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사건 이후
5.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
6. 왕후의 강간 여부
7. 왕후의 생존 여부
8. 기타
9. 둘러보기


1. 개요


우리는 세계사에 전례가 없는 범죄적인 사실과 마주하고 있다.

카를 베베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1][2]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3], 일본인 낭인들[4], 조선군 훈련대[5]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
국내 학계의 다수 견해는 을미사변의 배후가 당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내각의 각료 및 원로들이었고 미우라 고로 직전에 조선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6] #
일본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탈을 막으려 했던,[7]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다시 개화파/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이 발발하고 경복궁에 감금되었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면서 주모자들의 목적은 완전히 죽쑤게 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8]을 앞세워 을미사변을 조선의 내부분쟁 사건으로 꾸미려 했지만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기사 등 외국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관과 외신에 사실을 알렸고, 각국의 공사관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하였음이 세계에 알려졌다.[9]

2. 배경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양군이 와해되어 동북지방과 황해 연안 방어가 취약해진 청을 강하게 압박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고 전쟁배상금 외에 요동 반도타이완 섬을 포함한 일부 영토를 차지한다. 그러자 만주와 극동에서의 이권이 위협받을 거라 판단한 러시아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10]
이를 지켜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고종은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더욱 자주 불러 조-러간의 공조를 논의했다.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정에 대한 대대적 개편이 일어난다.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고 이완용[11]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한다. 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망간다.[12]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고 상당수 친일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면서 일본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점점 신빙성 있게 여겼다.[13] 청일전쟁 전후로 중국 내 영토확장과 조선문제에 있어 러시아가 무력시위를 포함한 다양한 채널로 일본에 압력을 주자 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극심해졌다.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선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이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14]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15]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죽임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3. 진행


일본군 주둔문제와 연이은 친일관료 실각 등으로 조-일관계가 빠르게 악화하자 미우라의 전임인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직접 입궐하여 고종과 왕후에게 상당한 거액의 자금을 바치고, 부임 직후 약속했던 것처럼 일본은 언제나 조선 왕실의 안전과 통치권을 보장하다며 협조를 부탁한다. 하지만 고종 내외는 거절하였고 은밀히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내각을 실각시키고 새로운 친러 내각을 구성한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논의한다.
1895년 7월 8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상은 무쓰 무네미쓰 외상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16]
[image]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17]

내외(內外·고종 부부)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묘의(廟議·각의)에서 결정(決定)되는 대로 단행(斷行)하시기를 희망(希望)합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

국내 학계에서 을미사변 배후설의 증거라고 평가받는 이 편지[18]가 쓰인 7월 8일 이후 조선공사는 유신지사 이노우에 가오루에서 존재감 없는 미우라로 교체된다.[19][20]
6월 25 ~ 7월 1일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이온지 외상대행 및 주요관계자들에게 조선 자금지원, 재정, 철도, 전신, 그리고 논란이 된 주둔군 교체여부 등에 대해 의견서를 제출. 대부분 6월 4일 각의 결정사항과 비슷한 유화책이 주요골자.[21]
7월 17일(음력 5월 25일)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한 고종은 자신과 명성황후가 신임하던 홍계훈을 새 훈련대 연대장으로 임명.
9월 1일(음력 7월 15일), 이노우에를 대신해 일본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이 입궐해서 고종을 만났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였다.[22] 조선왕실의 경계를 돌리려는 위장술이었다.[23]
부임한 미우라는 명성황후 암살을 위해 공사관 1등 서기관 스리무라 후카시[24], 조선국 군무고문겸 주재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 등 일부 측근들과 협력하며 우치다 경성총영사를 소외시키고 새로운 실무라인을 구성했다.[25]
9월 24일(음력 8월 6일), 무쓰 무네미쓰의 병환악화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2선 후퇴로 외상대행을 맡게 된 사이온지 긴모치가 멋대로 육군 경성수비대의 통제권을 장악하려던 미우라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한다.
10월 3일(음력 8월 15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왕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여졌다.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궁내부 고문이자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가 대원군을 데리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동원된 낭인들은 주로 일본의 몰락한 사무라이 출신자였는데, 주로 한성신보[26]의 직원들로 사장인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27]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도쿄제국대학교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혹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28] 또한 사건을 조선인들 간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해산될 예정이었던 훈련대 대대장 3명을 끌어들였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 이렇게 포섭된 인물로, 사전에 훈련대 해산계획을 알게된 뒤 훈련대를 양성한 일본인 교관들을 통해 미우라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1대대장이었던 이두황은 우범선과 일본 공사관에 찾아왔다가 처음엔 거절했는데 미우라가 그러면 체포 구금하고 중대장 이범내로 바꾸겠다고 협박해 가담자로 만들었다. 3대대장은 이진범.
일본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당초 계획으로는 10월 10일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7일 일본교관에게 훈련받은 훈련대와 미국 등 비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시위대 간에 충돌사태가 벌어졌고 고종은 훈련대 해산 결정을 내린다. 급작스럽게 해산절차를 밟게되는 바람에 실행일을 10월 8일로 앞당겼다. 변경된 일자는 10월 8일 새벽 4시였지만, 이것 역시 틀어져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적어도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늑장을 부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오느라고 늦어졌는지는 몰라도 새벽 3시에야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아소정(애오개역 부근)을 출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새벽 5시가 넘어서였고,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등은 그제서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잠자던 중에 낭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후사정을 미루어 볼 때 왕후 시해까지는 몰라도 폐위까지는 분명 가담을 했다.
일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의 의도를 따를 수 밖에 없던 것은 일본이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29]을 두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고 흥선대원군이 이준용을 선호했던 것은 맞지만 이준용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위한 꼭두각시로 세울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저 당시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의 사이가 그렇게 콩가루는 아니었고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와 손을 잡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현재 사람들의 바람이 만들어낸 설 중 하나다.[30]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는 달리, 사건은 상당히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흥선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 제2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이들은 겨우 춘생문 앞에 집결한 뒤,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을 향해 돌격했다.
오전 4시가 되자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했다. 이때 고종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왕후도 건청궁에서 벗어나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고종은 이범진을 보내 미국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이범진은 '''4m~5m'''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4시 30분, 일본 공사관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인 훈련대 병력 등 수백여 명, 이들과 합류한 일본인 낭인 3~40여 명, 그리고 미우라에게 을미사변을 부추긴 도카이 산시(東海散士) 당시 일본 중의원[31]의 숙소에서 나온 낭인 십수명이 광화문에 집결해 전열을 다지고 한번에 궁내로 돌격했다. 사다리를 타고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반란군을 조선군 시위대[32]미국인 교관 월리엄 다이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무기와 탄약이 빈약하여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33]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34]이 달려와 반란에 가담한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35] 시위대가 무너지는 와중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과 충성적인 경비병력 200여 명은 흥선대원군이 입궐하자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중단한다.
경비 병력의 저항이 멈추자,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36] 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하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왕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 이때 고종의 외국인 고용자들도 일본 낭인들의 만행에 피해를 입었으며, 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는 복부를 낭인에게 가격당하여 이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왕태자(순종)가 머리채를 잡힌 건 말이 필요 없다.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낭인들은 왕후를 찾아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낭인들을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는 참극이 벌어졌다. 2005년에 발견된 에조 보고서에 의하면, 왕후는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낭인들에게 끌려나온 뒤 낭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칼로 내리쳐 몇 군데 상해를 입혔고, 이후 절명시켰다고 한다. 대체로 그 시각은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6시 정각 직후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는 왕비가 숨진 모습을 목격한 당사자로 훗날 이런 기록을 남긴다.

마침 그때, 시위대의 연대장인 현흥택(玄興澤)이 군복을 입은 채 다만 허리에 찬 칼만을 버리고 겁에 질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어찌 이를 그대로 놓칠쏘냐?! 낭인들의 철권(鐵券)이 그에게 마구 내리 쏟아졌다. 그러나, 현흥택은 겨우 숨을 건져 도망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재수 좋은 사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 곤녕합 방안에 쓰러져 있는 부인이 민비라고 하는 사실이 누군가로부터 퍼뜨려졌다. 나는 직접 방안으로 들어가 그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이 부인은 아직 침소에서 나온 그대로였는지, 상체엔 짧은 속적삼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부터 아래로는 백색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무릎으로부터 그 아래는 흰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잘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하게 생긴 얼굴과 하얀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섯살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죽었다기보단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아름답게 영원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냘픈 손으로 8도(八道)를 움직여 군호(群豪)를 조종했던 민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웅혼(雄魂)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방안엔 유해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실로 처참을 극한 광경이었다. 민왕비(閔王妃)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2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어떻게 손을 내리쳤을까? 오전 8시경이 되어서 모두들 제각기 들고 있었던 일본도(日本刀)를 담요에다 말아싸고, 나와 식자생(植字生) 두 사람의 것은 쿠마베(隈部)라고 하는 장한(壯漢)한테 지워서 광화문을 나왔다. 문을 나서니, 구경을 나온 한국인들이 문전(門前) 한 길에 구름처럼 모여서 놀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지나가고 있었다. -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최근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장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을미사변 당일에 우치다 사다쓰치 경성총영사가 일본의 하라 다카시[37]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에 그 내용이 나온다. '우치다 사신'이라 하는 이 서한는 현존하는 을미사변 기록 중 그 전말을 가장 충실하게 적은 문서로 평가받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이다.

또 사건 한 달 뒤 우치다 경성총영사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중 살해 현장에 들어간소위는 미야모토 소위가 유일했다.#
이후 왕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왕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왕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민 왕후와 주위에 있던 왕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38][39] 아래에 나온 에조 보고서의 항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도중 밖으로 나와 직접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미우라가 고종, 흥선대원군과 함께 3자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렸다. 남은 유골은 훈련대에 소속된 윤석우가 몰래 빼돌려 산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을미사변 직후 오전 11시 미우라는 사이온지 외상대행에게 흥선대원군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허위보고를 보낸 뒤 하루종일 조작된 내용의 보고로 일관하다가 그날 저녁에 보낸 마지막 보고에서야 사실을 실토한다. 그 직후 사이온지는 외무성 정무차관이 이끄는 조사단을 파견해 정확한 사건파악을 지시한다.

4. 사건 이후



"유진 벨은 또 하룻밤을 궁중에서 보냈습니다. 왕은 밤에 두려움을 느끼고 선교사들을 부릅니다. 은 매일 밤 두 사람씩 고종의 침소 앞에서 권총을 들고 불침번을 서며, 내일도 그는 경호하러 갈 겁니다."

ㅡ 선교사 유진 벨의 아내 로티벨(Lottie Bell)이 1895년12월2일 어머니께 쓴 편지 출처

고종은 미국 영국계 선교사가 경호를 하는 것이 신변에 더 안전하다 느낄 만큼 신뢰하며 동시에 일본의 암살을 두려워 했다. 식사도 철가방에 담은 후 자물쇠로 봉인된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음식만 먹었다.[40]
미우라 고로는 이후 고종과의 회담에서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여,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흥선대원군이 입궐했다는 대문짝만 한 기사를 내서, 간밤의 사건이 흥선대원군명성황후 사이의 알력으로 벌어진 것으로 유도하려 했다. 또한 미우라 고로는 조선 외부와 군부에게 이번 사건에 일본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요구해, 이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김홍집은 자기가 서명하고 고종의 명의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이것이 되레 역풍을 불러 일으킨다.
왕태자(훗날의 순종)는 폐서인 조칙에 반발하며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놀란 김홍집은 폐서인 조치를 바꿔서 명성황후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중심으로 서양 각국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국제 여론도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때 일본은 책임을 추궁당하자 "조선인 말을 어찌 그대로 믿나"라 반박했지만 "이건 조선인이 말한 게 아니라 서양인이 본 거다!"라고 재반박당했다. 목격자가 좀 많았어야지(…).[41]
결국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속이려 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 등 사건 가담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일본 법정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들과 서구의 선교사, 외교관이 대거 개입된 고종 탈출 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봐라, 구미도 조선에 개입하는데 왜 우리라고 개입 못하냐?"라며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했다'''. 석방된 이들은 일본에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이후에 출세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혹자는 이를 보더라도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의 입김이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42]

5.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


일본인들이 왕비 살해라는 범죄 행위에 대해 흥선대원군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민씨세력 축출을 원했던 흥선대원군이 일본과 손을 잡은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주는 대신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건의 사실상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다.[43] 거사 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명분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한양 시내에 붙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경복궁 내 강령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왕후 민씨를 싫어하여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고, 실제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분 면에서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인 선교사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The Passing of Korea, 1906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런 까닭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선에서 맨 먼저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쉽고, 흥선대원군은 문제 해결에 대해 단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년 동안의 그(흥선대원군)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뿐임을 그는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 자작은 당연히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도 마침내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계획임을 확신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판결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0월 8일 새벽 3시,' 장사(壯士)들을 포함하는 일본인 대집단이 조선인 몇 사람들과 함게 한강에 가까운 흥선대원군의 거소로 가서 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그들의 우두머리가 사정에 따라 '여우'를 처리하라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 말의 분명한 뜻은, 왕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 무리는 광화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갔고, 바로 대군주의 거처로 향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들의 죄에 더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입 노릇을 한 흥선대원군을 통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기억을 더럽히고 낮추기 위해 온갖 짓들을 다했다.

그래서였는지 1898년 흥선대원군의 사망 때에도 아들인 고종은 장례식에 불참한 것으로 알려져서 을미사변 이후 부자간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 싶다.

흥선대원군은 사실 그전에도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서라면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납치되기 전에도 사실 대원군은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대사관이 습격당했기에 일본이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을 해오면 청나라를 이용해 견제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게 대원군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난의 주동자라는 고종 세력의 밀고로 그는 청나라로 압송되고 이홍장고종을 택했다. 이후 고종이 일본을 통한 개화를 추진하자 도리어 청은 이를 견제키 위해 대원군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러다 이번에는 반대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세웠고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대원군에게 손을 뻗었고 대원군은 주저없이 그 손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이때 고종을 폐위하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실권은 김홍집 내각이 쥐고 있고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동학군, 청군과 함께 일본군을 협공하려고 했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둬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권력을 위해서 누구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인 명성황후를 제거해 준다는 일본의 제안은 달콤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고종과는 을미사변 이전에도 그가 주도한 폐위 시도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권력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부자 관계가 조선시대만 해도 상당한 편이다. 흥선대원군이 비판 받아야 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이전에 비슷한 기만을 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미우라 일파에게 을미사변의 정당성을 부여해 '''미우라와 손잡은 훈련대 반역자들, 타국의 왕궁을 피바다로 만든 일본군, 자신들을 지사로 둔갑시킨 일본인 깡패무리의 만행에 본인의 의사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시위대와 왕궁의 경비체계를 와해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은 했던 건 일본 수비대나 한줌 낭인들이 아닌 훈련대와 '''흥선대원군 본인이었다.'''[44]

6. 왕후의 강간 여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 1966년 9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을 발간한다. 그는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이 책을 신학자 안병무가 번역하여 《한일합병사》로 1982년 한국에 출판되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 한일병합사(1982)

야마베 겐타로가 무엇을 보고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능욕이라 서술했는지 나오진 않지만 야마베 겐타로가 일본의 한국병합을 서술하면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하였기에 에조 보고서를 토대로 서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쓰노다 후사코는 1988년 1월 발간한 《민비암살(閔妃暗殺)》에서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중 나는 동포로서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 보고되었다.' 라고 서술하였다.
해당 자료인 에조 보고서의 작성자는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이다. 사이온지[45] 의 지시를 받은 쓰에마쓰는 에이조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게 하였고 에이조는 을미사변 다음날 이 보고서를 쓰에마쓰에게 보낸다.
이 '에조 보고서' 에 국부검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46]

四 実行者

コノ荒仕事ノ実行者ハ訓練隊ノ外守備隊ノ後援アリ。(後援ハ或ハ当ラザルガ如シ。) 尚守備隊ノ外ニ日本人二十名弱アリ。熊本県人多数ヲ占ム。(漢城新報社連)中ニ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モアリ 隨テ洋装和装相混ぜリ 岡本ハ大院君ト同時入城シ實行ノ任ニ當レリ 守備隊ノ将校兵卒ハ門警護ニ止マラズ門内ニ侵入セリ。殊ニ弥次馬連ハ深ク内部ニ入リ込ミ王妃ヲ引キ出シ二,三ヵ所刃傷ニ及ビ、且ツ裸体ニシテ局部検査(可笑又可怒)ヲ為シ最後ニ油ヲ注ギ焼失セル等誠ニ之レ筆ニスルニ忍ビザルナリ。ソノ他宮内大臣ハ頗ル残酷ナル方法ヲ以ツテ殺害シタリト言ウ。右ハ士官モ手伝イタリシモ王トシテ兵士外日本人ノ所以ニ係ルモノノ如シ。大凡三時間ヲ費ヤシテ右荒仕事ヲ了ラシタル後、右日本人ハ短銃又ハ刀剣ヲ手ニシ、徐徐トシテ光化門(王城正門)ヲ出テ群衆ノ中ヲ通リ抜ケタリ。時巳ニ八時過ニシテ王城前ノ広小路ハ人ヲ以ツテ充塞セリ。

이 사건의 실행자로는 훈련대 이외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혹은 후원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 쯤 있었다. 구마모토 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며 (한성신보사와 연관된 )그들 중 신문기자 몇명과 의사, 상인도 있었다. 그래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특히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두세군데 칼질을 하고(칼로 상처를 입히고 나서)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우습고 화가 치민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든가 하는 참으로 이를 쓰기가 염려된다. 차마 쓰기 어렵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돕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3시간 남짓을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다. 그 때가 벌써 8시가 지났고 왕성 앞에는 사람으로 가득차 막혀있었다.

그런데 야마베 겐타로가 쓴 '사체 능욕'과는 다르게 '''칼로 상처를 입힌 뒤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를 하고'''라 되어 있다. 상처입은 상태의 능욕이다. 이를 강간의 순화된 표현으로 본다면 살아있었다면 강간으로도 볼 수 있고 죽었다면 시간(동음이의어)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에서 국부(局部)가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된 것은 1936년 아베 사다 사건이 시초이며 을미사변 당시에는 현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보고서에서의 '국부'는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 이외의 의미로는 해석 자체가 되지 않는다.
혹은 '국부검사'라는 것이 강간은 아니고 성기를 관찰하거나 만져서 능욕하였거나 임신 여부를 검사하였다는 해석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쪽으로 보든 간에 추악한 짓거리를 벌인 셈.
강간설에 대해서는 소설가 김진명이 쓴 소설 <여우사냥>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도 나온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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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사

7. 왕후의 생존 여부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 인문학 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소와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민 왕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라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 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 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조선의 왕후가 아직 살아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성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대군주와 왕태자(순종)는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대군주는 왕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 명을 죽였으며, '''왕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민 왕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 부호가 달리기는 한다. 만약 민 왕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민 왕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 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는 이전 임오군란 때도 큰 난리통에 궁녀 옷으로 변장하고 궁을 탈출해 숨었고, 조정에서는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 적이 있다. 만일 왕후가 살았다면 임오군란의 해프닝이 그대로 재연된 셈인데, 그때는 사태가 진정된 후 왕후가 직접 돌아왔지만 이 때는 그러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영국이 착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 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민 왕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고 하지만 사건 초기에 흔히 일어나는 오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48]

8. 기타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8년 간행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서양에도 소식은 퍼져 있었으나 일부 외교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그러한 일이 있었다'라는 건조한 사실 외에 배경이 되는 조선이란 나라 자체에 대한 정보는 널리 퍼지진 않았는데, 이 책이 당대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한 일종의 교양서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 을미사변에 가담한 48명의 낭인 중의 한 명인 도우 가츠아키(藤勝顯)는 민 왕후를 두 번째로 베어 마지막 숨을 끊었노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櫛田) 신사에 그가 사용한 칼[49]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칼의 나무 칼집에는 그가 직접 새겨 넣은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다. 이 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재일교포 2세인 나라여대 김문자 교수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게 민간 신분의 일본 낭인이 아닌 일본 육군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고 밝혔다. 국내학계에서도 일본 낭인이 아닌 일본군 장교의 범행이었다는 주장이 증가하는 추세다. #
  • 명성황후 민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른 방향에서 이 을미사변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파멸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곤란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일로 인해 명성황후가 '나라를 위해 노력했으나 무참히 살해된 비운의 왕비'로 미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게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만 죽은 것도 아니고 저항하던 시위대와 관리, 궁녀들도 대거 희생당한 시점에서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결코 미화하기 힘든 만행이다.
  • 명성황후 살해범 48명 중 1명인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후손이 명성황후의 무덤 앞에서 사죄하기도 하였다.명성황후 살해 가담자 후손들 처음 한국찾은 날
  •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은 을미사변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재 을미사변을 다루는 일본의 중학교 8종 역사교과서 중에 1종에 불과하다. 이 교과서는 마나비샤에서 출판한 교과서로 이마저도 내용을 축소했고, 일본의 입장에서 왜곡해 기술하고 있다.

9. 둘러보기




[1] 일단 미우라가 조선공사에 부임한데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이전 공사이자 유신원로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같은 조슈번 출신임에도 비주류이며 자신과는 인연이 없어 꼬리자르기에 용이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를 후임 전권특명공사로 내각에 천거하고 그에게 군사작전의 성격을 띤 명성황후 시해의 감독 역할을 맡겼다는 주장, 이노우에 가오루와 대립하며 미우라 고로에게 공직복귀를 설득한 다니 다테키, 도카이 산시 등이 방향전환을 위해 이노우에를 낙마시키고 무쓰 무네미쓰의 지지를 받아 미우라를 이토 히로부미에게 추천했다는 주장, 이노우에가 경쟁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실각하고 조선공사관에 공백이 생기자 육군 일각에서 미우라 고로를 추천했다는 주장 등 누가 관여했고, 미우라 낙점과 을미사변 발생까지 어떤 과정으로 일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을미사변에 대한 해석에서 국내학계는 주로 이토내각 배후설을, 일본학계는 주로 만주사변과 같이 일부 일본 측 인사의 경거망동이나 미우라 단독범행설을 지지하는 편이다. 와다 하루키처럼 한국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진보적인 학자들부터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하타 이쿠히코 같은 학자들까지 미우라 고로 공사지명과 을미사변에 대해, 95년 7~9월 각의 참가자들 사이에 오고 간 서신들을 배후설의 결정적 증거로 여기는 한국의 주장과는 해석상의 괴리감이 크다.[2] 동아역사연구소 이민원 소장의 관계자 회고록 해석에 의하면 미우라의 조선공사 부임에 대해 미우라의 추천인이라고 알려진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신이 아닌 이토의 의향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에 비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노우에에게 추천받았다고 증언하며 미우라 본인은 이노우에와 이토가 자신을 떠밀었다고 주장했다. 미우라 고로가 공사로 부임한 날은 을미사변 37일 전인 9월 1일. 이노우에 가오루는 미우라 고로와 한성에서 17일간 같이 지냈으나 업무인계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을미사변 20일 전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3] 공사의 지휘를 받는 공사관 수비대, 공관경찰과 달리 육군 경성수비대는 이들과 업무성격이 다르고 공사관이 아닌 육군성 지휘계통에 속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을미사변 당일 경성수비대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한동안 우왕좌왕하다 사태가 거의 끝난 뒤에야 조선인 장교들의 지원요청으로 괴한(?)진압을 위해 궁궐에 도착했다. 조선인 장교들의 요청으로 출동한건 초기 한성의 일본군 주둔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러시아와 외국공사들이 경성수비대 주둔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이들의 주임무에 고종과 조선왕실의 보위를 명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군 훈련대와 연관된 몇몇 경성수비대 소속 군인들은 구스노세 중좌와 함께 행동하며 을미사변에 깊숙히 관여했는데, 유력한 명성황후 시해범인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 등 조선군 훈련대 교육에 참여한 그룹이 바로 이들이다.[4] 일본인 사장에 일본어로 원문을 쓰던 한성신보 직원, 대륙낭인 등 40여 명의 민간인 신분 가담자. 일본군과 함께 명성황후 살해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한성신보는 을미사변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반러-친일성향의 논조를 유지하며 쟁점사안에 있어 줄곧 고종 내외를 비난하는 사설을 게재해 오다가 사건 이후에는 흥선대원군에게 을미사변의 책임을 덮어씌운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본국의 주요 신문들은 한성신보를 인용하며 "대원군과 조선인들이 한성에서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라는 투로 사건을 보도해 일본과 국제여론을 호도했다.[5] 당시 조선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던 일본 육군 장교들을 교관으로 둔 부대였고 고종이 훈련대 해산을 준비하자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은 훈련대 교관이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 이시모리 요시나오 대위 등 조선 주재무관들에게 훈련대 해산 정보를 전달해 당황한 일본 측이 거사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을미사변 당일에는 300여 명의 훈련대 병사들이 동참했는데 이는 당시 동원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 보다 더 큰 규모였다.[6]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상이 1895년 7월 8일 무쓰 무네미쓰 외상에게 보낸 편지에 (1)세외(世外·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 시켜야 한다 (2)내외(內外·고종 부부)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 (3)묘의(廟議·각의)에서 결정(決定)되는 대로 단행(斷行)하시기를 희망(希望)한다' 등의 글이 적혀있다. 더 쉽게 얘기하면 "고종과 명성황후 일파의 행동을 이상 방관할 수 없으니 공사인 이노우에 백작을 현지로 보내고 이후 각료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 대로 그에 맞는 행동에 나서기를 희망한다."라는 내용인데, 정황상 해당 내용이 을미사변 사전모의를 의미한다는 것이 주로 한국 학자들의 견해이며 이를 이토내각 배후설의 결정적 증거라고 해석한다.[7]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러시아)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의 외교[8] 을미사변 당시 반역을 저지르며 일본측에 협조한 조선인들은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 3명인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권동진, 유혁로, 정난교 등으로 대부분 친일파, 혹은 개화파였다. 단, 흥선대원군은 친일파도 개화파도 아니었고 단순히 명성황후의 정적이었다.[9] 러시아 공사관의 공동 책임자인 스페에르, 베베르를 필두로 각국 공사들은 주도자 미우라와 사태수습을 위해 급파된 고무라 차관을 비판하면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강한 압력을 행사했고 조선에서 일본의 외교적 위기는 춘생문 사건 이전까지 절정에 달한다.[10]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더라도 뤼순과 다렌항만은 어떻게든 얻어내기 위해 러시아 외무성과 끈질기게 교섭했으나 끝까지 퇴짜를 맞았다. 그 후 요동 반도를 청에게 반환한 대신 추가로 은 3천만 냥을 청으로부터 더 받았다.[11] 이 당시엔 친러파였고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한다.[12] 당시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으로, 금릉위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오히려 반일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인지 고종는 일본으로 도망가는 박영효의 피난로를 느슨하게 했다고 하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측 공문서가 증명하듯 박영효는 이노우에를 포함해 공사관은 물론 일본 민관계의 유력자들과 조선개혁을 문제를 두고 실각 직전까지 긴밀하게 협조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기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13] 하지만 실제로 1884년 조러 통상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지속적으로 조선에서 기존 종주국 청과 신흥세력 일본, 쌍방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필요시 러시아와 합의해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는 것까지 고려했다. 이는 청일전쟁 후 더욱 러시아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독립국의 군주로서 지나치게 러시아에 굴종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으나, 장기간 침체기에 빠져있다가 늦게서야 개혁논의를 시작한 조선으로서는 자국의 미약한 재정상황과 전근대적 행정력 만으로는 당장 외세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없었고 힘을 키울 때까지 외부의 위협을 막아줄 신뢰할 수 있는 후견국이 필요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외부에서 신식군 1개 연대만 단독으로 파견해도 한양까지 단숨에 무너질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방이 취약한 상황이었고 개혁에 필요한 자금이나 전문가, 안보적 지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국경상의 유일한 열강은 한반도의 부동항과 기타 이권확보에 관심이 많긴 하였으나 차선책이라고 볼 수도 있는 셈.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를 교두보로 삼아 극동에서 패권을 쥐려는 러시아의 행동을 영국이 가만히 둘 리 없었고 이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과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배경이 된다.[14] 미우라의 추천인이 이노우에 본인이라는 설과 달리 이노우에는 자신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의 결정이었다고 증언한다. 이토와 미우라는 이를 부정하지만 다니의 추천서나 이노우에에 대한 비판여론이 어느 정도 공사교체에 영향을 미친거라 유추해볼 수도 있다. 미우라의 부임이 확정된 뒤 그동안 이노우에가 야마가타, 무쓰, 요시카와 등 각료들의 동의를 설득했던 새로운 대조선, 대러방침은 거의 백지화된다.[15] 국내에서 주요 혐의자로 자주 언급되는 이토 히로부미와 기타 내각중진들, 혹은 미우라와 가까운 도카이 산시, 육군의 실세였던 가와카미 소로쿠 등 주로 일본학계에서 사태의 배후라고 지목되는 개별 혐의자들.[16] 당시 이토내각의 대신들은 물론 내각 밖의 영향력 있던 인사들도 러일관계 및 조선문제와 이노우에 공사의 의견서에 대해 서로 논의하며 해당 편지를 비롯한 여러 서신들을 주고 받았다.[17] 조선 정부에서 친일대신간의 알력다툼과 김홍집 등의 사표재출로 소란이 일고 있을 무렵, 무쓰 외상에 의해 몇차례 반려된 이노우에의 귀국요청이 받아드려져 이노우에는 5월 31일 본국의 귀국지시를 받고 6월 11일 인천을 출발해 일시귀국했다.[18] 이외에도 요시카와 아키마사 사법상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중 문제되는 부분인 "미봉책을 포기하고 결행의 방침을 채택해야") 등 일부 서신들에 쓰인 표현들이 명성황후 암살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 그에 비해 주로 일본 학계에서는 해당편지들이 논의한 건 누군가의 암살계획이 아니라 '이노우에안'에 대한 토의와 6월부터 9월까지 복합적인 사안들에 대해 여러 차례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되고 때때로 입장전환이 이루어졌던 과정의 증거라고 보는 편이다. 이런 양측의 견해차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19] 이노우에 가오루의 을미사변 관여 여부, 즉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고 명성황후 암살계획을 구체화시킨 장본인인지 아니면 이토내각과 정계, 육군의 다른 파벌들에게 밀려나 결국 하급자인 미우라에게 자리를 빼앗긴 부외자인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으며 한국에서도 논쟁중인 사항이다.[20] 다만 이노우에가 본국으로 일시귀국한 뒤, 부흥하던 국내 농상업이 1894~95년 전란으로 큰 타격을 입어 다시금 경제난에 빠진 조선에게 청일전쟁 배상금 중 500만 엔을 혜여하는 안 등을 포함해 원조-내정-전신-철도 등 다방면에서 상당히 온건한 정책방침을 제시했다는건 사실이다. 일본에게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보다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선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반대파에게 박영효 실각과 러시아의 강화된 대일압력 문제로 책임을 추궁당하며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각료들과 협의하던 중 불분명한 경위를 거쳐 공사교체가 정해진다. 그가 조선외교에 있어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인물인 건 맞으나 이노우에 역시 열강들의 눈치,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를 고려해가며 외교를 수행했을 뿐 조선에게 딱히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그가 제국주의적 관점에 한반도를 취급하며 (그 당시 식민화까진 아니더라도) 조선을 메이지 일본의 앞마당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21] 해당사안들은 원래부터 구체적인 접근법에 있어 이노우에가 무쓰 외상 및 육군내 강경파와 대립하던 사안들이었고 삼국간섭의 여파로 육군성, 해군성, 외무성 모두가 데꿀멍 상태가 되면서 일시적이었지만 이노우에안에 힘이 실리게 된다.[22] 염주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두문불출하여 '염불 공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23] 일단 전임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이토 히로부미야마가타 아리토모 와 같이 조슈파의 거두로써, 초대 외무대신이기도 하였던 사람인 것과는 다르게 미우라 고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에 가까웠다.[24] 자신의 회고록인 재한고심록에 사변의 핵심설계자는 미우라가 아닌 자신이었으며 조선 당국의 민씨일파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대원군을 이용했다고 기술했다.[25]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 암살의 내막을 알게된 우치다 총영사는 우치다 문서로 불리는 사건보고서를 작성하는데 해당 문서는 한-일 학계에서 일본인 관계자가 쓴 가장 양심적이고 사실관계가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26] 일본인이 설립하고 일본어로 원문을 쓰던 신문으로 을미사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고종 내외를 비난하는 논조를 썼다.[27]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회부된 비군인신분 관계자 47명 중 구마모토 출신이 21명이었다.[28] 실제로 살해의 주범들은 전부 치외법권으로 인해 일본에서 재판을 하여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으로 풀려나갔다.[29] 청일전쟁 당시 대원군의 밀사로 활동하며 대원군이 일본에게 버림받은 뒤 동학군, 청군과 접촉해 대일 공동전선 구축을 논의하다 일본에게 발각됐다. 원래부터 흥선대원군 일파의 핵심인물로 정부 요직들에 두루 임명되었고 당시에는 법무대신 김학우를 암살한 죄로 10년 유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때 박영효는 앞장서서 이준용의 사형을 주장했으나 박영효의 경쟁자들은 물론 이노우에 마저 그건 너무 심하다고 반대해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30] 확실히 납치된 것은 아니였겠지만, 대원군이 일본 측과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이러한 일을 벌였다라는 기록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한 대원군이 늦은 것 역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라는 설도 있는 만큼 대원군 포섭은 '''일본이 철저하게 조선 내부의 분쟁사건으로 가기 위한 작전이였음 보여주는 것이다.'''[31] 본명은 시바 시로(柴四朗)로 미우라 고로의 친구이자 박영효 등 개화파 조선인들과 가까웠던 조선통. 이노우에를 떨어뜨리고 미우라가 신임 조선공사직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미우라가 공사로 부임한 뒤 조선에 입국해 있었다. 본업은 언론인으로 국수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책을 내 의원이 되었다. 동생인 시바 고로(柴五郎)는 후일 육군대장까지 이르렀다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자살했는데, 러일전쟁 때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이위종의 행적을 염탐한 적이 있다. 이 집안은 무진전쟁에서 막부 편을 들다가 일가가 거의 몰살하고 형제만 살아남은 케이스라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더 나댄 듯하다.[32] 훈련대와는 별도로 궁궐을 지키던 부대로 일본군 교관의 지도를 받은 훈련대와는 달리 미국인 교관의 훈련을 받았다.[33] 그 전해의 경복궁 점령 당시,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궁궐을 지키는 조선군의 무기, 탄약을 죄다 향원정 연못에 빠뜨렸다. 이 총들이 아직도 정비가 안 된 상태였다. 또한 탄약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34] 을미사변 직전에 훈련대 연대장이 되었다.[35] 무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위대 병력의 절반 가량은 궐 밖에 나가 있었고, 궐 안에 있던 300명의 인원으로는 잔류하던 병력의 무기가 멀쩡했어도 무장이 훨씬 양호하던 훈련대와 일본군을 모두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36] 당시 궁에 침입한 일본군보다 조금 더 수가 많았던 무예청과 항전파 경비병력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단히 충성적이었고 다수의 훈련대 병사들 역시 일본측의 지시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명을 따랐다. 다시 말해 을미사변 도중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멋대로 감금할 만한 여력은 없었던 셈.[37] 다음해인 1896년 조선공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훗날 수상.[38] 궁녀들은 평생 처녀로 지내야 하고, 임신 경험이 있는 건 왕후뿐이기 때문이다.[39] 왕후의 용모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유방의 처짐으로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방만 가지고 나이를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냥 뒤에 덧붙여진 자극적인 도시전설인 듯하다.[40]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00406218300004[41] 을미사변이 있었던 이때에 왕과 왕비는 불안해 했기에 인근에 서양인들을 숙직시켰다. 을미사변은 크게 보면 경복궁에서 일어났지만, 왕과 왕비는 경복궁 북쪽에 있는 건청궁(지금 경복궁을 가면 청와대 가까운 곳에 단청을 하지 않은 양반가 건물 같은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건청궁이다.)에 머물고 있었기에 일본군과 낭인 및 반역을 저지른 훈련대는 이곳으로 처들어와서 왕과 세자를 겁박하고, 왕비를 참살하였다. 그런데 이곳 인근에 집옥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당시 이곳에서 서양인들 몇 명이 숙직하고 있다가 이러한 참변을 목격하였다.[42] 전임 공사 이노우에는 당대 거물정치인 이토와 육군 최대 계파에 수장 야마가타와 함께 묶을 수 있는 거물급 인물이였고, 무츠에게 밀려나긴 했으나 초대 외무경,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외무성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하였다. 후임자 미우라는 한때 국내에서 전공을 쌓았던 제야의 무인 정치꾼 정도로 취급받은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편.[43] 흥선대원군 파벌이 적잖은 민중의 지지는 물론 군부와 경무청 등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시점이라 일본 측은 민씨-친러파 일망타진 이후 대원군 일파가 또다른 반대세력으로 부상하는 걸 경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서명을 요구한 일본이나 일본을 경멸하던 대원군의 지지세력 모두 각서로 정도로 대원군의 궁정정치가 순순히 막을 내릴거라 믿지는 않았다.[44] 확실히 대원군이 여러 세력과 손 잡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야기 나온 것과 동일하게 외세를 이용해서 중전을 죽이고, 왕을 겁박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는지는 미지수이다. 참고로 대원군은 자신이 집정하던 고종 초기에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위해서 천주교도들과 접촉하여 프랑스와 연결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이이제이 방식을 자주 사용하던 사람으로 중전의 정치적인 생명을 제거하려고 한 적은 있지만, 생명까지 빼앗고자 한 사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다.(임오군란 때에는 군란의 이유가 중전과 척족에게 있었고, 대원군이 입궐하기 전에 중전이 도망갔으며, 전국에 추격령을 내리지 않았다.)[45] 12대 일본 총리[46]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47] 애시당초 이 소설의 모티프 중 하나가 에조 보고서이다.[48] 세계 최고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미국도 이러한 오보를 자주 발표하곤 하는데 이는 쏟아지는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의 오류를 수정하지 못해 발생하는 일로서 대표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 개전 초기의 사담 후세인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 소식. 다들 알다시피 사담 후세인은 요리조리 피해다니다가 죽었고 빈 라덴은 파키스탄에 숨어있다가 죽었다.[49] 이 칼의 이름이 히젠토(肥前刀)라고 한다. 길이 120cm에 칼날이 90c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