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시아노
3세기 초중반 인물. 신학적으로는 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히폴리토가 정말로 교황을 자처했는지 의심의 여지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대립교황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다.
당시 로마市 교회에서 뛰어난 학자이자 이름난 신부로, 교황으로 당선될 수도 있었던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251년에 코르넬리오 교황이 당선되자 매우 실망하여 지지자들을 모아 주교로 서품받아 교황을 자처하였다. 코르넬리오 교황을 지지하던 주교들이 노바시아노에게 코르넬리오와 화해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은 교리적으로는 당시 가톨릭 교회와 차이가 없었으나,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다. 사실 당시 가톨릭 교회도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바시아노는 그 정도를 뛰어넘는 도덕성을 요구하였다. 그 엄격함에 반하여 노바시아노를 따르는 교회조직이 세력을 넓혔으나, 결국 맥이 끊기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258년에 순교했거나, 혹은 박해를 받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