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봉(1908)
양병시, 장한호 등과 함께 구우면 한림리에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1932년 6월 운동자연구회(運動者硏究會)를 조직하여 전책임자(全責任者)로서 연락부와 부인부(婦人部)를 담당하였다.
1933년 1월 농민조합(農民組合) 건설의 준비조직체로 농민조합창립준비위원회(農民組合創立準備委員會)를 결성, 구우면과 신우면 지역의 조직을 담당하고 임금투쟁을 목적으로 한 파업의 필요성을 고취하는 등 동지규합에 힘썼다. 또한 1934년 7월 양병시·장창구(張昌求) 등과 함께 노농연구회(勞農硏究會)를 조직하여 전책임자 겸 가두부(街頭部)를 맡아 조직 확대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제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김경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경봉은 190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5월 자신의 집에서 1933년 1월 농민조합(農民組合) 건설의 준비조직체로 농민조합창립준비위원회(農民組合創立準備委員會)를 결성, 구우면과 신우면 지역의 조직을 담당하고 임금투쟁을 목적으로 한 파업의 필요성을 고취하는 등 동지규합에 힘썼다. 또한 1934년 7월 양병시·장창구(張昌求) 등과 함께 노농연구회(勞農硏究會)를 조직하여 전책임자 겸 가두부(街頭部)를 맡아 조직 확대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제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김경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