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서진)

 


盧志
(? ~ 312? 또는 315?)
서진, 전조의 인물. 자는 자도(子道). 노흠의 동생 노정(盧珽)[1]의 아들, 노육의 손자. 하나 더하자면 노육의 아버지는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인 노식이니 노식의 증손자가 된다. 진서에는 백부 노흠의 열전에 뒤따라 아버지 노정이 붙어 있고 그 다음 노지의 전이 붙어있다. 노지의 전 다음엔 노지의 아들 노심(盧諶)[2]의 전이 붙어 있다.
1. 사마륜 토벌
2. 사마영 실각
3. 사마영에게 돌아가다
5. 최후


1. 사마륜 토벌


공부연으로 벼슬을 시작하고 상서랑, 업의 현령을 지냈고 사마영이 노지를 만나 그 재주를 높이 사서 모주로 삼았으며, 301년 1월에 사마륜이 찬탈하자 사마경이 사마륜 토벌의 격문을 보내자 사마영이 불러 모의하도록 하자 노지는 사마영에게 협조해야 한다고 진언하자 사마영이 그 의견을 따르기로 하면서 노지를 자의참군, 좌장사로 임명하고 공문서를 관할하게 했다.
사마륜의 부하인 사의, 허초, 손회가 황교에서 사마경의 부하인 조양을 격파하고 8천여 명을 죽이면서 패배했으며, 이에 많은 사람들은 퇴각해서 조가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노지는 적이 승리를 거둬 얕보고 가볍게 여길 것이라면서 전쟁은 승리도 패배도 있으니, 정예병을 뽑아 이른 아침에 빠르게 진격하면 적군의 허를 찌를 수 있다고 했다.
3월에 조양, 왕언 등이 사의 등을 격파하고 4월에 왕흥이 일으킨 정변으로 사마륜을 몰아내면서 사마경이 정권을 잡았는데, 노지는 천하의 두 영웅은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태비의 병을 핑계로 봉국으로 돌아가 조정의 중임을 사마경에게 물려주고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진언했고 사마영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 노지는 사마영에게 군량을 풀어 양적의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고 황교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그 집안을 드러내게 표창하면서 전사자들을 묻어주도록 진언했으며, 사마영은 천하에 인망을 얻으면서 노지의 공적을 찬양해 공후에 봉하라고 상표하자 조정에서 노지를 무강후로 봉하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2. 사마영 실각


사마경이 사마예의 공격으로 망하면서 사마영이 권력을 독점을 획책해 사마예가 조정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했으며, 303년에 사마옹의 부하인 이함이 사마예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하자 사마옹이 사마예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옹이 사마영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노지는 지난번에는 큰 공을 세우고도 권력을 버려 명성을 얻었지만 패권 다툼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라면서 따르지 말 것을 간했지만 사마영은 듣지 않았다.
304년 1월에 사마예가 죽자 사마영이 표를 올려 노지는 중서감이 되었고 업에 머물러 관청과 상부의 일을 담당했으며, 노지는 상표해 만분을 사례교위에 임명해 낙양을 정비하도록 진언해서 허락받았다. 7월에 사마월이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혜제를 등에 업자 사마영의 부하인 석초가 탕음에서 혜제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사마영의 명령으로 노지는 도독이 되어 혜제를 맞이했다.
8월에는 왕준이 사마월을 도와 업을 공격하자 노지는 사마영에게 천자를 받들어 낙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으며, 갑옷을 입은 병사가 1만 5천 명이 있어서 노지는 밤 중에 여러 부서로 나누고 새벽이 되면 출발하려고 했다가 정태비가 업성을 그리워해 떠나지 않으려 하자 사마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무리들이 무너지면서 노지와 그의 아들 노밀, 형의 아들인 노침, 궐 안의 호분 1천 명만 남았으며, 노지는 사마영에게 다시 빨리 떠날 것을 권했지만 사마영이 결정하지 못했다. 황씨 성을 가진 도사가 있어서 그를 성인이라 했고 정태비는 이 도사를 믿었는데, 노지는 도사를 불러 그가 원하는 대로 2잔의 술을 대접하고 업에서 물러날 수 있게 하자 정태비도 업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미 인마가 흩어졌으므로 노지는 진영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대의 수레를 얻었으며, 사마독 한현이 병사를 황문에 모아 백여 명을 얻었다. 노지는 혜제를 찾아갔고 혜제가 어째서 흩어져 패했는데 자신에게 오냐고 묻자 노지는 적들이 업성에서 80리까지 다가와 사람들이 놀라 달아났다면서 태제(사마영)는 폐하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혜제는 좋다고 했다.
노지는 혜제가 탄 수레와 함께 출발했고 낙양에서는 둔기교위 학창이 병사 8천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며, 혜제를 이를 불러 급군에서 학창과 합류해 군세가 흥성했다. 노지는 기뻐하면서 혜제에게 건의해 천하에 사면을 내리고 백성을 쉬게 할 것을 당부했으며, 낙양에 도착하자 도망친 사람들도 돌아오고 백관들이 대부분 정해지고 혜제는 노지에게 각종 물품을 하사했다.
사마옹 휘하의 장방이 낙양에 머물렀지만 옛날 동탁의 천도를 본따 낙양의 종묘와 궁실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려 했는데, 노지는 과거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자 원망하는 소리는 백 년이 지나도 남았다면서 만류하자 장방은 불태우는 것은 중지했다. 장방이 억지로 혜제를 수레에 태워 장안으로 데려가려 하자 노지는 홀로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오늘의 일을 보면 마땅히 한 번 장방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으며, 신하들은 우둔하고 겁쟁이라 많은 것을 보좌할 수 없고 오로지 작은 성의만 보여도 좌우 사람들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장방의 진영에 3일 동안 머무르다가 서쪽의 장안으로 갔으며, 사마영이 실각하면서 노지도 면직되었다.

3. 사마영에게 돌아가다


사마월이 혜제를 맞이했고 305년 7월에 사마영의 옛 장수들이 사마영의 복권을 위해 조, 위의 땅에서 거병하자 사마옹이 사마영을 진군대장군, 도독하북제군사에 임명하고 업으로 돌려보내면서 노지도 위군태수, 좌장군에 임명되어 사마영을 수행하고 북방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월에 사마영이 낙양에 들어갔지만 사마월의 세력을 두려워해 동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는데, 306년 1월에 사마영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가면서 홍농군 화음현으로 갔다. 이 때 사마옹이 장방을 죽이고 사마월과 화친을 도모한 것을 알고는 서쪽으로 가는 것을 중지했으며, 노지는 장안에서 조당으로 나가 이번 일을 사과하고 무관에 있는 사마영 휘하로 돌아갔다.
8월에 사마영이 무관에서 의양군 신야현으로 도망갔다가 유도의 공격을 받고 하북으로 갔으며, 9월에 사마영이 풍숭에게 붙잡혀 업으로 사마효에게 압송되었다. 10월에 사마효가 죽자 그의 장사인 유여가 업의 사람들이 사마영의 처지를 동정하던 것을 보고는 이변이 일어날까 두려워해 사마영을 살해했으며, 사마영의 부하들은 모두 도주했지만 노지만은 끝까지 따르고 사마영의 시신을 극진히 매장했기에 당시 사람들은 노지의 행적을 칭찬했다.

4. 영가의 난


사마월의 명령에 따라 군자제주에 임명되었다가 위위로 옮겼으며, 영가의 난이 일어나고 한나라(전조)의 공격으로 311년 6월에 낙양이 함락되자 노지는 병주자사 유곤과 함께 양읍으로 갔다가 장안에 민제가 즉위하자 상서에 임명되었다.
312년에 한나라의 유역, 유찬, 유요 등이 진양에서 유곤, 장교를 이기고 태원태수 고교 등이 항복하자 이 때 포로로 붙잡혀 한나라의 평양으로 압송되었다가 9월에 한나라에서 동궁태사에 임명되었다.

5. 최후


이후의 기록은 진서 노흠제정자지자심전(노흠, 노정, 노지, 노심 열전)과 진서 유총재기가 차이가 보이는데, 노지전에서는 아들인 노심이 유찬의 참군이 되었다가 유곤에게 투항해 노지는 아들 노밀, 노선과 함께 처형되었다고 한다. 유총재기에서는 315년 3월에 동궁태부 최위, 동궁태보 허하에게 유예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는데, 유총의 막내 동생인 유예는 황태제로 세워졌다가 장자인 유찬, 부인인 호연씨와 그 측근이 참언해 유총에게서 총애를 잃었다.
그러나 유예가 따르지 않자 취소했고 동궁사인 구유가 이를 유총에게 보고했으며, 유총이 노지, 최훈, 허하 등을 옥에 넣고 다른 것을 이유로 주살했다.

[1] 세어에 따르면 자는 자홀(子笏)이다. 노육전에 따르면 함희 연간에 노흠은 상서가 되었고, 노정은 태산태수가 되었다. 진서에 따르면 구경(卿)인 위위(衛尉)에까지 올랐다.[2] 자는 자량(子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