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그 함마르셸드
1. 생애
그의 가문은 17세기부터 왕국에 충성하여 영지를 받은 귀족 가문으로서 그의 아버지도 1914년부터 3년간 스웨덴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웁살라 성의 소유자였고 그의 어린시절도 성에서 생활하며 보냈다. 그는 웁살라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30년 그의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스톡홀름으로 이주했다.
2. 공무원 생활과 성취
그는 중앙정부의 실업위원회에서 일했으며 1933년부터 3년간 스톡홀름대학교 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에는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근무하며 12년간 경영위원회에 소속되어 요직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OECD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에서 스웨덴 대표를 맡았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다가 물러났고 유엔사무총장 취임까지 스웨덴 국무위원으로 있었다.
그는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논의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마샬 플랜을 수립한 파리 회의의 대의원이었다. 1950 년에 그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 간의 경제 협력을 증진시키는 공동체인 UNISCAN의 스웨덴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51년스웨덴 유엔 총회 스웨덴 대표단의 부위원장, 1952 년 뉴욕에서 열린 총회에서 스웨덴 대표단 의장이 되었다.
또 1954년 12월부터 스웨덴 한림원에서 아버지의 비서로 활동했다.
3. 유엔 사무총장 선거
1952년 11월 10일 트리그베 리는 유엔 사무총장직 사퇴를 발표했다.[1] 후계자에 대한 합의는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정치와 이념 문제에 휘둘리지 않는 노련한 행정가를 원했고 최종 후보 결정을 위한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11개국 투표에서 찬성 10표 기권 1표로 선임되었다.[2] 4월 7일 회원국 투표가 실시되었고 찬성 57표 반대 1표 기권 1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또한 5년 후에 있었던 다음 회기 투표에서는 만장일치로 연임이 결정되었다.
4. 사무총장 재임
함마르셸드는 사무총장 당선 직후에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모든 유엔 부서를 방문해 최대한 많은 수의 구성원들과 악수하고 UN 식당에서 자주 식사했으며 사무 총장의 개인 엘리베이터를 모든 직원이 사용하도록 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관리자 4000명을 선발하여 총장 사무국을 구성하고 내부 규정을 만들었다.그는 UN 구성원들의 근무환경 개선에 관심을 가졌다.[3]
임기 중 함마르셸드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일에 매진하였으며 1955 년 6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중국에 억류되어 있던 공군 조종사 11명을 석방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1956년 UN 평화유지군이 설립되는데도 기여했으며 수에즈 위기에서 UN 사무총장으로서 잘 대처했다는 평이 있다.
1956년부터 UN 조직에 유대인의 참여가 시작된 것을 그의 업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1960년 독립한 벨기에령 콩고와 신생 국가 카탕가국은 콩고 내전(Congo Crisis)을 해소하기 위해 유엔 원조를 요청했다.함마르셸드가 콩고를 4번 방문했으나 소련으로부터 아프리카의 탈식민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60년 9월 소련은 콩고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사무총장의 사임, 그리고 유엔 대표자의 직제를 3인 과두제로 할 것을 요구했다.
5. 사망
1961년 9월 18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위에 언급된 콩고 내전은 콩고의 모이스 촘베가 레오폴드빌 콩고[4] 지역에서 남아공과 벨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카탕가국을 만들고 독립을 선언했으나 UN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촘베의 카탕가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루뭄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사부부와 대립하면서 내전이 일어났고 당시 카탕가국과 콩고지역에 파견된 아일랜드 유엔평화유지군이 충돌하고 있었다.
휴전을 제안하러 레오폴드빌로 가던 DC-6 비행기가 카탕가국 공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추락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조종사의 실수였다거나 심지어는 그의 죽음에 짜여진 각본이 있다는 설도 존재한다. 2014년에 벨기에계 영국인 파일럿 얀 판 리세험이 미국의 외교문서를 분석한 가디언지에서 사무총장을 격추시킨 유력한 범인으로 보도되었다. 2007년 사망한 그는 당시 카탕가 주에서 용병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었다.관련 한겨레 기사
1959년 작성된 유언장에 따라 그의 개인 문집이 스웨덴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고 그의 업적을 기려 노벨평화상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