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검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능연각훈신
거양공(莒襄公)
唐儉 | 당검
'''

'''시호'''
양공(襄公)
'''작호'''
거국공(莒國公)
'''이름'''
당검(唐儉)
''''''
무약(茂約)
'''부친'''
당감(唐鑑)
'''생몰'''
579년 ~ 656년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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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장수이자 능연각 공신 중 한 명. 자는 무약(茂約), 병주(幷州)군 진양 사람이다.

2. 생애


부친 당감이 수나라 때 융주자사로, 당을 세운 고조 이연과 군사 업무를 같이 관장한 적 있어 친한 사이였다. 이에 당검은 뒷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과도 일찍 교유하였고 태원에서 같은 시절을 보냈다.
당검은 성격이 호방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고, 수나라가 어지러워질 때도 몰래 이세민에게도 대계를 세우도록 권하였다. 고조 이연이 일찍이 불러 물으니 당검은 이연에게도 거병을 촉구하였다. 당검은 이연이 병사를 일으키고 대장군부가 설치되자 기실참군, 위북도 원수사마에 임명되었다. 당검이 이연을 좇아 수도 장안을 평정하니 상국부 기실에 임명되고 진창군공에 봉해졌다.
당이 건국된 직후인 618년 내사사인으로 승진되었고 중서시랑, 산기상시로 옮겨졌다. 619년, 하현 사람 여숭무가 현령을 죽이고 스스로 위왕을 칭할 때, 당검은 이효기, 독고회은, 우균과 함께 군사를 받아 파견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고 만다. 그런데 독고회은이 원군실과 함께 모반을 꾀하는 일이 벌어지고, 당검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 음모를 알린다. 이 일로 독고회은은 자살하고 그 무리는 죽임을 당한다. 고조는 당검이 포로로 잡혀 욕을 보았으면서도 조정을 잊지 않았다고 칭찬하며 관직도 복직시켜주고 독고회은에게서 빼앗은 재산도 다 당검에게 주었다.
당검은 예부상서, 천책부장사, 검교황문시랑에 임명되고, 거국공에 봉해졌다. 후에 수주도독이 되어 면주 6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당검은 당태종 시기 돌궐에 두번이나 사신으로 갔다 오는데, 당검의 의견에 따라 당태종은 이정을 총사령관에 임명, 돌궐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당검은 천성이 솔직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아첨의 말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당연의전전에 수록된 울지공 일화 중에도 잠깐 등장한다. 한번은 당검이 당 태종 이세민과 장기를 두었는데, 당검은 워낙 아첨을 싫어하고 지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와의 장기에서조차 온갖 계책을 사용해 전력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크게 분노한 이세민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당검을 담주 자사로 쫓아냈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황제는 울지공을 시켜 당검의 집에 다녀오도록 하면서 "만약 당검이 추호라도 나를 원망하는 말을 뱉으면 그 즉시 목을 베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1]
당태종 시절 돌궐에서 귀국한 그는 민부상서가 되었는데, 황제와 함께 낙양원에 사냥을 나갔다. 멧돼지 떼가 숲에서 뛰어 나오니 황제가 화살 네 발을 쏘아 네 마리를 죽였다. 멧돼지 한 마리가 당태종의 등자로 뛰어오르자 당검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것을 주먹으로 쳤다. 그 틈을 타서 당태종이 칼을 뽑아 멧돼지를 베고 돌아보아 웃으며 말했다. "천책장사(天策長史) 그대는 상장군(上將軍)이 적을 무찌르는 것을 보지 않았소? 어찌하여 그리도 두려워하시오?" 그러자 당검이 "한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놀라우신 무예로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어찌 짐승 한 마리에 그리도 흡족해 하십니까?"라고 대답하였고 황제는 수렵을 그만두었다. 대신 기뻐하며 당검에게 광록대부를 덧붙여주었다.
당검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빈객들과 술을 마시는 걸 낙으로 삼는 날도 많았다. 이 때문에 법에 저촉되어 강록대부로 편관되기도 했다. 칠십 팔 세까지 살았고 벗이 많았으며 당태종과도 좋은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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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지공이 거부해서 죽진 않았다.