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1. 개요
2. 종교적 관점
2.2. 이슬람
2.3. 불교
3. 세속적 관점


1. 개요


'''언어별 명칭'''
'''중국어''', '''일본어'''
殉敎[1]
'''터키어'''
Şehit
'''네덜란드어''', '''아프리칸스어'''
martelaar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루마니아어''', '''필리핀어''', '''알바니아어'''[2]
martir
'''영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프랑스어''', '''스웨덴어''', '''라틴어'''
martyr
'''이탈리아어'''
martire
'''독일어'''
Märtyrer
'''스페인어'''
Mártir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mученик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슬로바키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Mučenik
'''히브리어'''
מרטיר
'''아랍어'''
شهيد

폭군이 죽으면 그의 지배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그의 지배가 시작된다.

- 쇠렌 키르케고르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

-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것.'''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살당하거나 처벌, 옥고 등 여러 수난을 치른 경우, 그 원인이 되는 외부의 탄압을 '박해'라고 칭한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의 표기가 대표적.
원론적으로는 1) '''자신의 의지로 행해져야 하며''', 2) '''그 의지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발휘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즉, 신앙을 포기하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것.
현대에는 여기서 더 확장되어 특정 '주의'나 '사상'을 위해 죽는 경우에도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다.

2. 종교적 관점



2.1. 기독교


기독교는 자살자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며, 심지어 종교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경우에도[3]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배교를 강요당하면 거부하고 탄압하는 측이 가하는 형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순교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는 쪽은 기독교 계열 종교인데, 아무래도 초창기 교회 선교의 역사가 워낙 신자들에 대한 탄압과 유혈이 낭자했기 때문일 듯 싶다. 기독교 초기 로마 제국에서는 체포된 그리스도인이 로마 신전에 경배, 즉 배교하지 않으면 맨손이나 단검 한 자루를 쥐여주고 맹수들과 싸우게 하거나[4] 십자가에 못박고, 참수하는 것에서부터 오지에 가서 선교하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등 매우 역사가 길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게릴라처럼 지하교회나 가정교회 등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는 등 생존의 투쟁에 가까웠기 때문에 A.D.200년대부터 박해에 의한 개종이나 배교는 나중에 회개한다면 어느정도 참작해주기도 했는데,[5] 기독교 공인 이후에 박해 시대에 배교했던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가지고 4세기~5세기에 도나투스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슬람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에 배교하여 살 수 있음에도 순교를 택하는 것은 성인 시성에서 기적심사의 요건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여서 동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전래시기 대규모 기독교 순교자들은 상당히 높게 쳐주는 편이다.
한국 가톨릭은 초기 전파 때 엄청나게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절두산'''을 비롯해 성지도 많고, 순교 성인들도 많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과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가 있다. 가톨릭이 자살을 엄금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순교가 어떻게 이뤄졌는가로 충분히 답이 나오는데, 모두 배교를 거부하여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행해졌고 부산광역시에 있는 한국순교자박물관도 1868년에 부산에서 순교자가 발생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 막부 시대에 가혹한 가톨릭 탄압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현지인 중에서도 가톨릭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대거 처형당하고 시복, 시성된 사람들이 많다.[6]
다만 종교적 의미의 순교자가 맞지만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사영 같은 경우다. 천주교계로 보면 분명한 순교자이지만, 그 목적이 모국에 대한 배신, 침략 사주[7]에 해당되어 줄곧 순교성인에서 제외되고 있다.
그밖에도 외부에게 호불호가 갈려도 순교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토머스 목사 같은 이의 경우이다. 토머스 목사는 1866년 대동강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발포하여 주민들을 살상한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탄 통역담당 목사였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조선 측은 관대하게도 고기까지 주면서 정중히 나갈 것을 요구했지만, 보답이라곤 포격과 같이 조선군관 납치 및 금품 요구[8]. 그렇기에 목숨을 잃은 평양 주민들의 증오와 반발로 제너럴 셔먼 호는 화공으로 불태워졌고, 겨우 탈출하여 뭍으로 올라온 몇 명은 그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토머스 목사도 올라와서 이렇게 맞아죽었는데[9], 훗날 개신교계에서는 단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개신교 목사 1호라는 명목으로 교회도 세우고 있고 토머스 목사 교회까지 세웠다[10].
물론 토마스 개인의 경우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엄밀히 그는 선교사의 신분이지 장교 신분은 아니다. 그가 직접 조선인 약탈을 지시했을 리도 없고, 도리어 만행에 항의하려 했다 해도 높은 지위에 있는것도 아닌 이상 셔먼호 서원들이 그의 말을 들을리도 없으니... 그러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는 단순통역이 아닌 교섭창구의 역할을 했고, 박규수가 쓴 환재집에는 토마스가 조선관헌의 말을 끊고 무시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토마스와 셔먼호 선원들이 죽은 이유는 해적질이 컸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평양 주민들에게 죽은 것은 맞지만 성경을 뿌리다가 죽었다는 설, 그리고 배에 불이 붙어진 후에 탈출을 못한 토마스 목사가 배 위에서 성경을 뿌리며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성경을 뿌렸다는 설은 대부분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개신교에선 순교자가 되었다.http://kcm.co.kr/korchur/100/ch100-01.html#002-2 하지만 당대의 실록, 평양지, 환재록 등의 기록에는 성경을 뿌렸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1928년 오문환의 주장에서나 나오는데 당시 정황상 토마스가 죽기 전에 성경을 뿌렸다는 구전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한글위키에도 토마스 목사의 순교자 논란에 대한 부분이 있다.이와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음임에도 개신교계에서 일단 순교자로 인정하고는 있다.
일제강점기 순교자로는 주기철 목사[11]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한국전쟁 시기에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손양원 목사, 전덕기 목사, 김응락 장로 등이 그러한 분들이다.
가톨릭 신자는 순교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리상 틀린 건 아니다. 순교는 '''혈세'''라고 해서 피로 받는 세례로 친다. 그렇기에 보통이라면 연옥에 가야 할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신약에도 예수와 그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은 유익하다고까지 나와 있다.[12] [13]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인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에 따르면, 즉 순교자를 죽이는 박해자도 교리상으론 사랑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뜻은 그 박해자가 저지르는 '''악행'''까지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개개인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 사람의 올바른 회개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14] 최초의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부제도 죽으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했다고 사도행전에 나온다.
간혹 가다 예수의 죽음을 순교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적절한 단어 선택은 아니다. 기독교에선 예수의 죽음의 목적은 순교의 정의와는 맞지 않으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가톨릭에서 순교는 기적으로 취급된다. 그렇기에 교황청에서 시복 시성 조사할 때도, 순교자에 대해서는 기적심사를 아예 하지 않는데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 자체를 인간의 의지로는 하기 어려운 일로 보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슬람 문화권 일부 등 기독교에 매우 적대적인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들이 많아 현재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고 있다. 심지어 여학생이 미국 총기 난사 테러 현장에서 기독교 믿는다고 했다가 숨진 일도 있다. 특히 기독교 탄압으로는 최악으로 악명이 높은 북한의 경우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는데 그야말로 그냥 주체사상을 택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고 기독교를 지키다가 숨지거나 고문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2. 이슬람


이슬람교에서는 초창기 무함마드예언자의 시대에서부터 메카군에 대항해 분투했던 역사로 순교를 매우 영예로운 행위로 여긴다. 가령 메디나에서 계시된 구절인 제3장 이므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69.'''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치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에서 살아있노라.

'''170.'''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못 하고 뒤에 올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노라. - 수라트 알 이므란 3:169-170

이외에도 메디나 시기에 계시된 구절 가운데 무려 109절이나 '순교'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특히 '칼의 구절'이라고 부르는데, 본디 당대에 박해받는 무슬림들이 성전(지하드)에 임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는 가운데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구절이지만, 오늘날 알카에다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요상하게 곡해해서 그들의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무함마드 시대의 성전 이외에도 또한 이슬람에서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이교도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에 대해서도 순교자라고 대우하며, 가까운 시기로 터키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군프랑스군 등에 항전하다 죽음을 맞은 터키 병사들 또한 순교자(터키어로는 Şehit)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및 현재진행형인 반PKK 진압작전 및 PKK에 의한 테러로 사망한 이들도 순교자라고 지칭한다. 따지고보면 터키어에서 순교란 "나라를 위해 죽은 이"의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무슬림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벌인 전쟁은 방어 전쟁이 아니였다. 오히려, 무함마드와 대적하던 메카가 다양한 다신교와 일신교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였고 특히, 메카의 주수입원 중 하나는 다른 지방에서 오는 종교 활동을 위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가기전 메카에서 살 적에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포교하였다. 물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이 사람들은 훗날 무함마드에게 살해당한다.), 포교의 효과는 별로 없없지만... 그 후 메카를 오가는 상단을 약탈하고 도시를 봉쇄하고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도 무함마드였다. 그 후에도 그는 종교적 명분아래 아라비아 반도 곳곳의 크고 작은 부족들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고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지금 IS가 내새우는 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명분도 이러한 무함마드의 행적을 따르는 방법으로 코란을 해석하고 이를 도덕적 기준으로삼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쟁을 통한 약탈의 허용(쿠란 8장의 명칭은 안 안팔, 즉 전리품의 장이다.) 전쟁포로를 성노예로 삼기, 대량학살, 이교도를 대하는 방식, 형 집행 방법으로서 참수 이 모든 것이 무함마드가 이미 했던 일이라는 것을 보면, 이슬람 국가의 주장의 근거는 명확해진다.

무아트 알 카사스베 요르단 조종사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 의해 화형을 당했을 때 요르단 당국은 그를 순교자로 표현했다. 다만 이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IS를 규탄하기 위해 당국에 의해 순교자로 칭송된 것.

2.3. 불교


불교쪽에서도 순교자들은 제법 있었다.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타 교단 사람들에게 린치당해 사망한 목갈라나도 이에 해당된다 볼 수 있고, 중국의 경우에는 달마의 뒤를 이어 중국 선종의 2대조가 된 '혜가' 또한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신라시대 당시 신라에 불교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이 유명하다. 목이 베어지자 하얀 피가 나오고 연꽃이 내렸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일화.

3. 세속적 관점


순교는 능력 없이 유명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조지 버나드 쇼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난 절대로 내 믿음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 버트런드 러셀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자폭테러, 한국 내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일부 신도들(특히 극우 개신교도)의 맹목적인 행태로 인해 무교인들 일부에서는 점점 개죽음 내지는 광신적 행위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늘고 있다. 어떤 의미냐면, 무교인 입장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므로 광신으로 여겨지기 쉬운 것. 물론 개인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그리고 그 죽음을 숭고한 죽음으로 여기는 일은 무교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벌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신념이 과연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다. 문제는 무교인들 입장에선 당연히 종교적 신념에 큰 가치를 두기 힘들다는 것이다. 안 그랬으면 이미 무교인이 아니기가 쉬울 테니 말이다. 다만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이다.
[1] 예전엔 순교라는 말대신 치명(致命)이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순교자도 '치명자(致命者)'. 천주교 전주교구에는 치명자산 성지도 있다(전주시 소재).[2] 'dëshmor'이라고도 한다.[3] 대부분의 신자들이 종교를 지키는 과정에서 자살을 택하지 않고 탄압하는 측이 가하는 사형을 받았음을 고려한다면 자살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4] 네로 치하 콜로세움에서 박해했다고 전해지나 이것은 전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콜로세움 자체가 네로 사후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베스티아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아마 그전에도 검투사 경기는 있었으니 콜로세움이 아니라 다른 극장에서 처형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5] 심지어 초대 교황예수를 모른다고 3번 부정하고 도망친 전력이 있으니.[6] 대표적으로 성인으로 추대된 바오로 미키 신부 등 일본 26위 성인.[7] 조선에 프랑스군을 보내 박살내서 천주교 신앙을 인정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다가 적발되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명백한 배반 행위이거니와, 당시에 이 편지를 근거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해져서 황사영 자신도 산채로 거열당했고, 3대 남정네들은 모조리 효수당할 정도로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박노자는 "이것을 현대로 치환하자면 UN에 도와달라고 한 것과 똑같다"면서 황사영을 두둔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는 서구 강대국이 종교 탄압을 이유로 비서구권 세계에 침략을 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8] 쌀 1,000석과 금, 은, 인삼이었다.[9] 한국의 개신교계에선 그가 거창하게 조선군의 손에 효수되었다면서 순교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조선군은 이들을 포로로 잡으려고 되려 막으려다가 분노한 평양 주민들에게 겁먹고 물러났던 것이다. 더불어 현장을 지휘던 인물도 개혁파인 박규수였다.[10] 하지만 국내 개신교계는 장로회 신자였던 토머스 목사의 직속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장로회 측은 제너럴 셔먼호가 파괴당한 것을 물론 제너럴 셔먼호가 먼저 약탈을 자행했다는 정보는 무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러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선교사를 보수적인 조상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죽여버렸다."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1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순교한 목사.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이다.[12] 필립보서 1: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공동번역성서)[13] 마태복음 11: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개역한글)[14] C.S.루이스도 그의 저서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계명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약성경의 <유다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1장 23절)라고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