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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나라.
초대 황제 이변(李昪)이 오나라(남오 또는 양오)의 마지막 군주인 양부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이다. 당연히 당시에는 그냥 '당'(唐) 또는 '대당'(大唐)이라고 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과거 당나라의 계승을 주장하였다.
2. 역사
937년, 이변이 남오의 군주 양부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제(齊)로 정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939년, 이변은 자신이 당태종 이세민의 3남 이각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면서,[1] 제(齊)에서 당(唐)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그래서 통칭 남당, 제당(齊唐), 이제(李齊)라고도 불린다.
남당의 황제 열조 이변이 죽고, 원종 이경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945년에 민(閩)을 멸망시키고, 951년에는 초(楚)를 멸망시키며, 이웃 국가인 오월과 대립, 남방의 패자를 꿈꿨다.
955년, 후주(後周)의 황제 세종(世宗)이 남당을 공격하자, 회수 이남 장강 이북의 땅을 잃게 되었고, 후주에게 굽신거리면서 살아가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961년, 원종 이경이 죽고, 후주 이욱이 즉위하였다. 북방에서 송나라의 군세가 강력해지자, 이욱은 남창부(南昌府)로 천도를 하였고, 다시 강녕(江寧)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971년, 송나라의 압박이 계속되자, 남당은 국호를 '강남국'(江南國)으로 바꾸고, 송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다.[2]
975년, 북송(北宋)의 황제 조광윤의 공격으로 남당의 후주 이욱이 항복하면서, 남당은 3대 만에 멸망하였다.[3]
재밌는 것은 남당의 역사서인 '육씨남당서'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왜, 탐라, 환어라, 철륵,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고려에 내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남당은 고려가 사신을 보낼 때 신하를 칭하지 않아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며 이를 수용하였다. 거란이 10국중 가장 강한 남당의 군주를 '''대당황제'''라 칭한 것을 생각한다면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3. 문화
남당을 중심으로 문화와 시서가 발달했다. 한희재 야연도를 그린 고광중, 화조화의 시조 서희, 하북 산수의 창시자인 형호, 강남 산수의 동원,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서현, 문사 한희재 등이 있었다. 남당 후주 이욱은 송휘종과 함께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나, 그 때문에 나라를 망친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뒷시대인 송나라의 4대 문학가에 들어가는 인물로 꼽힌다.#
4. 역대 황제 목록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1] 이각은 문무 양면에 능통해 당태종의 총애를 얻어 태자가 될 뻔 했지만(당태종의 대부분의 자식들이 변변찮아 이런 일이 벌어질 수있었다.) 장손무기의 반대로 태자가 되지 못했고 얼마 안 가 역모 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이것에 대해서 장손무기의 음해라는 설이 우세하고 이후 장손무기가 측천무후의 모함으로 죽게 되자 이각을 죽게 한 업보라는 말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각 밑에는 친동생 이음도 있었는데 이 인간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다만 이 인간은 별 옹호론이 없는데 이각이 태자가 못된 이유가 이 인간이라는 말일 정도로 형과는 달리 행실이 엉망이었다.[2] 천자국은 외자 이름, 제후국은 두글자 이름이다. 조선의 국호가 두글자인 것과 후기에 칭제 이후 국호를 '''한'''으로 바꾼 이유도(보통 대한제국이라 부르나 어차피 국호 앞에는 대가 붙고 제국은 정식 국호에 들어가는게 아닌 만큼 정식으로는 한이다.) 이것 때문이다.[3] 사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오월국이 북송과 협조한 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