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1897)
3.1 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전단 천여 매를 인쇄한 후 동지 유준석(柳俊錫)[1] 과 함께 각자 전단 백매씩을 휴대하고 4월 1일 공주시장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부여농민학원(扶餘農民學院)을 창설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농민청년회(農民靑年會)·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30년 3월에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와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1931년 봄에 이호철(李戶喆)·유기섭·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해 중단했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조직하고 이의 확대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노명우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노명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노명우는 1897년 8월 5일 충청남도 부여군 관암면 합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읍에 소재한 영명학교에 재학 중 이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부여농민학원(扶餘農民學院)을 창설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농민청년회(農民靑年會)·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30년 3월에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와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1931년 봄에 이호철(李戶喆)·유기섭·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해 중단했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조직하고 이의 확대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노명우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노명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