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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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여담
3. 제자
4. 논란
5. 동영상 자료


1. 개요


덕암 최용술(德庵 崔龍述, 1899.7.21 - 1986.10.27)
일본명 :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1]
한국 합기도 1대 도주. 대부분의 한국 합기관련 무술은 이 분으로부터 나왔다.
어린 시절 일본인 부부에게 유괴되었다가 버려진 뒤 일본에서 방랑했다고 한다. 자신을 거둬 준, 무술을 좋아하는 주지스님[2]의 소개로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 1859–1943)의 양자가 되어 평생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했다고 주장했지만 한동안 증명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최용술의 행적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굴되는 중이다.[3][4][5]
일본 패전 후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고향으로 가던 중 짐[6]을 도난당해, 할 수 없이 대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풀빵을 만들어 팔며,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딸을 제압하면 공짜로 주겠다.'며 호객했다고도 한다.[7]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힘 깨나 쓰던 장정들과[8] 시비가 붙었는데,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을 양조장 집 서복섭이 목격했다.[9] 유도 유단자였던 그는 최용술의 진가를 바로 알아보고,[10] 최용술 도주는 양조장의 2층에서 무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합기도가 되었다.
최용술은 자신의 무술을 야와라(柔)라고 말했는데, 가르칠 때는 야와라, 혹은 합기유권술이라 칭했다.[11] 참고로 야와라(柔)는 유술이라는 뜻이다.
딴 건 몰라도 대동류의 실력만큼은 확실한 사람. 심지어 본토인 일본 대동류 쪽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문제는 실력과 반비례하는 인성으로 무술인답지 않게 돈을 좀 심하게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최용술은 초기 제자들에게조차 차별하여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수련비에 따라 기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어찌보면 무술로 장사를 했다고 할 수 있다.[12] 게다가 그냥 유술과 합기가 들어간 유술의 차이를 두었는데, 유술만 가르칠 제자에게는 합기 올리기를 위한 단전호흡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이다. 제자들마다 서로 누가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러면서도 "이 술기는 쌀 몇 가마짜리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여, 제자들이 수전노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한국 합기도의 원로 중 한 명인 지한재는 최용술한테 맺힌 것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3]
이 때문에 지한재처럼 돈을 많이 내지 못한 제자들은 최용술에게 배운 것을 대충 더듬어서 실전된 무술을 새로 복원하는 수준으로 해체시키고 붙이고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일본 본토 대동류와는 완전히 다른 무술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근본없는 무술이라 까이는 한국 합기도. 다만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동류 특유의 유사과학스러운 특징은 어느 정도 희석되고[14] 합리적인 호신술로 바뀌면서 완전히 한국적인 무술로 정착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2. 여담


  • 제자들에게 낙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15]
  • 발차기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16][17]
  • 술기의 체계나 교육과정 없이 가르쳤다. [18]
  • 기술을 가르치는 데 차별을 두었다. [19]
  • 특히 호흡을 강조했는데, 모든 술기는 히이-후우의 단합에 끝남과 그에 맞는 호흡을 강조하였다. [20]
  • 일본에서 수년간 입산수련할 당시 스승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고 한다. “부엉이같이 생긴 다케다 선생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 때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다.” 하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 한글을 거의 모르던 문맹이었는데, 언론과의 인터뷰 때 다케다 소가쿠의 성씨를 다케다 (竹田)라 적었다고 한다. [21]
  • 용술관에서는 최용술 도주의 무술을 원형대로 수련한다. [22] 현재 한국에 정착된 합기도와 구별하기 위해 '덕암류 합기유술'이라고도 부른다.

3. 제자


  • 김윤상 - 합기도 3대 도주, 현 용술관 총재
  • 김정윤 - 한풀 창시자
  • 서복섭 - 최용술 도주의 첫 번째 제자. [23]
  • 임현수 - 정기관 관장
  • 지한재 -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에서 합기도 고수로 출연, 신무 합기도 총재 [24]

4. 논란


영명록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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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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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술이 일본의 대동류 합기유술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최용술 도주 측의 주장. 해당 문서를 참조.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본의 아이키도측과 대동류측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주장한다.
1. 다케다 소가쿠는 모든 수업생의 이름을 영명록에 기록해 두었는데 영명록[27] 속에 대동류를 배운 다른 한국 사람들의 이름도 있지만 최용술이란 이름은 기록에 없다고 주장했다. [28]
2. 우헤시바 모리헤이는 혼자가 아니라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선생 및 요시다(吉田)가의 부자(父子) 등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수련했고 관련 증언들도 존재한다.
미국의 저명한 무술가 리처드 킴[29][30]이 1984년 미국 하와이의 합기도인 글렌(Glenn)의 질의가 담긴 편지[31] 에서, 최용술이 일본의 극우파 조직 흑룡회의 멤버이자,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 로부터 교수대리(敎授代理)[32]를 받은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33]의 뛰어난 '''조선인 제자'''였으며,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 자신이 배운 무술에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증언한다.[34] 최용술 도주의 일본 이름이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였다고 증명한다. 이 때문에 일본을 비롯한 많은 위키백과에서는 최용술을 요시다 코타로 쪽의 제자로 분류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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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리처드 킴, 그리고 오른쪽이 요시다 코타로이다.
흑룡회란 제국주의 일본의 국가주의 우익조직으로, 일본 제국이 헤이롱장(흑룡강黑龙江) 일대를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흑룡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앞장섰고,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무술계는 최용술 도주가 반일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된 고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다음은 리처드 킴의 답신 전문.
dated November 26, 1984:
The founder of Hapkido, Mr. Choi -- Japanese name Yoshida, is not related to Yoshida Kotaro, Samurai extraordinary. 
Mr. Choi was a student of Yoshida Kotaro. In fact he was an excellent student. You must realise that before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all Koreans had Japanese citizenship and names. 
Mr. Choi returned to Korea and taught Daito Ryu Aiki Jujutsu. He named it Hapkido which in Japanese is Aikido. Since his time Hapkido has become modified with a distinct Korean flavour. It is an excellent art. 
I would that the thrust and direction of Hapkido where it is different from what originally Mr. Choi had taught is in a number of sophisticated kicks which is unique to the Korean style of fighting. Probably, according to some, it may have improved the art for modern day consumption. That would be a matter of debate. 
You are learning a good art. Stay with it and practice until perfection. 
Sincerely, 
Richard Kim, Hanshi [36]
합기도의 창시자, 최용술 -- 일본명 요시다, 은 비범한 사무라이인 요시다 코타로의 혈연은 아닙니다. [37] 최용술은 그의 제자였습니다. 실제 그는 우수한 학생이였지요. 일본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기 전에,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의 시민권과 일본식 이름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최용술은 귀국 후 대동류 합기유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본어로는 아이키도라 불리는 합기도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합기도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독특하게 수정됩니다. 합기도는 우수한 무술입니다. 첨언하자면, 합기도에 한국의 무술 스타일인 수준 높은 발차기가 도입되면서 원래 최용술이 가르치고 추구하던 것과 달라진 듯합니다. 아마, 일부의 주장대로 합기도는 현대인의 기호(선호)에 따른 무술로서 개량된 듯합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요.
당신은 좋은 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완벽해질 때까지 수련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리처드 킴 범사
1988년 Aikido journal 77호의 아이키도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2대 도주와의 인터뷰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이키도의 1대 도주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개조가 '''최용술 도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8][39]
Q : On another subject, it is true that '''a Korean named "Choi"''' who founded "Hapkido" studied Aikido or Daito-ryu?
A: I don't know what art it was but I understand that there was a young Korean of about 17 or 18 who participated in a seminar of Sokaku Takeda Sensei held in Asahikawa City in Hokkaido. It seems that he studied the art together with my father and would refer to him as his "senior".
Q : If that's the case the art must have been Daito-ryu.
A : I've heard that this man who studied Daito-ryu had some contact with my father after that.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gan teaching Daito-ryu on a modest scale. The art gradually became popular and many Koreans trained with him. Since Aikido became popular in Japan he called his art '''Hapkido'''[written in Korean with the same characters as Aikido], Then the art split into many schools before anyone realized it. This is what my father told me. I once received a letter from this teacher after my father's death.
질 : 다른 질문입니다만, 합기도를 창시한 '''한국의 최란 인물'''은 아이키도 혹은 대동류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답 : 어떤 무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다케다 소가쿠 선생의 강습회에 17,8세의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선배"라 부르며, 같이 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질 :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대동류겠군요.
답 : 그 후에도 그 대동류 수련생과 아버지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작은 규모로나마 대동류를 계속 지도하였으며, 인기몰이를 하며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아이키도가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자, 그는 이름을 [ [[아이키도]]를 한글로 쓴] '''합기도(合氣道)'''라고 지었는데, 이 후 많은 유파로 분열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온 적도 있습니다. 

5. 동영상 자료



최용술 도주의 지도. [40]

최용술 도주의 인터뷰.
'합기술의 기틀을 잡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 도장마다 기술이 다 다르고 제자들은 몇 달만 배우고 모두 독립해서 도장 차린다.'

용술관 김윤상 총재의 시연. [41]

[1] 그런데, 아사오가 아니라 타츠주츠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2] 야마모토 히데오(山本英雄)의 아버지인 주지스님으로 추정된다.[3] 2000년대 초만 해도 무술계에서는 용술관 무술에 '''칼넣기'''와 '''발차기''' 등 기술이 있고, 그 형태가 일본 소림사 권법(쇼린지 켄포)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최용술 도주의 무술이 실제로는 대동류가 아니라 종도신(나카노 미치오)의 '''소림사 권법이 아니냐?'''라는 의심이 있었다. [4] 칼넣기가 대동류에 없다는 서술이 계속되는데, 이것들을 한번 보자. [5] 최용술 도주의 딸 최복선 여사는 일관되게 다케다 소가쿠에 관해 언급한다. 특히 재미있는 증언은, 합기도 출신자들이 왜곡하기 때문에 외부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다가 1998년에 한 인터뷰에서 최복선은 이렇게 증언했다. 1943년 홋카이도에서 다케다 소가쿠가 최용술을 만난 후 떠났는데, 두 달 후에 소가쿠가 죽었다는 부고장이 집에 도착해서 최 여사가 문맹인 아버지 최용술에게 직접 알렸다 한다. 그때 내용은 다케다 소가쿠가 '''객사'''했다는 것이었다고 기억한다고.[6] 돈, 목록과 오의 등의 두루마리, 두 자루 등 병장기가 있었다 한다.[7] 오히려 남자 아이들이 역으로 그의 딸에게 혼쭐 났다고...[8] 양조장에 쌀포대를 들고 나르던 장정들이었다.[9] 당시 회고에 한눈에 저것이 유술인 것은 알았는데, 형(型)이 특이해서 놀랐다고 한다.[10] 이 당시 일화로, 서복섭은 그의 유도기술을 이용하여 최 도주를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했다. 후일 그는 용술관의 유래를 듣고, '''"최옹의 기술이 아직도 전수되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11] 가끔 대동류라고도 했다고 한다. 유권술의 명칭은 서복섭이 제안한 것으로, 유술기에 권술까지 아우르는 무술임을 천명하자는 의미였다 한다.[12] 근데 이건 다케다 소가쿠도 그랬다. 소가쿠는 일본 전역을 돌며 대동류를 교습했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걸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복한 집안이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동류를 배우는 데 집안 재산이 거덜 날 정도였다.[13] 마찬가지로 제자들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스승이었던 최홍희송덕기의 경우와는 꽤 다른데, 최홍희는 자기 무술철학이 지나치게 확고해서 제자뿐만 아니라 타 태권도 원로와도 마찰을 빚었던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이고, 송덕기의 경우는 생전 제자를 거의 받지 않았을뿐더러 그나마 받아들인 제자들도 대부분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둘 만큼 가르침의 기준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용술 도주는 최홍희 총재나 송덕기 옹과는 달리 자신의 철학 때문이 아닌 순전히 돈 때문에 그랬던 것이 보이기 때문에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것.[14]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15] 다케다 토키무네 종가의 증언에도 나오지만, 원래 대동류에서는 현대의 합기도나 초기의 아이키도와는 달리 낙법이 없었다. 검을 맞대고 대결하는 무사의 세계에서 낙법으로 넘어졌다가 일어선 뒤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법이 없다 보니 수련생들이 다치는 경우가 속출하여, 당시 유도를 배웠던 서복섭 옹이 유도 방식의 낙법을 도입했다고 증언한다. 이 때문에 최용술 도주에게서 시작된 한국의 합기 계열 무술들의 낙법은 아이키도의 회전을 통해 상대와의 거리를 만드는 수신(受身)이 아닌, 유도식 낙법(落法) 형태를 띠게 된다.[16] 제자들의 발차기에는, 어디서 발을 놀리냐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원래 최용술 도주는 단조로운 발차기만 가르쳤다. [17] 대동류는 윗수로 갈수록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4분 36초부터 보면, 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나온다.[18] 용술관김윤상 총재도 대구에 내려가서 몇 가지 술기를 한꺼번에 배운 후, 금산에 돌아 와 수련하고 익힌 다음, 대구에서 최용술의 재가를 받고 다시 진도를 나가는 식으로 수련을 받았다. 원래 최용술 도주는 가장 기본적인 술기들을 가르쳐 주면 이후에는 술기의 형태를 자주 바꾸어 보여주었고, 어디가, 혹은 무엇이 합기임을 식을 쉽게 알려주지 않고 시간을 들여 깨닫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다른 합기도 유파의 술기가 형태나 과정에 많은 변화가 가해졌다. 한풀이나 용술관 또한 술기 과정을 재정리하였다.[19] 합기 올리기를 위한 호흡과 양손 단련조차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오죽하면 초기 제자들 중에서도 왜 양손 올리기 형태의 단전호흡을 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술기 하나에 "쌀 몇 가마짜리다."라고 자주 언급할 정도였기 때문에 제자들 불만이 커서 수전노라고 비난했다고... 실제로 도장 안에 기다란 커튼을 설치하고 큰 돈을 지불한 특별 제자에게만 특별한 술기를 가르쳤음은 초기 제자들 사이에서도 공통된 증언이다.[20] 그 때문인지 담배를 피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최용술 본인은 후계자이자 아들인 2대 도주 최복열이 사망한 후, 담배를 자주 피웠다고 한다.[21] 흥미로운 점은, 19세기 말에 다케다 소가쿠는 자신의 성을 유명 다이묘였던 다케다(武田)로 바꿨다는 의혹이 존재한다.[22] 체계와 교육과정이 없었던 만큼, 술기를 배우는 순서는 다르다. 특히 유급자 과정에서는 합기를 위한 몸을 만드는 과정에 주안을 둔다고 한다.[23] 최용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후일 정치에 입문한 아버지의 경호 담당으로 최용술 도주를 소개하며, 합기도가 정치인들이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사이클 선수 서준용친할아버지기도 하다.[24] 최용술 도주에게서 총 1년 조금 넘게 배우고 자기 도장을 차렸다. 기도회 당시 월장낙법 등, 현란하고 아크로바틱한 낙법과 발차기를 도입하고서는 신무 합기도 때는 다시 최 도주의 술기로 돌아간다. 최용술 도주에게는 야와라를 배웠지, 합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거기다 스승에게 맺힌 것이 많은 듯. 고수를 찾아서에 잘 나와있다.[25] 2018년 10월 15일 무예신문에 올라온 기사로, 수미노 사토시(住野聡)세계평화무도연합 사무총장이 대동류 합기유술 도쿄본부에서 직접 확인하여 찍은 사진이다. [26] 이 영명록의 발견이후, 최용술 도주가 요시다 코타로의 제자로서만 대동류를 배운 것으로 한정하려는 주장이 늘어났다.[27] 스탠리 프래닌이 다케다 소가쿠의 장남 무네미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영명록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28] 2018년 10월, 2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다케다 소가쿠에게 직접 배운 기록이 발견되었다.[29] 하와이에서 활동한 무술가로 일본의 일부 사람들은 리처드 킴이 오키나와 사람이라며, 그의 성을 金武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정말로 金武였으면, 자신을 소개한 영문 이름에 '''Kim'''이라는 발음을 사용했겠는가? 참고로 金이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일본은 こん(kon)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Jin이라고 발음한다. Kim을 사용하는 지역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30] 리처드 김(1917~2001)은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 전에 미해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요시다 코타로 밑에서 대동류를 수련했다. 어릴 때부터 유도가라데를 수련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오키나와 무기술을 수련했다. 청장년기와 노년기는 주로 북미와 유럽에서 활동하였다.[31] 최용술 옹이 정말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운 것이 맞는지 묻는 질문이라고 한다.[32] 스승을 대신해 가르칠 수 있는 자격[33] 동시에 요시다 코타로는 홋카이도에서 다케다 소가쿠에게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소개해 주었다. [34] 요시다 코타로가 유술을 가르친 사람으로는 위에서 언급된 리처드 킴, 전 대동류합기유술 종가대리/면허개전 곤도 카츠유키 (近藤勝之), 극진공수도의 최영의, 그리고 소림사 권법의 종도신 등이라 한다.[35] 현재 일본 위키백과사전에서는 항목 자체를 아예 삭제하였다.[36] Hanshi (範士)는 무술에서 8단 이상의 유단자의 호칭을 뜻한다. [37] related는 혈연, 관련되었다는 수동태인데,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 최용술이 요시다 아사오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당연하지만, 후술할 '해방 전까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름이 있었다.'는 문장 때문에라도, 최 옹의 일본 이름인 요시다 아사오 (吉田朝男)와 요시다 코타로 (吉田幸太郎)는 ''''혈연(친족)관계가 아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38] 1997년 10월, 한풀의 신상득 기자 또한 인터뷰를 통해 같은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신상득 기자에게 기쇼마루는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다케다의 제자'''로서 열심히 수련하는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추정된다는 내용도 덧붙인다. 이 주장들이 사실이라면, 다케다 소가쿠에게도 직접 교습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39] 성무관의 이태준 장로도 명재남 재남무술원 총재와 함께 우에시바 기쇼마루 도주의 면담 자리에서 최용술에 대해서 문의했다.[40] 중간에 대동류의 칠리 끌기(七里引技)도 나온다. 당연히 아이키도에도 있다.[41] 1분 45초에 4명을 제압한 후 김 총재의 행동을 잘 보자. 아직 양손이 살아있고, 더 상대할 수 있다는 대동류의 굳히기(固め) 자세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