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팔도
1. 소개
영국(잉글랜드) 출신의 前 골프 선수. 1957년 7월 18일생. The Open과 Masters Tournament를 각각 3회씩 우승한 빛나는 기록을 갖고 있으며 전성기인 80년대 후반 ~ 90년대 중반은 현 시대 타이거 우즈급 위상을 가진 프로골퍼였다.'''Sir Nick Faldo'''[2]
1997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현재는 미국 CBS 스포츠의 골프 해설을 역임 중이다.
2. 선수 경력
2.1. 유년기 및 프로 초창기
1957년 영국 허트포드셔에서 태어났다. 팔도는 골프와는 무관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부모님이 구입한 컬러TV를 통해 지켜 본 1971년 Masters Tournament에서 활약한 잭 니클라우스의 모습을 보고 골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3]
골프의 재능은 타고 났는지 불과 3년이 지난 후인 1974년 팔도는 영국 아마추어 선수로 선발 되었다. 이듬해에는 영국 아마추어 선수권과 영국 청소년 오픈 아마추어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뒤늦게 빠져 든 골프에 흠뻑 젖은 팔도는 "학교 공부는 관심이 없었고, 수업 종료 후 최대한 빨리 골프장으로 갈 마음 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미국에서도 팔도의 골프 재능과 실력에 주목하였고, 휴스턴 대학에 골프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 수업보다는 골프가 더 좋았던 팔도는 곧 학교 생활을 그만 두고, 1976년 프로로 전향한다.
프로 자격을 얻은 후 유럽프로골프선수협회에 입회,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한 팔도는 77년에 열린 'Skol Lager Individual'에서 프로 첫 승을 거두며 프로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팔도는 20세의 나이로 '최연소 라이더 컵 유럽 대표'로 선발 되는 등 '신성'으로 각광 받았고 이 후 꾸준히 승리를 적립하며 유러피언 투어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83년에는 5월 3승을 포함, 시즌 총 5승을 거두며 유럽 투어를 대표하는 선수다운 위용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PGA에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골퍼로써 인정 받기 위해 필요한 '메이저 우승'의 기회는 적었고, 그나마 꾸준히 출전해 온 'The Open'에서도 우승 문턱에서 번번히 무너지며 '메이저는 우승할 수 없는 선수'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당시 일부 안티들은 그의 이름을 본 따 'Nick Folder'라고 부르기도 했다.[4] 라이벌로 평가된 스페인의 '세베 발레스테로스'가 비슷한 시기 메이저 4승('The Open' 2승, 'Masters Tournament' 2승)을 포함 유러피언 통산 20여승을 거둔 것[5] 에 비해 팔도 또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유러피언 투어 통산 10승 정도였기 때문에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팔도는 탁월한 리듬감과 스윙 템포로 정상급 선수로 군림했으나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서는 'Something New'가 필요함을 느꼈다. 보다 스윙을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팔도는, 유명한 골프 교습가 중 하나인 데이비드 리드베터를 만나 본인의 스윙을 제로베이스부터 완전히 뜯어 고치기로 결심한다.
2.2. 1980년대 중반 이후 월드 클래스 선수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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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가 데이비드 리드베터를 만나 골프 스윙을 뜯어 고친 것은 당시 기준으론 터부시된 이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레슨 프로는 어디까지나 '1부 투어'를 뛸 능력이 되지 않아 일반인들을 상대로 골프 교습을 하는 사람, 이상 아니었고 당연히 '실력'으로는 월등한 프로 선수가 레슨 프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의미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6] .
팔도는 당시 최첨단 기술인 비디오를 접목하여 자신의 모든 스윙 동작을 녹화, 분석하며 훈련에 임했고 어드레스에서 피니쉬까지 스윙의 모든 동작을 구분/분해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84년 5월 유러피언 대회 우승을 끝으로 3년간 스윙을 뜯어 고치며 밑바닥까지 떨어진 팔도지만, 꾸준한 노력과 함께 본인의 몸에 스윙을 맞춰 나갔고 이는 곧 성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1987년 5월, 스페인에서 열린 '푸조 스페니쉬 오픈'에서 스페인의 영웅이자 라이벌인 세베를 누르고 3년 만의 우승을 거머쥔 팔도는 본인 골프 커리어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7] . 30세가 된 그 해, 팔도는 116회 The Open에서 5언더파의 성적으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손에 쥔다. 1위와 1타차 2위로 출발한 최종일, 팔도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지랄 맞은' 영국 날씨 속에서 18홀 내내 Par 행진을 거듭하며 경기 후반 연속 보기로 자멸한 상대 선수를 밀어 낸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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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pen 우승 후 클라레저그에 입을 맞추는 팔도''
1989년 'Masters Tournament'에서 우승하며 미국 본토에서 5년 만의 2승째를 거두며 메이저 2개 대회째 우승을 거머쥔 팔도는, 1989년에만 4승을 거두었고 1990년에는 'Masters Tournament' 2연패[8] 와 'The Open' 2승째를 달성하였다. 이 여파로 90년 9월 팔도는 생애 최초의 세계 골프 1위 선수로 등극하며 그 간의 도전을 보상 받았다. 92년부터 94년까지 약 86주간 세계 1위를 유지한 팔도는, 1992년에도 'The Open' 3번째 우승을 달성하며 호주의 '백상어' 그랙 노먼과 자웅을 겨루었다.
세베의 쇠퇴 후,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라이벌로 부각된 호주의 백상어와 팔도는 1996년 'Masters Tournament'에서 드라마를 쓴다.
노먼이 첫 날 9언더파로 1위 출발. 팔도는 3언더를 기록하며 6위로 출발하였다. 2~3일째에도 호조를 보인 두 선수는 결국 최종일을 앞두고 노먼 13언더 - 팔도 7언더를 기록한다. 6타차이기 때문에 안심하긴 이르지만 그랙 노먼의 첫 그린 자켓의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최종일, 전 세계의 골프팬들은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해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지'를 직접 목도하게 된다.
노먼의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고 첫 그린 자켓에 닿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샷의 안정감은 떨어져 나갔다. 스리 퍼팅, 샷의 해저드 입수 등 안 좋은 모든 것을 보여준 끝에 노먼은 무려 6오버파를 치며 자멸하였고, 라운드 파트너였던 팔도는 5언더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3번째 그린 자켓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라이벌이자 친구의 경기력은 팔도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고, 우승하고 나서도 기뻐하는 제스추어 조차 보이지 않았다.
2.3. 선수생활 말년
이듬해 1997년 3월 PGA 투어 닛산 오픈에서 우승한 팔도[9] 는, 4월 열린 'Masters Tournament'에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탄생하는 경기의 도입부를 담당(?)하게 된다.
'Masters Tournament'의 오랜 전통에 의해, 전년도 우승자와 전년도 아마추어 우승자는 첫 날 페어링이 되는데 그 '아마추어 우승자'가 바로 타이거 우즈였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그 시점의 타이거는 아마추어 골프를 완전히 평정하고 프로 데뷔 전에 나이키와 거대 계약을 맺은, 장차 미국 프로 골프계를 물론 스포츠계를 이끌 스타로 각광 받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주목도가 높았다. 전년도 하반기에 데뷔하여 몇 경기 뛰지 않고도 2승을 거두어 '신인상'을 탔으며 97년에도 이미 상반기 1승을 거둘 정도의 상승세가 있는 선수였기 때문에 지금껏 투어를 리드한 슈퍼스타 중 하나인 팔도와의 대결은 매스컴의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팔도는 타이거에게 완패한다. 전반 첫 9홀에서 4오버파를 친 우즈가, 후반을 기점으로 상위권에 치고 올라가서 결국 그대로 대회 사상 최연소 우승자가 된 반면, 팔도는 명성에 맞지 않는 시들시들한 골프 끝에 예선 탈락을 하고 만다. 대회 전통대로 전년도 우승자가 당해년도 우승자에게 그린 자켓을 입혀 주는 역할을 했는데, 훗날 돌이켜 보면 이 장면이야 말로 '세대교체'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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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교체''
그 해 라이벌이던 세베와 함께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팔도는 더 이상 프로 선수로써 우승 경험을 하지 못하고 이 후 '라이더컵' 캡틴 및 시니어 투어 활동, CBS 스포츠의 골프 경기 해설자로 취임하는 등의 활약을 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는 BBC의 'The Open' 중계 시의 해설도 담당하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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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cm의 거구이지만, 스윙은 매우 부드러운 템포를 바탕으로 한다. 거리가 많이 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팔도의 전성시대는 2010년대 이후의 '장타자에 유리한 시대'가 아닌, 본인의 스타일을 가장 잘 구사하는 선수가 유리한 시기였기 때문에 기복 없는 스윙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전성기 '스윙 머신'이라 불리운 팔도는, 현역 시절 통산 11개의 홀인원을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아이언샷으로 유명했다.
2009년 미국의 골프 잡지인 'Golf Magazine'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스윙 중 하나로 선정 되었던 그의 샷 영상을 감상해 보도록 하자[10]
''1993 Ryder Cup에서''[11]
4. 기타
- 선수 시절엔 너무 날이 서 있어 경기 중에 페어링된 파트너와의 간단한 대화는 물론, 클럽 하우스에서 조차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같이 지켜 본 일부 동료들을 제외하면 팔도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해설자가 된 뒤 이 평가는 바뀌었는데, 본인도 성격이 둥글둥글해진 탓도 있지만[12] 해설자로써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시청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은 물론 관계자들과 마음 터 놓고 지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많은 캐디들과 함께 했지만 닉 팔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캐디는 아마도 흔치 않았던 여성 캐디, 파니 수네손(스웨덴)일 것이다.
실제로 팔도가 전성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함께 하여 그의 6개 메이저 타이틀 중 무려 4개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이 후 팔도와 결별한 파니 수네손은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 헨릭 스텐손(스웨덴) 등과도 호흡을 맞추다가 2012년 캐디 은퇴를 선언하고 멘탈 코치로 변신하였다. 2019년 'Masters Tournament'에서는 헨릭 스텐손의 캐디로 오랫 만에 복귀했는데 "이번 한번만"이라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5. 서훈
[1] 역대 5위[2] 2009년 Knight Bachelor에 서임되어 Sir 칭호가 붙는다. 1988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 뒤에 MBE를 붙일 수도 있다.[3] 정작 우승은 '찰스 쿠디'라는 선수가 잭을 2타차로 제치고 우승하였다. 찰스 본인의 최초이자 커리어 유일한 메이저 우승했다.[4] 중요한 시점에 시합이 접힐 정도로 무너짐을 말한다.[5] 최종 유러피언 투어 50승을 거두며 올 타임 1위에 올라 있다.[6] 지금은 투어를 뛰는 거의 모든 선수는 정기적으로 본인의 스윙을 점검해 줄 레슨 프로와 계약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7] 푸조 스페니쉬 오픈 우승 후 팔도는 "내 골프 인생의 중대 기로가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8] 전년도에 이은 연장전 2연승[9] 프로 커리어 최후의 우승이다.[10] 그 외 선정된 선수들은 벤 호건 - 잭 니클라우스 - 세베 발레스테로스 - 타이거 우즈, 였다. 아무래도 시대를 호령한, 그리고 선수간의 개성이 다른 스윙으로 선별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11] 스윙 리듬이 아주 예술이다. 아이언샷은 할 때마다 모두 핀 방향 직격이고 세계 1위를 지키던 시절이니 만큼 플레이는 압도적이다. 이토록 중압감이 큰 대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홀인원을 하는 실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12] 아무래도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한 발 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