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락은 1863년 1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의성 김씨 김진린(金鎭麟)과 어머니 박주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만 18세 때 양산군수 이만도의 장남인 이중업(李中業)에게 시집갔다. 시아버지 이만도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반포에 반발해 예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남편 이중업도 아버지와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만도는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24일간 단식한 끝에 사망했다.이듬해에는 김락의 친정 오빠 김대락과 형부 이상룡이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고, 김락의 맏아들 김동흠은 1917년 무렵 광복회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데 힘쓰다가 1918년 광복회가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락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제에 대한 반감과 민족의식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17일, 김락이 살던 예안군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 경찰은 이에 강경 진압했지만 민심은 굴복하지 않고 3월 22일에 2차 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락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을 실명했다. 이때 남편 이중업은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에 서명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중국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작업을 주도하다가 1921년 7월 23일 중국으로 가기 직전에 발병하여 병사했다.
두 눈을 실명하고 남편까지 졸지에 잃어버린 그녀는 자살을 두 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주변에서 만류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그녀는 집안에서 자식들을 홀로 돌보다 1929년 2월 12일에 별세했다. 향년 66세. 그녀의 유해는 남편 이중업과 함께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