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술관

 


한자
德庵流 合氣柔術(덕 암 류 합 기 유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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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1. 설명


일본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의 대동류 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로부터 파생된 대한민국무술로, 도장 명의 유래는 한국 합기도의 시초인 최용술(崔龍述 1899-1986) 도주의 이름에서 따 왔다. 최용술 도주는 자신의 고향 충청도에 위치한 도장인 용술관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할 정도로 특별히 아꼈다. 그가 처음 선 보인 기술, 소위 원형 술기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한풀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총본부 합기도 용술관(合氣道龍術館)은 충청남도 금산군에 위치.
현재는 창시자의 호인 덕암(德庵)에서 따와 덕암류 합기유술(德庵流 合氣柔術) 이라는 명칭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이유는 최용술 도주가 1950년대 대구에서 처음 가르침을 펼칠 당시의 합기원형술기를 보존하고, 현대의 합기도와 구별하여 전수하도록 원래의 명칭인 '''합기유술'''을 사용하라는 의미에서란다. 현재 용술관의 관장은 합기도 3대 도주 김윤상(金潤相)으로, 팔순 중반의 연세에도 스승의 유언에 따라 매일 도복을 입고 수련하며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1] 김윤상 도주는 세계에 몇 없는 합기(合氣)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한다. 고수를 찾아서에 출연해 자신의 술기와 실력을 보여주었다. 건장한 성인을 그것도 십수년 이상 합기도를 수련한 제자나 타 유파 사범들을[2] 손가락 하나로 무력화하는 믿기 힘든 실력을 보여주었다.[3]
2000년대초 일본 대동류 합기유술 종가 성심관의 후쿠오카 마사미[4]가 용술관을 다녀간 후[5], 비전(秘伝)[6]에 용술관을 소개한 기사에서 발췌.

1. GM[7]

Kim Yun-sang showed me his techniques.

김윤상 대선생은 나에게 그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2. DR, he had power-release-aiki, Matsuda Toshimi was named for well-teaching it. Now Matsuda DR students are practicing it

대동류다. 김윤상 선생은 힘을 푸는 '합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츠다 토시미[8]

가 그 기술을 잘하였다고 알려져 있고 지금도 마츠다의 대동류 제자들이 이를 수련하고 있다. [9]

3. Exactly it had DR characteristic in the stem.

정확히 그 줄기에는 대동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4. He had high skill. It can't be denial.

그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부인할 수 없다.

5. That includes some other techniques of DR.(still unideinfied, probably Youshin-ryu stream)

그 기술은 다른 대동류의 기술들을 포함하고 있다.(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요신류 스타일)

6. It was special style I never seen.

이는 내가 전혀 보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7. Generally, HKD stemed from DR techs and has developed on their own way.

일반적으로 합기도는 대동류 기술에서 나왔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을 개발했다.

8. GM Kim Youn-sang's skill is authentic (It can be reliable for Korean students). No need to rely on Takeda Sokaku's myth.

김윤상 대선생의 기술은 진짜다 (한국의 수련생들은 믿음을 가져도 좋다). 다케다 소가쿠의 전설에 의존할 필요없다.

적극적인 홍보 보다는 소문이나 여러 매체 등 에서 소식을 접하고 찾아 오는 수련생들이 대부분이다.[10] 특히 고수를 찾아서의 저자 한병철[11]의 서적과 방송에 소개된 이후부터 수련생들이 늘었다고 한다. [12] 실제 경험을 해 본 타 무술계 수련인들[13]이 합리유술이라 부르기도 할 만큼 합리성과 나름의 깊이가 있다. 김윤상 도주는 합기도를 목적에 따라 수련용과 시합용으로 나누어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14]
한국의 합기 관련 무술 중에서도 고류 형태의 유술 모습에 근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간단한 손, 발차기 [15] 수련을 제외하면 수련 시간 대부분이 유술 기술을 익히는 훈련의 반복이다. 승급도, 승단도 쉽지 않으며, 수련 강도도 강하고 쎈 편. 분위기도 조금 살벌해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수련을 그만두는 관원생도 상당하다. [16] 낙법도 기존 합기도에서 볼 수 있는 낙법이 아니라, 딱 당사자 자신의 머리를 충격에서 보호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한다. [17]
술기의 형(形)을 한풀처럼 김윤상 도주가 다시 분류하고 육갑비축에서 글자를 따와 임술기, 병술기, 투술기, 자술기, 개술기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18]
그리고, 기존 한국식 합기도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는데, 아이키도처럼 양손을 전부 수련한다는 것이다. [19]
예전에는 삼국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 없이 '일본에서 온 야와라(柔)'라고 깔끔하게 주장한다. 과거에 최용술 도주 본인이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였고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웠다는 말을 하여 논란이 있었다.[20]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다케다 소가쿠에게 직접 배웠기도 했으며,[21] 또한 대동류의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무술가 리처드 킴이 1984년 미국 합기도인 글렌(Glenn)에게 보낸 편지만 보더라도, 최용술 도주가 다케다 소가쿠의 직제자인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의 뛰어난 제자였고, 최용술 도주의 일본 이름이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였다는 내용이 있다. 정황을 따지자면, 다케다 소카쿠한테 배사하되 실질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요시다 코타로한테 배운 듯하다. [22]
요시다 코타로는 흑룡회 맴버였다. 흑룡회란 제국주의 일본의 우익조직으로, 일본 제국이 헤이롱장(흑룡강黑龙江) 일대를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라 이름을 흑룡회라 하였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앞장섰고,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무술계는 최용술 도주가 반일 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된 고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23]
용술관 도장에 있는 최용술 도주가 시연한 대동류 칠리 끌기(七里引技)의 자료를 보도한 일본 비전(秘伝)의 자료.
http://cfile240.uf.daum.net/R400x0/25647A3F50FAAC091D0306
충남 금산 본부 도장외에 서울,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부산, 세종특별자치시, 청주시 등에도 지부가 존재한다.

[1] 처음 스승과 인연이 닿은 것이 40을 넘겼던 1974년라고 한다. 연로한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도복 입고 수련함으로써 현대 한국 무도계에서 보기 힘든 진정한 무도인의 본보기를 보여준다.[2] 당시 무토에서 올린 용술관 특집 3부작에서는 합기도 협회(당시의 진중관) 소속의 도장 사범이 용술관을 방문하여 김윤상 도주와 제자들에게 술기를 받기도 했다.[3] 당시 합기도 협회 소속 사범은 2018년 현재 주짓수 블랙 벨트인데, 용술관에서의 경험을 흥미로운 기억으로 회고했다. #[4] 성심관 관장대리. [5] 이를 계기로 용술관과 관계를 맺으며, 최용술 도주의 행적과 조사에 큰 도움을 준다. 아바시리(網走) 성심관 본가에서 보관하던 수만 명 분의 영명록에서 최용술 도주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한 것도 후쿠오카 부관장이다. 비록 최용술 도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일본인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알려졌던 다케다 소가쿠에게 극소수나마 조선인 제자들이 있었고, '''추천을 받으면 문하로 두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 또한 최용술 도주가 '''누구에게 대동류를 배웠는지''' 고민하며 실마리를 찾고 있다.[6] 비전은 일본의 무술 저널로 2016년에도 세계로 뻗어나간 일본의 유술 특집에서 용술관을 소개하는 등, 용술관에 꾸준히 관심을 보인다.[7] 그랜드 마스터 - 실질적으로는 미국에서 무술 분야의 대원로를 호칭하는 이름.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딱히 조직체의 권위를 가지고 선발한다기보다는 본인의 위상에 의해 자연스럽게 추대되는 경우.[8] 다케다 소가쿠의 직제자. 장인목과 팔광류유술의 창시자 오쿠야마 류호가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9] 그래서인지 용술관에서도 처음부터 술기를 걸 때는 힘을 빼고, 또한 상대를 잡지 않도록 가르친다.[10] 최용술은 생전에 김윤상 도주와 당시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후 자신들(따로 독립해서 합기도 협회를 만든 최용술의 초기 제자들)이 최고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때가 온다면 가르침을 받으러 자네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나올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현재 그 말이 이루어지고있다.[11] 과거 무술 전문 잡지 마르스의 편집인, 서울팔괘장연구회팔괘장 6대 전인[12] 다만, 자신들의 원형 술기가 유출되는 것을 꺼린다. [13] 특히 합기도 계열[14] 도장에 따라서는 대련도 한다.[15] 두 개 정도를 제외하면 허리 위로 올라가는 상단차기가 없다. 대동류 합기유술 항목에 나오듯, '상대방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것'을 중요시하는 무술이 상단 발차기를 감행함으로써 자기 밸런스가 붕괴되는 위험을 감수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발차기들은 합기유권술 도장 당시에 받아들였다는 증언이 있다. # [16] 워낙 있는 힘껏 잡아주고 버티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술기의 묘미를 알기 전까지는 손목은 물집이 잡히거나 빨갛게 부어오르는 게 일상이 된다. 그 단계를 거치고 나면 어느새 손목에 굵은 털이 잔뜩 난다.[17] 원래 최용술은 상대 앞에서 넘어지는 것은 죽여달라는 의미라고 낙법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귀국 후 양조장 2층에 만든 도장에서 수련할 때 부상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첫 제자이자 유도(柔道) 유단자였던 서복섭이 유도식 낙법을 도입했다. 이것이 용술관과 합기도의 낙법이 아이키도식 수신(受身)과 다른 이유이다.[18] 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보고 신흥종교 오모토에 심취했다고 힐난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다케다 소가쿠 자신도 불교, 특히 밀교에 빠졌다. 게다가 스승 사이고 다노모(西郷頼母)에게서 영적인 체험을 하며, 정신적인 면에서도 크게 성숙하였다 한다. 최용술 도주의 원형 술기를 충실히 계승한다는 용술관이 술기 분류에 육갑비축을 사용함도 이러한 영향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용술관 창관 당시, 대구에서 온 최용술 도주도 도장 현판에 손을 대고 밀교식 축언을 하며 번성하길 기원했다고 한다.[19] 기존 합기도에서는 '발도를 막고자 오른손을 잡았다.'는 주장대로 오른손을 잡는다고 하는데, 용술관에서는 양쪽, 특히 양손을 칼처럼 담금질하기 위해 이렇게 수련한다고 한다. [20] 2000년대 초만 해도 무술계에서는 합기도에 '''칼넣기'''와 '''발차기''' 등 기술이 있고, 또 이 기술이 일본의 쇼린지 켄포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무술계에서 최용술 도주의 무술이 실제로는 대동류가 아니라 종도신(나카노 미치오)가 만든 쇼린지 켄포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었다. [21] 우에시바 기쇼마루 도주, 아이키도 초기 제자등의 증언과 발견된 영명록만으로도 최 도주가 다케다 소가쿠에게 직접 배운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22] 이 주장은 중국무술 권사에게서 나온 주장이다. 실제로 중국 무술계에서는 스승의 집에서 잡일을 하고, 대신 사형에게 무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배운 사람들도 스승에게서 배웠다 하지, 사형에게 배웠다고 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중국 무술 수련자들은 이와 같은 설이 자연스레 납득된다고 한다.[23] 왕도의 개에서도 나오지만, 당시의 대동류 합기유술 제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만주와 관련이 깊었다. 흑룡회 회원들 다수가 대동류 관련인이었고, 소림사 권법의 종도신, 만주에 종교국가 고려국(高麗國)을 세우는 시도에 일조하던 아이키도우에시바 모리헤이 도주, 그와 함께 만주국에서 활동한 제자 도미키 겐지 등도 그러했다. 요시다 코타로는 열렬한 흑룡회 활동가였으며, 요신칸의 시오다 고조 관장은 논픽션에서 흑룡회 회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