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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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대륙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1년 3월 15일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길퍼드 코트하우스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의 영국군의 군사 활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1779년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한 영국군은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캠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조지아 주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장악했다. 그러나 뒤이어 노스 캐롤라이나 주로 진격한 찰스 콘월리스 소장 휘하 영국군은 네더니얼 그린 소장이 이끄는 대륙군과 십여 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그린이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갈수록 병력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1780년 5월 29일 왁스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배내스터 탈턴 중령이 포로로 잡은 대륙군 병사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1], 미국 내부에서 영국군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커져 곳곳에서 민병대가 일어나 영국군 장교들을 저격하고 보급품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2년간 그린의 대륙군을 추격하던 콘월리스는 1781년 3월 14일 그린의 대륙군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길퍼드 코트하우스 인근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잡힐듯 말듯하면서 자꾸만 아군을 괴롭히는 얄미운 그린을 이번 기회에 끝장내기로 결심하고 서둘러 길퍼드로 향했다. 3월 15일 아침, 콘월리스는 적군을 발견하자마자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지도 않고 서둘러 적군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맞대결이 벌어졌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헨리 콘월리스 소장
  • 병력: 1,900명

3.2. 대륙군


  • 지휘관: 네더니얼 그린 소장
  • 병력: 4,400명

4. 전투 경과


전투를 개시한 영국군은 길포드 코드하우스로부터 반 마일 떨어진 평원으로 이어지는 숲을 가로질러 길포드로 향하는 도로를 행진 대열로 나아갔다. 당시 그린의 대륙군은 개간지의 북쪽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양측면에 숲을 둔채 배치되었다. 대륙군의 첫번째 대열은 노스캐롤라이나의 민병대, 조지 워싱턴 휘하 정규병, 찰스 리의 군단, 캠벨의 라이플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기병대가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350야드 뒤쪽에 위치한 숲 속에는 버지니아 민병대로 구성된 두번째 대열이 있었고, 코트하우스에는 그린 본인이 통솔하는 정규병 부대와 대포 2문이 배치되었다. 그린은 대니얼 모건 장군의 충고에 따라 라이플 부대를 노스 캐롤라이나 민병대 후방에 배치했고, 자신이 후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자리를 비우는 민병대를 가차없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영국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륙군 포병대가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콘월리스는 제 1선의 우익에 레슬리 소장이 지휘하는 제71 하이랜드 보병대를 배치했고 제임스 웹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23연대와 33연대를 좌익에 배치했다. 그리고 제 2선엔 보병 근위연대 2개 대대와 경보병대, 근위연대를 배치했고, 탈턴의 용기병대를 후방에 예비대로 배치했다. 이후 영국군은 적이 주둔한 개활지를 향해 나아가다가 적군의 일제사격 및 포격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를 무릅쓰고 꿋꿋이 진군했고, 그린은 적이 아군 제 1선에 가까이 오자 즉시 제1선 부대에게 숲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군은 적이 후퇴하자 그 뒤를 추격했지만 숲 속의 대륙군으로부터 측면 공격을 받았다. 이에 영국군은 숲속의 적군에 대항하기 위해 갈라섰고, 척탄병 1개 대대가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후 영국군은 버지니아 민병대가 있는 제 2선을 공격했다. 웹스터 중령의 영국군 부대는 적의 제2대열 우익 부대를 몰아붙여 그들을 후퇴하게 만든 뒤 대륙군 제3선을 향해 진군했다가 적 포병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패퇴했고, 그 과정에서 웹스터 중령은 전사했다.
대륙군은 웹스터 중령의 부대를 격퇴한 뒤 역습을 가해 기세 좋게 밀어붙이던 영국군을 도로 몰아내고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영국군은 재차 공세에 나서 적군을 점차 밀어냈지만, 대륙군에 소속된 용기병대가 출격해 영국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고, 숲 속에 숨어 있는 대륙군이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갈수록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콘월리스는 전황이 좋지 않자 포병대에게 적을 향해 포도탄을 쏠 것을 지시했고, 포병대는 이에 따라 대포 3문을 동원해 포도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대륙군 포병대 역시 반격했고, 영국군은 전투를 개시한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적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틸턴 대령의 기병대가 출격해 대륙군의 우익 측면을 공격하자, 그린은 지금이 철수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포병대에게 가지고 있는 대포에 못을 박아 다시는 쓸 수 없게 만들라고 지시한 뒤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적군이 철수하자 전장을 장악했지만 워낙 지칠대로 지쳐서 추격하지 못했다. 이로서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는 영국군의 힘겨운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장교 11명이 전사하고 병사 55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대륙군의 사상자 및 포로는 250명이었다. 다만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는 전투가 끝난 뒤 그린의 군대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들의 집으로 흩어졌다. 영국 휘그당 대표 찰스 제임스 폭스는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또다시 이와 같은 승리를 거둔다면 영국군은 파멸할 것이다!"

이후 콘월리스는 그린의 대륙군을 더이상 추격할 의지를 상실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철수했다가 몇 주 후 병력을 긁어모아 버지니아로 쳐들어갔다가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에 고생하다가 급기야 요크타운 요새로 전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 결정은 요크타운 전투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1] 탈턴 본인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이 전투 도중에 말이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낙마하여 의식을 잃은 사이, 부하들이 자기가 죽었다고 여기고 극도로 분노해 적군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지만 포로를 학살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신대륙 주민들은 그가 학살을 명령했다고 의심했고, 마침 영국군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 소장이 투항한 대륙군 병사를 가석방하던 관례를 취소하자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여겨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