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남철'''
'''金南哲'''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10월 24일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color=#fff> '''사망'''
1981년 12월 6일
전라남도 목포시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남철은 1909년 10월 24일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에 조길룡·정욱 등 광주농고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회합하고 항일학생비밀결사인 광주농고 독서회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이때 그는 최정기(崔貞基)·정 욱·김순복(金順福)과 함께 동회의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독서회는 당시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이를 계승하여 1929년 6월에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된 것으로서 회의 운영은 전회원을 4개반으로 나누어 각각 반별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또한 광주농고 독서회는 학년별로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당시 3학년이던 그는 1929년 10월에 권수동(權壽童)·정해두(丁海杜)와 함께 그의 집에서 모여 3학년 독서회 조직에 관하여 협의하고 이에 대한 사항을 결정하였다.
그는 이렇게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약하였다. 11월 10일에는 정욱·오쾌일(吳快一)·이영범(李榮範) 등과 함께 박기석(朴紀錫)[1]의 집에 모여 제2차시위에 대하여 모의 논의하고, 동월 12일에 일제히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11월 12일에는 조길룡으로부터 배부받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동 회원인 정욱·최정기·박석진(朴石珍)[2] 등과 함께 농고생 200여명을 주도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일경에 붙잡혔으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이에 항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목포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81년 12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남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기석과 동명이인이다.[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석진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