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항일운동

 

光州學生抗日運動/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

1. 개요
2. 배경
2.1. 한국 학생들의 항일 조직 결성
2.2. 한국 학생들의 수모와 동맹휴학
3. 전개
3.1.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
3.2. 크게 번진 싸움
3.3. 전국으로 번진 항일운동
4. 사건 그 후
5. 매체에서
6. 관련 단체
7. 관련 문서



1. 개요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이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광주광역시가 압제자에 굴하지 않는 민중저항의 상징적 장소가 되게 한 사건이다.[1]

2. 배경



2.1. 한국 학생들의 항일 조직 결성


1926년 11월 3일, 최규창의 집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왕재일장재성은 항일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조직했다. 같은 학교 재학생 김광용, 정우채, 국순엽, 임주홍, 안종익, 최용호, 김창주 등과 광주농업학교 재학생인 정동수, 정남균, 정종석,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등이 참여했다. 성진회는 왕재일과 장재성 등 주요 인물들이 졸업하고 회원 한 명이 형사와 인척 관계인 것으로 드러나[2] 자체 해산을 단행한다. 1929년 6월, 유학을 마친 장재성은 성진회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했다. 같은 달 광주농업학교는 무등산에서, 광주사범학교는 일제 참배의례에 거부해 문을 닫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뒷산에서 독서회를 결성하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2.2. 한국 학생들의 수모와 동맹휴학


한국인들이 다니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와의 야구 시합이 벌어질 때, 일본인 심판인 안토는 대놓고 일본 쪽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진행했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은 심판에게 항의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맹휴학을 하였고 교측에서는 주모자 4명을 퇴학시켰다.
한편,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도 식민지 교육과 차별대우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동맹휴학을 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의 3학년 1백여명이 동맹휴학에 참가했고, 1927년 11월 11일에는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의 2학년 200여명, 4학년 160여명 등이 동맹휴학을 하였으며, 함흥, 대구, 평양, 동래,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동맹휴학 사건이 발생했다.
한 해가 지나 광주고보에서도 1928년 6월 26일에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당시 동맹휴학에 대한 요구 조건으로
  • 물리, 화학 시간에 배운 것을 실험할 수 있는 시설 건설할 것.
  • 한국인 교사를 많이 임용하고, 한국의 역사와 지리도 교육할 것.
등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교측에서는 이번에도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주모자 27명을 퇴학, 관련자 300여명을 무기 정학 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일본의 억압으로 한국인 학생들의 불만과 민족 사상을 더욱 불태우게 하였으며, 아래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3. 전개



3.1.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


당시 광주중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 중 일부는 광주-목포행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학교였기에 여러가지 충돌이 발생했다.
1929년 6월 26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 곤도가 밖에서 한국인들이 개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야만스럽다고 외쳤다. 평소 곤도는 자신의 아버지가 송정리 경찰서의 경부보라는 것을 믿고 거만하게 행동했기에 많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며, 이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광주고보 학생들이 곤도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곤도는 태연하게 할 말을 했다는 식으로 나왔고 분노한 한국인 학생들이 곤도를 때렸으나, 곤도가 겁을 먹고 먼저 기차에서 내리는 바람에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4학년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스메요시 가쓰오(末吉克己)·다나카(田中)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 후쿠다가 '''"뭐냐 조센징주제에"'''라는 소리로 적반하장을 했고, 이에 화가 치민 박준채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다.[3] 그러자 나주 역전 파출소에서 일본인 경찰 모리다가 파견되었지만 모리다는 제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따귀를 때리는 등 구타하였다. 급히 나선 양측 학교 교사들[4] 중에서도 광주고보 교사들은 일단 싸움을 말리려 했으나 광주중학 교사들은 싸움을 부추기는 지경이었다.
당일 하교열차 내에서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후쿠다가 다짜고짜 박준채의 뺨을 치면서 화가난 박준채가 후쿠다와 다시 싸웠고 이에 학생들이 몰려들어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데, 승무원이 뜯어말리며 싸움을 말리자 당시 열차에 승차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고, 열차에 있던 다른 승객들도[5]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결국 박준채와 친구들은 속으로 화를 삭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3.2. 크게 번진 싸움


같은 해 '''11월 3일.''' 음력 10월 3일 개천절, 성진회 창설 3주년,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6]이 겹치는 일요일. 일제는 학생들에게 등교하고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사[7]에 찾아가 편파 기사에 대한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신문사에서는 성의있게 대응하지 않았고 화가 난 학생들은 신문사로 몰려와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어 파손시키며 분풀이를 하였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8]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학생 14명과 광주고보 학생 8명과의 패싸움이 또 벌어졌다가 일본 학생들이 한국 학생 최쌍현을 단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몰려가 광주중학 학생들을 충장로에서 두들겨 팼고, 얻어맞은 광주중학 학생들은 광주동부소방서 방면으로 도망쳤다.
이 일이 알려지자 이제는 산발적인 싸움이 아닌 학교간의 전면적인 패싸움이 벌어진다. 수백명의 광주중학 학생들이 '''학교 유도교사의 인솔하에''' 야구방망이죽창 따위를 들고 광주역으로 가 하교하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공격한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몽둥이 등을 급히 들어 곧바로 달려갔고,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으로 광주시내는 개판이 된다. 두 학교의 교사들과 경찰, 소방대원까지 동원되어 싸움을 말렸지만[9] 사태는 진정되지 않는다. 한편, 광주중학의 교사가 광주고보의 교사 와다나베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갈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와다나베는 먼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물러나게 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을 깔보는 태도이니, 양쪽이 물러나야 싸움이 끝난다고 응답했다. 광주중학의 교사들이 이를 인정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물러나자 광주고보의 교사들도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난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으나 일요일 정오인데도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해 투쟁할 것을 논의한다.[10] 시내 각 학교 학생들도 투쟁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은 괭이자루, 장작개비, 목검 등으로 무장하고 오후 2시경부터 행진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한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우선 광주중학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소방대, 재향군인을 동원해 광주중학으로 가는 동문다리를 틀어막자 시위대는 충장로로 방향을 틀었다.
전남도청에 이르자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명을 비롯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들, 학생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한다. 3만여 명에 이른 시위대는 도립병원(현 전남대학교병원 위치) 광장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방향을 돌려 광주천변을 행진하다 해산.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비상 연락과 부상자 입원 문제를 의논한 뒤 해산했다. 한편 광주시내의 일본인들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해 가게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의 결과 일본 경찰측에서는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한국 학생 75명을 체포했지만, 일본 학생들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을 내린다. 한편 조선 총독부의 학무 국장은 이 일이 전국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학생 운동의 철저한 탄압을 각지의 학교장들에게 지시한다.

3.3. 전국으로 번진 항일운동


11월 10일, 다시 등교하게 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잡혀간 학생들의 자리를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날 밤 학생들은 박석기의 집에 모여 학생들을 석방하게 하기 위한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전단을 인쇄한다. 전단에는 학생들의 석방, 식민지 교육 폐지, 교내의 경찰관 침입 금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의 내용이 있었으며 11일에 시위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전단을 학생들에게 돌리며 궐기를 호소하고, 약간의 시간을 갖기 위해 광주 장날인 12일로 시위를 연기한다.
대망의 11월 12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거리에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일전의 동료로 참여했던 광주농업학교에서도 전단을 보자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에 참여하였다. 전단은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뿌려졌으나 교측이 철저하게 학생들을 통제하는 바람에 시위에 바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독서회의 주도로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에서는 광주고보학생 300여명,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무기 정학, 학교는 무기 휴교를 시키며 문을 닫게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언론을 탄압하였다.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탄압의 해제로 전국의 학생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고,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목포상업학교, 정명학교, 나주고등보통학교 등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개교[11]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신간회에서는 김병로, 허헌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신간회의 도움은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4. 사건 그 후


  •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열차 희롱 사건의 당사자인 박준채는 많은 학교들이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퇴 후 몇 주간 전학을 하지 못했으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뒤 졸업하여 조흥은행 목포지점의 은행원으로 시작하여 나주에서 주조장을 운영하다가 1960년부터 1988년 정년퇴직 때까지 조선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와 여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냈으며[12],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이사, 광복회 회원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해오다가 광주학생항일시위 점화자로서의 공훈이 인정되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1년 3월 7일에 노환으로 작고했다. 향년 87세.
  • 장재성은 끝이 좋지 않았다. 여운형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으나 1948년 황해도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해 사상범으로 수배되었고, 6.25 전쟁 발발 직후 북에 협조하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들에게 총살당한다.
  • 열차 희롱 사건의 피해자 중 하나인 이광춘은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가한 공훈이 인정되어 1996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노환으로 별세 하였다.
  • 박기옥은 이광춘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1947년 사망했다. 2019년에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사후 추서했다.
  • 박철웅도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구류형을 받기도 했으나 훗날 비리사학이 문제되어(...) 비난받은 바 있다.
  • 당시 일본인 학교로서 사건의 방아쇠를 당겼던 광주중학교는 해방 후 공립 광주동(東)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학제가 개편되면서 광주고등학교와 분리되었다. 이후 1971년까지 학생들을 받다가 중학교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폐교되었다.
  • 2018년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을 기점으로 주관부처를 교육부국가보훈처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국무총리 이낙연[13] 등이 참석하였다.
  •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금남로5가역 인근)에 위치한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국민 성금으로 건립한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존재하며, 학교 역사관과 건물을 같이 사용하는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관이 존재한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는 훈련 시작 전 기념탑을 향해 묵념을 하며, 전국대회 출전을 위해 상경 前 탑에 들러 참배를 하는 전통이 있다.

5. 매체에서


  •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187화에서 노구가 이것을 소재로 노인삼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단,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는 박준채가 19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2001년에 사망하였다.[14]
  • 예능 웃으면 좋아요에서 여장을 하고 서울 1966라는 코너를 했던 서세원은 자꾸 치마를 접어서 짧게 입으려는 딸이 반국가적 행위를 한다고 꾸짖으며 자신이 1930년대 만주에서 짧은 치마를 입었다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을 당했는데, 이에 분개한 조선인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만주학생항일운동을 일으켰고 이걸 보고 광주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드립을 쳤다. 이 꽁트의 결말은 광주에서 일어난걸 보고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일어났고, 프랑스에선 잔 다르크가 궐기했으며, 미국에선 케빈 코스트너가 늑대와 춤을 추고 이렇게 만주, 광주, 신의주, 프랑스, 미국 5개국에서 소란이 일어난 걸 보고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을 썼다는 다소 기괴한 내용.

6. 관련 단체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7. 관련 문서



[1] 비슷하게 프랑스에서는 파리가 그런 이미지이다. 파리 코뮌 등..[2]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p. 279.[3] 당시 기차 안의 한국인 학생은 30여명 정도였지만 일본인 학생은 100여명 정도 되었다.[4] 양쪽 교사들 다 일본인이었다.[5] 일본인들 뿐이었다.[6] 일본 내에서는 1946년에 문화의 날로 개칭.[7] 현대의 광주-전남 지역의 지역신문인 광주일보와는 별개의 신문사다. 현대의 광주일보는 1952년에 창간한 전남일보가 시초이다.[8]광주공원에 위치. 1926년에 신사의 대문인 토리이(鳥居)가 세워졌다.[9] 소방대원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물을 뿌리기까지 했다.[10] 이때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했는지 와다나베 교사가 말렸으나 결국 광주고보 학생들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11] 심지어 경성제국대학 예과도 참여한다![12] 교수 재직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투쟁했으며 5.18 때도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 관여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광주의 민중운동에서 꽤나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13] 광주일고 45회 졸업생이다.[14] 이름도 살짝 바꿔서 '박준택'으로 등장. 187화의 방송시기를 감안하면 박준채 옹이 작고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