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1. 개요
永嘉之亂
중국 서진 말기,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분란을 지칭한다. 중국 한족 역사상 정강의 변, 토목의 변과 함께 3대 굴욕으로 손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역사적 여파를 미쳤다. '영가'의 난이라는 것은 이 난이 회제(懐帝) 사마치(司馬熾)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연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까지로 보지만 넓게는 흉노의 유연에 의한 전조의 건국부터 서진의 멸망까지를 영가의 난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과정과도 닮은점이 많다.
2. 발단
혜제(恵帝) 사마충(司馬衷)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화북(華北)지역은 큰 혼란에 빠지며 많은 수의 유민(流民)이 각지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고, 과거 한나라 시대 이후 중원에 들어와 살고있던 새외민족들에게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1] 을 본거지로 삼으며,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올랐다.
또한 한나라 때 내려진 유씨 성에 의거해 한왕(漢王)을 칭했다. 이 나라는 후에 전조(趙)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산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 하북성과 산동성도 지배하에 두었다.
3. 전개
팔왕의 난이 수습되었을 때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사마월은 예장왕 사마치를 황제(회제)로 세우고,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307년 회제의 조서를 빙자해 스스로 승상이 되었으며, 308년 유폐된 청하왕 사마담을 죽이고 회제의 친족과 측근들을 숙청하면서 인망을 잃었다. 유연의 아들인 유총이 침공해오자 동해왕 사마월은 허창에 주둔하여 군대를 불러모았는데 회제는 이를 기회라고 판단[2] , 장군 구희에게 밀서를 보내 동해왕 사마월을 주살하려 들었다.
정작 밀서를 전달하는 자가 사마월에게 체포되어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사마월은 '''온 힘을 다해 국가의 혼란을 수습한 자신을 살해하려 든 회제의 처사'''에 분노하다가 분사(憤死)해버렸고, 구심점을 잃은 서진 왕조의 중앙 정부는 빠르게 붕괴되었다. 311년 4월, 태위 왕연(王衍)이 동해왕의 영구를 장지로 운반한다는 것을 구실로 황족, 귀족, 정예병사를 포함해 무려 약 10만 명을 이끌고 사실상 '''낙양에서 도망쳐버린 것이다'''.
이 도망 행렬은 고현 영평성에서 경무장 기병을 이끌고 온 석륵에게 추격당해 '''모조리 격파되었고''' 왕연과 서진 왕조의 친왕을 포함한 48명의 고위직들이 모조리 포로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모두 살해당한다.
문제는 석륵에게 격파당한 부대는 '''낙양과 주변 지역을 방위할 주력군'''이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낙양이 포위당하고 사태가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제 사마치는 각 지방의 지원군으로 낙양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전국으로 파견된 사신 상당수는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히거나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어도 각지를 장악한 황족이나 호족들은 팔왕의 난과 동해왕 사마월의 분사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사라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지원군을 보낼 처지가 못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결국 단 1명의 지원군도 낙양으로 보내지 않았다'''.
4. 절정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석륵(石勒)과 유요(劉曜), 왕미(王彌)의 군을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유총은 과거 낙양을 한번 공략했다가 실패한 바 있어 이미 310년 10월부터 낙양 주변의 교통망을 철저하게 차단시켜 낙양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회제 사마치는 이 시점에서야 탈출을 결심했으나 육로는 차단당하고, 수로는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당해 남은 배도 유총에 의해 모두 불타버려 '''빠져나갈 방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311년 5월, 결국 낙양성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서진군은 유총을 비롯한 전조의 주요 인물들이 '''12번의 전투를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란 언급을 할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으나, 이미 뒤집힌 전세를 어쩌지 못한 채 불과 1개월도 못 된 6월경에 낙양성이 함락되었다.
황태자이며 회제의 외아들인 사마전을 포함한 3만 명이 살육되었고, 낙양은 약탈과 방화로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이때 궁전이 있는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왕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낙양을 깨끗이 태워버렸다.[8]
회제는 유총에게 체포되어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 - 현재 산서성 임분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당했다. 312년 유총은 회제를 회계공에 봉했는데 유총은 그를 연회에 초대했다. 사실 유총과 회제는 회제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총은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는데 313년 황실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노예 복장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관리들에게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과 왕준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고 말았다. 이것이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하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주군이었던 사마치에게도 옮겨붙어 결국 313년 봄에 회제는 독살당하였다. 여기까지가 좁은 의미의 영가의 난이다.
5. 결말
회제의 사후 장안은 그전에 유총이 점령했지만 잠시 흉노의 내분을 이용해 312년에 가필, 국윤(麴允), 색침(索綝)이 장안을 탈환했기 때문에 사마업은 그 곳에 본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312년 가을 염정과 가필은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313년 여름에 장안에서 민제(閔帝) 사마업(司馬鄴 혹은 司馬業)이 옹립되었으나, 서진은 이미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으로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전란으로 장안은 총 가구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고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넉 대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민제의 통치범위는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하여 사실상 지방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업은 이미 죽은 동해왕 사마월의 조카인 사마보가 진주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남양왕에 봉했으며, 사마의의 5남 사마주의 손자인 사마예가 장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낭야왕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314년경 전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나마 양주자사였으며 나중에 세워진 전량의 태조로 추증된 인물인 장궤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와주어서 수비가 가능했다. 315년 사마보는 사마업을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색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발버둥을 쳤지만 멸망은 피할길이 없었으며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고 북지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붕괴된다. 구원군이 두 곳에서 도착했지만 막상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고, 유요는 장안의 외성을 포위했다. 외성이 떨어지고 장안의 식량이 거의 바닥나 쌀 한 말이 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내성도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때 죽으로 연명하던 민제 사마업은 항복을 결심해 윗도리를 벗고 전국 옥새를 차며 입에는 구슬을 물고 양을 끌고 가는 고대 중국의 항복 의식을 수행하면서 투항했다. 그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318년에 살해되었다.
이로서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멀리 장강 너머 강남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은 사마예가 동진 을 수립해서 대를 이었다.
'''영가의 대란으로 한족은 중원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며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이한다.''' 이후 남북조를 거쳐 중국 대륙은 수가 통일하기까지 장장 260여 년간에 걸친 기나긴 분열시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동진, 송(육조), 제(육조), 양(육조), 진(육조) 등 변방으로 밀려나서도 호족들끼리 잔치 벌이는 수준을 못 벗어나고 헛짓거리만 하다가 망한 이른바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 때나 되어서야 통일왕조를 회복했으나 이 수나라마저도 또 금방 망해 버리고 바로 들어선 당나라가 되어서야 중국은 분열된 난세를 마감하고 제대로 된 통일국가가 된다.
한국사에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초기 고구려의 영역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이었지만 서진이 혼란에 빠진 이 영가의 난 시기를 전후해서 미천왕이 313년 서안평, 낙랑군 등을 점령하고 이후 광개토왕 때 후연을 정벌하고 요동까지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철을 화폐 대용으로 삼아 낙랑군에서 선진 문물들을 도입해서 백제, 신라에도 뒤지지 않던 가야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아시아 상인들의 기록에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나온다. 1907년 영국의 스타인은 돈황 부근의 봉수대에서 중국에 파견된 소그드 상인 나나이 반닥이 사마르칸트의 고용주에게 보낸 서신을 발견했는데, 서신에는 장사에 관한 내용과 별개로 ''''훈'족의 침입으로 중국의 도읍이 불타고 황제가 피신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서신이 쓰여진 시기상 이것이 영가의 난일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정설이다.
[1] 현재의 산서성 이석현(離石縣)[2] 지방의 군대를 중앙에 불러들였을 때 이를 정변에 동원하는 것은 예로부터 자주 있었다. 10년 전 팔왕의 난 때도 그랬고 100년 전 십상시를 제거하려 할 때도 그랬다.[3] 붉은 글씨 왼쪽부터 독발선비, 걸복선비, 탁발선비, 우문선비, 단씨선비, 모용선비[4] 붉은 빗금은 토욕혼. 군주가 모용부 선비족이기 때문에 빗금칠 되었다.[5] 비류수 전투에서 관구검에게 잡힌 고구려인 포로들이 형양에 모여 생활했다. 그 외에도 285년에 모용부 선비족의 습격으로 포로가 된 부여인도 있었다.[6] 고구려인처럼 세력이 작은 이민족의 경우 사마염의 이민족 유지 정책에 따라 그곳에 정착해 살게 한 것으로, 정치 군사적 능력은 거의 없었다. 낙양의 포위에 큰 의미는 없고, 대륙 북방을 잠식한 선비족의 모습에 주목하면 된다.[7] 고구려가 중국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영가의 난이 일어난 후 100년이 지난 후 광개토 대왕이 영토 확장을 광범위하게 넓혀가며 주변 야만족들을속속 자기네 세력으로 만들어갈때. 그 당시만 해도 고구려는 다른 이민족들에 비해서 세력이 약한 편이였다.[8] 그러나 왕미도 잘한 것이 없는 것이 비록 낙양을 태웠지만 나름의 군기를 유지한 흉노족보다 오히려 약탈이 극심한 부대는 흉노에 투항한 한족 왕미의 군대였다. 이들은 낙양이 폐허가 되기 전 민가를 약탈하고 역대 서진의 황릉들을 철저하게 도굴해 부장품들을 챙기고 파괴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낙양에 있는 서진의 황릉은 어느 것이 사마의 것인지, 어느 것이 사마염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를 유요가 말릴 정도였으니 극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