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의성 김씨(義城 金氏)'''
'''관향'''
경상북도 의성군
'''시조'''
김석(金錫)
'''집성촌'''
경상북도 의성군, 안동시, 봉화군
충청북도 괴산군, 음성군, 옥천군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전라북도 정읍시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
경상남도 진주시 압재, 밀양시
'''인구(2015년)'''
287,469명
1. 기원
2. 본관
3. 인물


1. 기원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과 고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冊封)되어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김석(金錫)이 경순왕의 4남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 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5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의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2. 본관


의성(義城)은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 조문국(召文國)이었다. 그 후 185년(신라 벌휴왕 2) 신라에 병합되어 소문군(召文郡)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문소군(聞韶郡)로 개칭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일계현(日谿縣)과 고구현(高丘縣)을 합병해 의성부(義城府)로 승격했으나,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의성현이 되었으며, 1199년(신종 2)에 강등되어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의성현(義城縣)으로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의성군(義城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이 되었다. 1940년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3. 인물


  • 김석: 시조, 경순왕 제4자, 의성군(義城君)에 책봉
  • 김영렬: 조선 전기의 무신, 호 맹암(孟巖), 시호 양소(襄昭),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책록, 우의정 증직, 장성 학림서원(鶴林書院) 제향
  • 김안국: 조선 전기 문신·학자, 호 모재(慕齋), 시호 문경(文敬), 김굉필(金宏弼) 제자,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함, 예조판서, 대사헌, 사대부 출신 관료로 주자학적 윤리도덕 규범을 실천하고 보급하기 위해 애씀, 인종 묘정 배향, 평안도 용강 사액 오산서원(鰲山書院),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등 제향
  • 김정국: 조선 중기 문신, 호 사재(思齋), 시호 문목(文穆), 성리학자, 사가독서(賜暇讀書), 황해도관찰사, 기묘사화 에 연루되어 화를 당함, 병조참의·공조참판·경상관찰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냄, 사후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추증, 오산(鰲山)·임강(臨江)·문봉서원(文峯書院)등 제향
  • 김진: 호는 청계. 학봉 김성일의 부친, 5형제(약봉(藥峯) 김극일, 귀봉(龜峯) 김수일, 운암(雲岩) 김명일, 학봉(鶴峯)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를 모두 과거 급제 시켰으며[1], 부인 없이 홀로 8남매를 키웠다. 특히 부인과 사별 후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들이 보채면 남자인 자신의 젖꼭지를 물려 달래었다고 한다[2].
  • 김성일: 위 청계 김진의 4째,
  • 김우옹: 호는 동강. 조식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로, 조식의 성물중 하나인 방울 성성자를 물려 받았다. 같은 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와 함께 남인으로 활동한다.
  • 김대락: 호는 백하[3]. 김대락 선생은 온 일가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4], 일가의 독립운동을 이끔. 만주 망명길에 손자 김쾌당[5]을 얻게됨
  • 김하락: 구한말 의병장, 경기도1895년 11월 17일 경기 이천에서 화포군(火砲軍) 소속 포군(砲軍)들을 중심으로 모병 및 거병함. 남한산성전투 등 강도 높은 활동을 거듭하다 이후 경주연합의진을 구성, 경주성을 함락시켰음. 이후 의진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경주성을 포기함. 이후 영덕에서 영해의진 및 안동의진과 합진하여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구성하고 영덕 탈환을 도모하였으나, 격렬한 교전 중에 총상을 입자 자진순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1846.12.14. ~ 1896.7.14.)
  • 김흥락: 호는 서산. 구한말 대유학자, 영남 독립운동의 시작점이 되신 분으로 이 분에 대한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6]. 아래의 김용환 선생은 김흥락 선생의 손자로 종가의 대를 이었다
  • 김길홍
  • 김도현(정치인)
  • 김동삼: 호는 일송. 만주 호랑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별. 본문 참조
  • 김동식(1898)
  • 김명옥: 경북대학교 교수.
  • 김붕준
  • 김용환: '조선 삼대 파락호'라는 위장 아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문 참조
  • 김창숙: 호는 심산. 독립운동가, 교육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 본문 참조
  • 김거익(생몰연대 미상) : 호는 퇴암. 고려 후기 문신 벼슬: 정당문학(종2품)
  • 김시백 : 호는 추강, 시인
  • 김우철: 정치인, 연구인. 현 국토교통부 국토교통전문위원, 전 민주당 대구시당 사무처장
  • 김영길
  • 김원웅: 정치인,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김근수
  • 김윤주: 군포시장
  • 김종갑: 현 한국전력공사 사장, 전 특허청장
  • 김국진: 개그맨, MC
  • 김병준: 정치인, 학자
  • 김애란: 소설가
  • 김은정: 컬링 선수
  • 김선영: 컬링 선수
  • 김재춘
  • 김현권
  • 김호길
  • 김화남
특히 구한말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서 친인척 등이 종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1] 경국대전에 ‘아들 다섯이 과거에 합격한 부모에게는 임금에게 보고해 해마다 쌀을 보내주고,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라는 조항이 있다.[2] 소문에는 그래서 인지 젖꼭지가 유독 길고 검었다고 했다.(...) 비슷한 얘기로 조선시대 어느 소년가장도 모친을 떠나보내고 어린 동생들 젖을 물리다가 발달이 돼(...) 남자임에도 흰 젖이 콸콸 나왔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남자들 중에도 가슴에 젖선이 있다고 하며, 영양실조로 인해 호르몬 계통에 문제가 생겨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잘록해지는 등 여체화 현상을 겪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한다.[3]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아래서 산다는 뜻[4] 150여명의 일가를 데리고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신의주 까지, 신의주에서는 걸어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5] 통쾌할 쾌(夬), 당나라 당(唐) 즉 국권을 잃은 조선에서 낳지 않고 당나라에서 낳게 되어 기쁘다는 의미로.[6]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부민들의 고혈을 짜자 부민들이 민란을 일으켰고 겁을 먹은 부사가 벌벌 떨다 서산 선생에게 부민들을 달래어 달라고 부탁했다(이때 선생이 부폐한 부사에게 "민정이란 순리로 임하면 잘 따르고, 거스르면 반발하는 것이니, 깊이 반성하라" 라고 꾸짖으셨다). 서산 선생이 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섰다는 소문이 나자 피난 갔던 읍민들이 “금계 나으리께서 나셨으니 이젠 됐다.”고 환호했을 정도이며, 저녁 무렵, 난을 일으킨 백성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들자 “곧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테니, 물러나 기다리라.”고 하자 격앙했던 군중들이 서산 선생의 말씀이면 믿을 수 있다며 모두 몽둥이를 던지고 흩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