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상(무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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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일생
4. 여담


1. 소개


金潤相
합기도 3대 도주, 용술관 총재 #
최용술 1대 도주의 직제자이며 고수를 찾아서에 중요한 비중으로 출연하였다.

2. 일생


1974년 무술을 수련하던 김윤상이 자신의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마흔이 넘어 최용술를 찾아가면서 최용술과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 시작 전에 대한늬우스를 방영하였는데, 그때 나온 합기도 영상이 계기가 되어 무력(武歷)이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후일 합기도에 대한 한계를 느끼던 중[1] 최용술 도주의 시연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직접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여 협회 측에 최용술의 소재지를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그의 근황을 모른다고 하거나, 심지어 죽었다고 하는 등이었기에,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고생 끝에[2] 최용술을 만나 배울 기회가 생겼으며, 첫 수련 때부터 흰띠를 매고 시작하였다고 한다. [3]
김윤상의 술기가 깊어지던 시기, 최용술 도주는 그에게 직접 도장을 하라는 충고를 하였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도장이 용술관이다.
최용술 도주가 죽기 1년 전인 1985년에 9단을 직접 수여받았고, 2002년 4월에는 최용술 대구종가로부터 정식으로 합기유술의 3대 도주[4]로 추대되었다. 최용술의 손자 또한 김윤상 도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5]
현재 최용술의 합기유술을 원형 그대로 가르치고 있으며 스승인 최용술과는 각별한 관계로[6] 그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운동을 쉬지 않고 합기도만 고집하는 이유도 수련을 계속하라는 최용술 도주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라 하였다. 유파가 난립하고 스승을 부정하는 일도 생기던 이전의 사례들과는 대비된다.

3. 용술관


문서 참조

4. 여담


고수를 찾아서에 출연해 자신의 술기와 내공을 보여주었다. 건장한 성인을 그것도 십수년 이상 합기도를 수련한 제자나 타 유파 고수들을 [7] 손가락 하나로 무력화하는 믿기 힘든 실력을 보여주었다. [8]

[1] 합기도의 기술이 발차기나 당사자의 힘 만을 사용한, 우왁스런 기술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이가 더 들면 과연 기술을 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2] 최용술의 소재지였던 대구에서 유술을 가르친다는 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다, 장인목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윤상에게 '''나도 최 영감처럼 대동류를 했으니, 나에게 배우는 것이 어떠한가?'''는 제안을 하였다고 증언한다.[3] 사범급이었던 당시 김윤상과 일행들이 검은 띠를 매자, 최용술이 불같이 화를 내며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4] 2대는 최용술의 아들인 최복열이었으나, 합기도 통합 시도 중 사망하였다. 그 이외에는 장진일 또한 2대 도주로서 해외를 담당토록 하였다.[5] 지금은 독립하여 또 다른 단체를 만들었다.[6] 스승의 행적을 따라 대동류 종가를 비롯하여 수시로 일본 각지를 방문하며, 스승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7] 무토에서 올린 용술관 특집 3부작에서는 합기도 협회 소속의 도장 사범이 용술관을 방문하여 김윤상 도주와 제자들에게 술기를 받기도 했다.[8] 당시 합기도 협회 소속 사범은 2017년 현재 브라질리언 주짓수을 수련 중이며, 용술관에서의 경험을 흥미로운 기억으로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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